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느 1:3, 10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셀라)
시 87:3
성경이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서로 관련이 없거나 문이 닫혀 벽으로 감싸였거나 둘 중에 하나이겠다. 요즘은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의 현실이 그에 따른 논거가 되고 우리 삶의 여러 형태가 그 증거가 되는 것을 본다. 이는 아주 먼 옛날 어느 나라 누구네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가라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하고 본문은 시작한다. 여기에 ‘여호와의 말씀’이란 말로 시작하지 않았다. 본문은 이를 영감을 받아 하나님의 전언을 전하는데 앞서 여러 예언서들의 신적인 기원, 곧 그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심은 예언서를 전하는 데 있어 기본적인 전개다. 예레미야도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렘 1:2).” 하여 그 말씀의 출처를 밝혔다.
호세아도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1:2).” 하고 저에게 내리시는 명령이 엄연한 여호와의 명령으로 인한 것임을 알리었다. 아모스도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암1:1).”
그렇게 예언서들은 철저하게 예언적 특성을 갖고 있는 메시지의 전달을 특수한 경우로 삼고 전달하였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첫 구절은 느헤미야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시사하면서도 에스라서에 이어지고 있는 것임을 알게 한다. 느헤미야에 의해 독립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밝힘으로 말이다. 한편 또 ‘하가랴’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쉽게 발견되지 않는 이름으로, 그 의미는 분명치 않다. 다만 ‘여호와의 흑암’으로 추측된다. 반면에 ‘느헤미야’는 포로기를 전후하여 흔했던 이름이다. 그의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위로하신다.’ 하는 것으로 바로 이 이름의 축약형이 <나훔>이다.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나훔 1:1).”
오늘 본문은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즉 주전 445년을 가리킨다. 기슬르 월에 느헤미야가 수산 궁에 있던 때라 밝힌다. 기슬르 월은 태양력으로 11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에 해당되는 달(月)이다. 이때 아닥사스다 왕은 당시 느헤미야가 머물러 있던 수산 궁에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페르시아 왕들은 겨울에는 ‘바벨론’을, 여름에는 메대의 ‘악메다’를 휴양지로 삼아 거기서 통치하였다. 봄이나 가을이 되어야 ‘수산 궁’으로 돌아왔다. “메대도 악메다 궁성에서 한 두루마리를 찾았으니 거기에 기록하였으되(스 6:2).” 또 “당시에 아하수에로 왕이 수산 궁에서 즉위하고(더 1:2).” 이를 기반으로 느헤미야가 고국으로부터 급박한 소식을 접하고(2-3), 즉시 왕에게 알리고 귀국할 수 없었던 원인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느헤미야가 자신의 괴로운 심정과 자초지종을 아뢰고서 귀환 허가를 받은 것은 ‘니산 월’이었다.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 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느 2:1).” 때는 주전 444년 3, 4월에 해당되는 때였다.
본문은 성벽 재건 사실을 증언하는 전반부(1-7장)와 백성들의 부흥 운동을 언급하는 후반부(8-13장)로 구성되었다. 그중에서 본서 전반부의 서막에 해당되는 오늘 내용은 느헤미야가 귀환하게 된 배경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본장은 스롭바벨을 중심으로 한 제1차 귀환과 고레스 왕의 조서에 따라 그리 실행되고(스 1장), 에스라를 중심으로 한 2차 귀환과 아닥사스다의 조서(스 7:11-28)에 이어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한 3차 귀환과 그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기술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본문은 그리하여 예루살렘에 대한 슬픈 소식을 전해들은 느헤미야의 심정을 그린다(1-4). 그런 가운데 이도저도 어쩔 수 없는 입장에서 느헤미야의 선택은 그러한 문제를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는 금식 기도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5-11). 이를 통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기도하기의 필요성과 그 내용을 살필 수 있게 한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훼파된 채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즈음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헌신적인 지도자가 없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행정적으로 관할하던 총독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부패하여 사리사욕을 취하는 데 급급할 뿐 하나님의 성전과 그에 따른 성벽이 훼파되었다는 것에 그리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느 5:15).”
그러니 오늘 날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점과 그에 따른 상황이 닮았다. 당시 그들의 권력으로 매관매직을 일삼았고 이를 이용하여 출세와 영달을 꾀하던 이들이 하나둘 수사로 밝혀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도 여전히 이를 두둔하거나 은폐하려는 이들의 발악적인 태도에 의심을 갖게 한다. 저들은 여전히 어떤 권련에 기대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다른 데 집중하도록 여론을 조작하거나 이를 선동한다. 그러니 이때나 본문의 때나 사람 사는 세상의 일이란 게 참으로 기묘하게 서로 맞닿아 있다. 성경은 일갈하길,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출 23:8).”
하여 오늘 느헤미야도 밝히는 바, “깨달은즉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그들이 뇌물을 준 까닭은 나를 두렵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 범죄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느니라(느 6:12-13).” 그러나 저는 바로 알았고, “이는 그들이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13:2).”
