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하현. 2025. 9. 8. 17:16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느 2:20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시 88:1-2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상사가 있고 그에 따른 위정자들도 있다. 그럴 때 오늘 느헤미야의 공손함과 저들에 대한 존중은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가능하였다. 성경은 일러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1-2).” 물론 이는 저들의 불의도 용납하고 복종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오늘 느헤미야는 자신의 지위에서 비록 이방나라 왕을 섬기는 일에 있어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할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하고 이를 알리고 있다.

 

니산월은 유대 종교력으로 정월에 해당한다. 때는 아닥사스다가 왕위에 오른 지 21년이던 때이다. 그 자리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페르시아의 왕들은 이와 같은 잔치를 자주 베풀었다. 고대 중근동 국가들의 일반적 관습이다. 아마도 그때 아닥사스다 왕은 바벨론에서 월동을 마치고, 니산월(양력으로 3-4월) 즉 봄에 느헤미야가 있던 수산 궁으로 돌아왔다. 술 맡은 관원으로 느헤미야가 왕에게 나아갈 수 있는 기회였다.

 

느헤미야는 민족적 재난에 관한 소식을 듣고 가슴 아파 하면서 이를 왕에게 말하기 전에 먼저 주께 아뢰었다고 명시한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4).” 오늘 본문에서의 이 묵도는 소리 내지 않고 속으로 또는 마음으로 주 앞에 먼저 아뢰는 기도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을 때에 느헤미야는 성급히 입을 열지 않고 신중하였음을 알게 한다.

 

상대는 엄연히 팔라스타인을 평정하고 있는 국가의 왕이다. 그의 권력은 막강하였을 것이고, 이를 이용할 생각으로 마음이 앞서 간청할 수도 있었다. 이처럼 왕 앞에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때 아닥사스다 왕이 먼저 느헤미야의 표정을 살피고, 그가 어두운 것을 보고 무슨 근심이 있는가? 하고 마음을 쓰는 일이 선행되었다. 우린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리 행하심을 짐작할 수 있다.

 

느헤미야를 위해 어떤 배려의 마음이 준비되었고, 이는 느헤미야가 그리 묻는 왕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默禱)하고’ 입을 열 정도로 저는 그 일의 전후사정을 마음에 두고 주님께 교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우리의 신앙이란 어떤 일에서나 그 일이 정녕 사소한 일이라 해도 ‘묵도’하는 일상이 몸에 밴 자는 귀하다. 그렇듯 길을 걸으면서, 어떤 이를 지나치면서, 무슨 일을 마음에 두고… 수시로 주 앞에 묵도하는 습관은 귀하다.

 

묵도는 기도하는 것으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조잘거리듯 아뢰는 수다와 같다. 미주알고주알 나의 속엣 얘기를 주께 아뢰는 일상은 수시로 불현듯 일어나는 일이다. 간혹 나는 나의 여기저기 아픈 일을 두고 주 앞에 투덜거리듯 아뢰기도 한다. 이것도 묵도다. 시편의 기도다. 가끔 시편을 묵상하다보면 어떻게 이런 말까지 주께 아뢰고 구할 수 있지? 하고 의아한 느낌이 드는 내용도 있다. 오늘 시편도 그러하다. 그만큼 간절한 소원은 더러 구구절절 수다스럽고 떼쓰듯 아뢰게도 된다. 할 말 못할 말이 따로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게 다 기도로 가능하다. 주께 아뢰면 저주가 아니지만 직접 상대를 향해 말하거나 사람에게 수다를 떨면 죄가 된다.

 

주를 신뢰하는 마음을 품고서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로써 매어 달리는 것은 모두 묵도다. 한나가 주절거리다 술 취한 것으로 오해 받던 것을 제사장이 나중에 알고는,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삼상 1:17).” 묵도란 말씀을 묵상하는 일과 같이 매우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영역의 개인적인 기도다.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성전에서 주께 기도하며 간구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왕상 8:33-34).”

 

이와 같은 솔로몬의 묵도처럼 느헤미야의 이 같은 기도는 자신의 소원이 아닥사스다 왕에게 정확하게 전달되게 하였다. 곧 대중기도가 갖는 단적인 문제는 감정적이거나 가식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남 앞에서 남이 듣는 것을 의식하고 할 때의 기도는 자칫 외식하는 자의 기도가 될 수 있다. 하여 주님은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어찌 이를 강조하시는가 하면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7).” 그러므로 감정적이거나 말이 너무 많거나 수려하여 남을 의식할 때 기도는 훼방받는다.

 

오늘 느헤미야의 묵도는 왕에 의해 호의적으로 가납될 수 있기를, 먼저 하나님께 구하여 바래서 드려졌음이다. 그렇게 묵도한 후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5).” 하고 느헤미야는 왕께 자초지종을 말하였다. 결코 성급하게 서둘지 않았다. 자신의 요청을 가장 적절하게 기회를 찾을 때까지 하나님께 먼저 아뢰어 구하면서 기다렸다. 묵도는 말이 필요 없는 말들이다. 사람 사이에서는 침묵하는 것 같으나 속으로는 수다스러운 기도다.

