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마음속이 불 붙는 듯하더라
더 1:12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 100:5
사랑은 힘들다. 힘든 건 사랑이 아니라는 말은 틀리다. 힘들지 않은 사랑도 있을까?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은 더 힘들다. 사랑은 결국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 사랑은 죽음보다 잔인하고, 사랑의 잔인함은 자신을 내어주기까지이다. 죽음은 잔인하여 단절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는 추측이다. 닥치기 전에 둘 다 추상적일 뿐이다. ‘사랑의 노래’와 ‘죽음의 두려움’은 부풀려지거나 재생산된다. 상상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직접 당사자 외에 둘 다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오늘부터 전개되는 에스더서는 성경 속의 ‘사랑의 단편 소설’ 같다. ‘사랑의 시편’으로는 아가서가 있다. 당시 유다 민족은 어려운 역경을 견디고 있었다. 이를 전달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역사가 얼마나 구체적인지 에스더서는 보여준다. 곧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데 있어, 한 사람 또는 하나의 국가가 그 주변을 이루는 데 있어 미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상황으로까지 소소한 일들이 우연으로 전개되었다. 마치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연과 우연들이 일어나고 사그라지고 다시 쓰러졌다 일어서기를 되풀이하는지 모른다.
다시 말해 당대의 최고 권력자인 아하수에로 왕의 위세와 치세와 치국의 전개는 왕후 와스디가 어쩌다 파국을 맞고, 이어 에스더가 왕후가 되게 되는지… 우리가 이 일을 글로 접하여 상상할 때,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누굴 만나고 헤어지기까지 미처 내가 모르는 이면에서 이면으로 전 우주가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쓸려왔다 밀려나기를 반복하는 것과 같다. 이는 각각의 구조와 짜임에 따라 움직이다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골을 타고 이 물은 내륙 깊숙이까지 닿았다가 먼 바다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그렇게 오늘 본서는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라는 소설의 구성요소를 지고 있다.
오늘은 이야기의 발단 과정으로 당시 이스라엘의 역경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보호하시고, 어떻게 그 상황을 전개하시는지를 보여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한 하나님의 손길은 암시와 복선을 깔고, 전개와 갈등을 토대로 흐르고 흘러간다. 이 모든 과정은 당시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변함없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심어주고 있다. 이러한 주제가 점진적으로 ‘소설의 전개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에스더서의 구조다.
전반부는 유다의 민족적 위기와 그것이 서서히 다가오는 위협과 긴장으로 불어난다(1-4장). 그런 가운데 세상의 모든 역사는 궁극적으로 여호와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으로 역사 속에 깊숙이 계신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에 극적으로 해결 받고, 이를 풀어가는 우리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이야기로 변환하듯 후반부로 이어진다(5-10장). 곧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유다의 승리는 궁극적으로 ‘다 이긴 싸움’이 될 것이지만, 이와 같은 구성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발단과 전개 속에서 가슴 졸인다.
서론에 해당되는 오늘 본문으로 페르시아의 왕궁에 대한 소개와 아하수에로 왕의 연회를 서술하며 묘사하고 있다. 저의 됨됨이를 알 수 있는 부분으로 “금 잔으로 마시게 하니 잔의 모양이 각기 다르고 왕이 풍부하였으므로 어주가 한이 없으며 마시는 것도 법도가 있어 사람으로 억지로 하지 않게 하니 이는 왕이 모든 궁내 관리에게 명령하여 각 사람이 마음대로 하게 함이더라(7-8).” 그만큼 저는 너그러웠고 여유가 있었다.
또한 신중하였다.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보이게 하라 하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마음속이 불 붙는 듯하더라(11-12).” 전후맥락으로 왕후 와스디가 어째서 왕의 부름에 거절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당시 여자는 소유의 개념으로 왕후 역시 다르지 않았을 것을 감안하면, “왕이 사례를 아는 현자들에게 묻되… 왕후 와스디가 내시가 전하는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니 규례대로 하면 어떻게 처치할까?” 하고 물었다(14-15). 그러한 관례를 따른 것이고, 저는 신중하였던 것이다.