결국 뇌물이란,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시 26:10-11).
스스로 어떤 이익을 취하려 할 때 숨어서 거래하는 사악함이다. 하여 “이익을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살게 되느니라(잠 15:27).” 그렇게 해서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사 5:23).” 하나님 앞에 무례함이다. 즉 우리는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33:15-16).”
우리는 오늘도 이러한 현실의 사악한 어두운 면을 보면서 공의의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물론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소식을 들었던 것은 주전 445년보다 훨씬 이전인 458년에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지도자로 활동했을 때였다. 하지만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한 그 해에 종교적 개혁을 전개한 후, 이스라엘 공동체가 신앙적 안정을 이루자 예루살렘에 계속 거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느 8:1).”
따라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탁월한 지도자를 갖지 못함으로 느헤미야가 귀환할 때까지 민족적 단합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들은 오늘 핵심인 ‘성벽 재건’을 이룰 수 없었다. 물론 그들은 몇 번이나 성벽 재건을 위한 사업을 시작하였고 나름은 노력하였을 것이다. “왕에게 아뢰나이다 당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올라온 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이 패역하고 악한 성읍을 건축하는데 이미 그 기초를 수축하고 성곽을 건축하오니 이제 왕은 아시옵소서 만일 이 성읍을 건축하고 그 성곽을 완공하면 저 무리가 다시는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바치지 아니하리니 결국 왕들에게 손해가 되리이다(에스라 4:12-13).”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응집시킬 구심점을 갖지 못했다. 또한 사마리아 등의 다른 민족들의 방해가 극심하였다. 그렇게 바벨론 군대에 의해 훼파된 예루살렘 성벽은 약 131년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느 1:3).” 문제는 바로 성벽이 훼파되어 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만큼 큰 곤경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은 성벽의 보호를 받지 못함으로 수시로 이방인들에 의해 손쉬운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느헤미야에게는 이러한 사실이 심각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간절한 기도는, 자신이라도 얼른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벽 재건을 직접 추진할 수 있기를 하나님께 간청하였던 것이다. 하면서 저는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되뇌며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하고 주께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느 1:9-10).”
먼저 돌아보게 되는 것은 우리 믿는 자는 안 믿는 백성들에게조차 하나님의 위로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그러므로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7:13).”
그럴 때 보면 주를 믿고 경외함으로 우린 우리도 모르는 용기를 낸다. 어떤 일이 터졌을 때 평소와 다르게 의연하고 냉철해진다. 곁의 가족들이나 안 믿는 이들에게 이 모든 일의 주권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한다. 가령 동생의 재판 문제는 서로 합의가 이루어져 결국은 돈으로 간신히 해결되는 듯하다. 합의서를 쓰고 서로 서명까지 했으니 다른 변수야 없겠지만 오히려 주변 식구들이나 남들이 걱정을 더했다. 본인은 의연하게, 좀 어떠니? 하고 물으면 마치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괜찮아!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남의 일 이야기하듯 하였다. 물론 그 속이 오죽하여서 신장도 상하고 몸도 많이 힘들어했지만… 우리 영혼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주의 놀라우신 권능이 숨어 있다.
하여 우리는 오늘 느헤미야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사람들이다. 곧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 우리가 결정적인 순간에 의연할 수 있는 권능은 저 본향을 바라고 사모하는 마음이 항상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1-2).”
그러므로 성도란 이 땅의 안위와 평안을 위해 뇌물을 주거나 받지 않듯이 사악함으로 자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는다. 즉 이 땅의 그 어떤 권세도 유한하여 고작 5년짜리 대통령이란 권한을 무소불위한 것처럼 사욕을 탐하다 그 결국은 초라하다. 설령 평생직장으로 검찰이니, 판사니 하는 것으로 마치 자신은 이 땅에서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릴 거라 생각하지만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모든 게 때가 있고 이를 마치 천년만년 누릴 것처럼 살다 그 꼴이 수치만 남을 따름이다. 보면 그러든 이들이 재판이나 구속을 피해서 스스로들 아플 예정이다. 그러니 참 초라하고 부끄럽다.
그러나 우리가 의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믿음으로 붙드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우리의 생명은 이 땅의 유한한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그 시민권은 저 하늘에 있어 영생으로 누리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13, 20).”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1).”
비록 오늘 본문에서 저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로 인하여 포로가 되어 붙들려갔고 그 기간 성전이 무너지고 사람들은 흩어졌으나 하나님은 또한 다시 모으시는 데 있어, 이 무리의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1-13).” 곧 오늘이 끝이 아니다. 여기가 전부가 아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 그러므로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시 87:1-2).
하여 오늘 느레미야는 먼저 주 앞에 회개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느 1:10).” 하니,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셀라)
(3).
우리가 얼마나 존귀하고 귀한 존재들인가 하면, 이를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를 지셨고 곧 영생의 날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6-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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