 

여기서 왕의 관심과 배려가 어쩌다 저절로 생겨난 게 아님을 알게 한다. 그렇게 느헤미야는 ‘진실로 왕의 면전에서 근심했다.’ 이는 전에 보이지 않던 표정으로 나타났다. 왕 앞에서 그것도 면전에서 술잔을 채우면서 그러는 게 의도적일 수는 없다. 모든 게 자연스러운 우연 속으로 감추어졌다. 이에 왕은 느헤미야의 근심과 그 사유에 따른 필요를 모두 들어주며 저의 필요에 따라 그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쪽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8-9).”

 

이렇게 되자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10).” 곧 저들 이방인들의 반응은, 성전 재건 사업에의 참여 요청이 거부된 사건이 있은 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냉전 상태가 매우 심화되어 있었던 때이다.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스 4:4-6).”

 

그런 상황에 호론 사람 산발랏은 사마리아의 총독으로서 또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언급되고 있는데, 유대의 대제사장 가문과 깊은 친교를 맺고 있었다는 점을 가늠할 수 있다. 즉 대제사장의 아들 하나가 산발랏의 사위였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쫓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느 13:28).” 곧 이들은 나름 여호와를 섬겼던 자들이다. 이들의 종교는 지극히 ‘혼합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스 4:1-2).” 순수한 신앙을 지녔던 이스라엘 백성으로는 용납될 수 없다.

 

호론은 윗 벧호론과 아랫 벧호론 중 어느 하나를 의미한다. “서쪽으로 내려가서 야블렛 족속의 경계와 아래 벧호론과 게셀에까지 이르고 그 끝은 바다라… 에브라임 자손이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지역은 이러하니라 그들의 기업의 경계는 동쪽으로 아다롯 앗달에서 윗 벧호론에 이르고(수 16:3, 5)” 이곳은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차지하고 살던 지역이다. 그리고 산발랏은 바벨론식 이름으로 ‘신(月神)이 생명을 주신다’는 뜻으로 달을 숭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암몬 사람 도비야는 산발랏의 휘하에 있던 종으로, “또한 그 때에 유다의 귀족들이 여러 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도비야의 편지도 그들에게 이르렀으니 도비야는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도비야의 아들 여호하난도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므로 유다에서 그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6:17-18).” 도비야는 대제사장과 친밀하게 연락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보아 자신을 여호와를 섬기는 자로 자처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뒤에 나오는데,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의 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만들었으니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그릇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13:4-5).” 그러므로 암몬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선하심’이라는 의미를 갖는 유대식 이름 도비야는 그렇게 저렇게 자신도 믿는 자로 여기며 신앙을 가진 교회의 흔한 ‘일반적인 성도’라는 생각도 든다.

 

요즘 글쓰기를 하는 누가 자신은 교회도 나가고, 철학관도 다니면서 속엣 얘기를 하며 위로를 삼는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였다. 또 누구는 교회 집사이기도 한데 새로 사업을 하는데, 물론 안 믿는 가족들 때문이라고는 했지만 고사를 지내고 내게도 그 고기와 떡을 가져오기도 하여 난감하였다. 오늘 본문의 ‘도비야’에 대해 생각하다, 그런 류의 신앙의 소유자들이 우리 주변에 의외로 많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무리일까? 

 

사마리아 총독으로 있는 이의 이 같은 반응은 정치적으로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성벽 재건에 반대하는 자신의 뜻이 그러해서 그럴 수 있다. 즉 남유다에 속하는 예루살렘의 재건으로 사마리아가 유다에 비해 상대적으로 눌리는 것 같아서 그럴 수도 있겠고… 그런데 대제사장이나 도비야 같이 성전의 일을 맡았거나 나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이들이 이와 같은 정치적인 문제로 대립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리하여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19).” 여기서 아라비아 사람은 앗수르 시대부터 페르시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요단 동부 지역의 지배 계급이었다.

 

‘게셈’이라는 이름은 애굽 땅의 ‘카이누’와 함께 여신을 섬기고, 아람어 비문에 적힌 ‘게달의 왕’으로 묘사되어 있다. 즉 아라비아 사람 게셈은 요단 동쪽 및 남쪽지역을 다스리던 자였을 것이다. ‘게셈’이 ‘도바야’와는 달리 ‘산발랏’의 휘하에 있었던 관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6:2).” 여기서 이 ‘게셈’이 사마리아의 총독 ‘산발랏’과 함께 느헤미야에게 대면(對面) 요청을 했다는 점을 통해 알 수 있다.

 

어쨌든 오늘 본문에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굳건히 서서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2:20).” 하고 외친다. 곧 묵도의 힘, 즉 기도는 우리에게 남모를 담대함을 준다. 그리하여,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이는 바울의 설교로 이어져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그러므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굳게 서서 오늘도 ‘묵도(黙禱)’하듯 아뢰어 묵상한다. 그리할 때,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사 45:2-3).”

 

하심으로,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시 88:1-2).

 

미주알고주알 할 말 못할 말 없이 내 속에 차는 모든 생각으로 아뢴다. 그것이 염려이면 염려하는 마음으로, 화가 나면 화가 나는 심정으로, 속상하면 속상한 대로, 아무 때나 언제든지… 묵도는 호흡과 같아서,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6-7).

 

하고 툴툴거리면서도,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9-10).

 

하고 때로는 당돌하지만 있는 그대로 아뢰며,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1-13).

 

하고 주 앞에 뻗대듯 입을 한껏 내밀고서도,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17).

 

하고 주께 아뢰면서도 이 또한 주의 섭리 가운데 일임을 인정하면서 그 뜻을 헤아려 알기 원하는 심정으로 일상 가운데 묵도하는 것이다.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