이에 “므무간이 왕과 지방관 앞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왕후 와스디가 왕에게만 잘못했을 뿐 아니라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의 관리들과 뭇 백성에게도 잘못하였나이다.” 하는 해석과 함께 그 근거로 “아하수에로 왕이 명령하여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도 오지 아니하였다 하는 왕후의 행위의 소문이 모든 여인들에게 전파되면 그들도 그들의 남편을 멸시할 것인즉 오늘이라도 바사와 메대의 귀부인들이 왕후의 행위를 듣고 왕의 모든 지방관들에게 그렇게 말하리니 멸시와 분노가 많이 일어나리이다(16, 17-18).” 그렇게 해서 와스디 왕후가 폐위되고 에스더가 왕후에 등장하는 이야기의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
이렇듯 사건의 발단과 개요가 소개되고, 이를 도입으로 하여 페르시아 왕궁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이루어졌다. 당시 페르시아가 가졌던 권력과 부(富)를 감지할 수 있고, 역사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이러한 일’ 곧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가 살면서 두려워하지 말 것은,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31).” 하시는 아주 당연하면서 지극히 마땅한 일에서 공감하게 된다.
즉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 12:7).”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앞서 사랑과 죽음의 동질적인 배면이랄 수 있는 두려움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게 된다. 더불어 페르시아의 상황에 대한 묘사는 점차 유대인들이 처하게 될 위험의 심각성을 전해 주려는 의도에서 점점 고조되게 될 긴장을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권세의 나라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탄압과 억압을 하나님이 어떻게 해결하시고 저들을 제압하시는지 보여줄 것이다.
곧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숙명은, 우리들로 하여금 어떠한지 바울의 설교가 일품이다. 곧 우리는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하여 오늘 본문 이후 전개될 내용으로도 멸절당할 수밖에 없는, 힘없고 작은 민족에 불과하여 ‘그 위기’에 처해지지만 장차 닥쳐올 유다 민족에 대한 위협을 궁극적으로는 승리하는 결말로 바꾸어 놓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이를 위해 극적으로 섭리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을 짐작하게 한다. ‘뜻밖의 사건’이 늘 오늘의 발단이 되고 핵심이 된다. 왕이 부르는데 왕후가 거절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은 하나님께서 지난 오랜 세월 동안 끝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켜오실 때 전개하셨던 방식이다. 우린 성경의 독자로서 이를 본다. 묵상하며 그 시대에 있었을 때도, 우리가 지나는 오늘 이 시간 속에서도 같다.
자주 떠올리며 묵상하는 나의 일생을 돌아보면 ‘아, 그래서였구나!’ 하는 데서 가끔씩 눈물이 핑, 돌기도 한다. 어쩌면 나는 찬송가 <샘물과 같은 보혈은>의 작사가 윌리엄 쿠퍼와 같이 ‘고질적인 우울감’이 늘 따라다녔다. 생후 6개월에 찾아온 장애와 이후 상상 이상의 불편과 학창시절에 당했을 법한 놀림과 사람들의 시선으로, 굴곡진 나의 유년의 기억은 비틀어져 있었다. 거기에 부친의 터무니없는 목회-나는 늘 아버지의 목회를 전투적이라 생각했다-와 그 현장의 지독했던 가난은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웠다.
가령 초등학교 5, 6학년 때 사택이 없어(늘 그런 형편이었지만) 2층 건물 2층에 세든 교회 옥상에다 가건물을 짓고 살았다. 정말이지 ‘거지 똥구멍에서 콩나물을 빼먹고 살았던 시절’ 우리보다 더 가난했던 어느 집사의 가정이 함께 우리의 옥상에 곁들어서 같이 기거하게 되었다. 날이 푸근할 때는 그래도 나름 낭만이 있었다. 가벽과 가벽은 부친의 책꽂이와 가구들과 종이박스와 비닐로 뒤집어씌운 가건물이었고, 밖에다 천막을 쳤는데 당시 교회에 오는 청년들이 저녁에 기도하러 왔다가 옥상에서 같이 자고 가기도 했다. 그때의 서울 하늘에도 별이 꽤 많고 선명하여 여름방학 같은 때는 새벽까지 낄낄거리며 형들과 누나들의 틈에 끼어 있기도 하였다.
어느 날, 같이 생활하던 집사의 가정은 우리처럼 사남매였는데 둘째였던 형님은 수재란 소릴 들으며 서울대 철학과를 다니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저가 도봉산에서 실족사로 죽었다. 어린 나이에 죽음은 막연하였고 순간 증발하는 물과 같은 거였다. 슬픔은 막연하였고 우울하였다. 두려움은 그 다음으로 생경한 감정이었다. 그런데 저의 죽음이 실족사가 아니라 가난을 비관하는 자살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나의 어린 감성은 ‘앗, 그러한 선택!’에 대해 매료되었다. 그 느낌은 마치 길을 가다 주운 돈처럼 놀라웠고, 아무도 몰래 신발 밑바닥 깊은 데 숨겨놓은 비상금 같았다.
언제든 쓸 수 있는 오롯이 내 것, 아무도 모르고 유일한 ‘나만의 선택’으로 ‘어떤 힘’이 생긴 것 같았다. 그때부터였을까? 학교에서나 아이들의 놀림에서나 사람들의 시선에서나 나는 그 동안 나를 괴롭히던 것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가난이나 장애로 인한 불편함 따위도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게 되었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는, 나만의 비상금 같은 힘이 생긴 것처럼 말이다. 그런 생각은 나를 단단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실제 초등학교 졸업 후 병원에서 보낸 시간으로 1년을 휴학하고, 중학교를 1년 늦게 입학했을 때 아이들의 괴롭힘은 두 배로 무거워졌고 가차 없었다. 동기였던 아이가 선배랍시고 괴롭히는 것은 다반사고, 이를 어찌 누가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것이 그땐 '어떤 힘'인지 몰랐다.
그렇게 저렇게 죽으려 했고, 죽을 뻔 했고, 죽을 수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늘 일어나는 이상한 우연과 이상한 인연이 이어졌다. 궁극적으로 나로 하여금 살게 하였던 것은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섭리였다. 지금에 와서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오늘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 와스디의 어처구니없는 ‘거절’과 그에 따른 ‘처치’가 주는 이상한 전개나 우연처럼 나의 생각은 갈래를 뻗어가다 그 출처는 알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셨고, 총리로 세우셨다. 이스라엘을 흉년에서 구출하셨고, 420여 년의 애굽 생활에서 바로의 압제로부터 구원의 손길을 펼치셨다.
하나님은 지도자 모세를 세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들을 이끄셨고, 이와 유사하게 하나님의 섭리는 그로부터 약 천 년이 지난 오늘 여기 본문에서 페르시아 땅에서도 또 똑같은 상황을 당면하게 하셨다.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바벨론에서 1차 귀환 이후 성전 재건이 이루어지게 하셨다. 유다 땅은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루었고, 바벨론에 남은 유다 백성은 학살 위기를 당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유다 민족을 어떻게 그때마다 구원하시고, 이를 위해 얼마나 철저하게 계획하고 이끄시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보잘것없는 인생 이야기 속에서 나의 하나님은 그때마다 이루시는 구원의 과정을 연상하게 된다. 그때 그 '어떤 힘'이 '자살에 대한 동경'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즈음에 만났던 소경 장로님과의 만남도 신기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때 살았던 나환자촌에서의 생활에서 그곳에서 친하게 지냈던 또래 친구들의 관심과 그 이상의 사랑의 친분이 있었다. 곧 아하수에로의 권력이나 와스디의 폐위는 모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당시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내포하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알게 하는 것과 같다.
모든 이야기는 역동적으로 관성의 법칙이 존재한다. 유다 민족의 구원을 위한 축으로 돌아간 것은 하나님의 구속이었고 사랑이셨다. ‘나의 이야기’는 아주 소소한 만남과 자잘한 이야기 속에서 누구의 손길로 다시 편입하여 신학부를 할 수 있었고, 비록 곁길로 빠져 세월이 흘렀으나 다시 10여 년을 넘기면서 끝장인 줄 알았는데, 다시 또 붙드시고 부르시던 신대원으로 끌어당기신 하나님의 역동적인 구원의 구원의 손길에 두 손 들고 이제 승복하였다. 이를 축으로 나의 이야기는 모두 하나님의 구원의 원심력을 따라 작동하는 것이었다.
오늘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와 그 주변 사람의 이야기가 이방인들 이야기로 이루어져 이스라엘과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듯하나 저들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짜인 전개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에스더가 이야기 속에 등장하지 않지만 유다 민족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그녀를 등장 시키기 전에 하나님의 종으로 활약하게 하실 아하수에로 왕의 이야기를 발단으로 전개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은 이와 같이 직접적으로 행사되기까지 오만가지 엄청난 사실과 상황과 사물이 동시에 작동하고, 서로 교집합을 이루면서 우리가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8).” 하심과 같이 이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6-7).” 오늘 나의 이 확고한 의지나 믿음은 숱하게 말하고 또 떠올려야 할 아주 사고한 것들로 뒤섞이듯 뒤엉겨 어찌 망라할 수 없을 것 같으나 바로 이것으로 단 하나, '주의 이름'은 선명해진다.
그리하여,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
결국 오늘 위한 지나간 이야기였고, 오늘의 이야기는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이야기로 절정과 결말을 이루어갈 것이다. 하여,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시 100:1-2).
하는 시인의 노래에 아멘, 한다. 그리할 때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3).
하여 오늘을 살면서 과거를 묵상하고 미래를 되새기며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올린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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