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하현. 2025. 9. 22. 17:40

 

역졸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급히 나가매 그 조서가 도성 수산에도 반포되니 왕은 하만과 함께 앉아 마시되 수산 성은 어지럽더라

더 3:15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시 102:1-2

 

 

마음이 상하고 처지가 어려울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이다. 오늘 시편의 세계가 에스더의 당시 상황을 짐작하게 하고, 오늘 우리의 사정을 주께 아뢰게 한다. 나이가 들면서 아내도 이제 여기저기 아픈 데가 는다. 아내의 약 봉투에서 ‘59세’라는 것을 보면서 생소하였다. 우리가 스무 살에 만나 연애하고 결혼한 걸 생각하면 얼추 마흔 살을 같이 살아온 셈이다. 늘 나야 고혈압부터 해서 석 달 치씩 약봉지가 한 가득이라 그런가보다 했다가 오늘 식탁 위에 놓인 아내의 약봉지와 거기에 적힌 나이가 생경하였다. 이래서 시인은 아뢰어 고하기를,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시 102:11-12).

 

지난 주말에 딸애와 산책을 하고 커피를 한 잔 하면서 지금 사귀는 아이와 나름 결혼까지 놓고 진지하게 교제하는 소식을 들었다. 무엇보다 그의 가정이 믿는 가정으로 조부모와 부모에 거쳐 사귀는 아이까지 주를 믿는다는 것에 우선은 안도하였고, 다른 모든 조건은 중요하지 않았다. 막상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만나고 곧 서로 양가에 인사를 하기로 하면서 딸애는 다소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럴 수 있고 그런 마음으로 더욱 신중해지는 것에는 당연하였으나 그 또한 하나님께 맡기고 의뢰하기를, 그리 말하였다.

 

무슨 말 끝에 아빠는 나랑 같이 신부 입장 할 때 들어갈 수 있겠어? 하고 물었다. 아이 중학교 때부터 신대원을 하면서 공황이 왔으니까 모든 졸업과 입학식에도 가지 못한 처지라, 딸애가 조심스럽게 묻는 거였다. 그건 해야지…. 하고 답을 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생각만 해도 눈물부터 나는데 어쩌나, 하면서 둘 다 눈시울을 붉히며 웃었다. 시간은 속절없고 세월은 가차 없는 법이다. 문득 오늘 에스더를 묵상하다 그런 생각을 하였다.

 

유다 백성의 구원을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에 오른 과정을 앞장에서 진술했다. 이어 그 이유와 목적이 되는 이야기의 사건 전개가 본장을 채우고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유다를 위협하는 분위기가 긴장을 고조한다. 그 발단은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하들이 다 왕의 명령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2).” 저는 어째서 당대 권문세도의 하만 앞에 절하지 않은 것일까? 대궐 문에 있는 모르드개는 문지기로 하급 관리에 불과했다. 하만은 당대의 권력자로 ‘왕의 명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여야 했다.’ 이는 고급 관리에 대한 경의의 표시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보편적 관습이다.

 

그럼에도 별도의 ‘왕의 명령’이 있을 정도로 하만은 갑자기 높은 지위로 오른 고급 관리였다. 모르드개가 저에게 절하지 않고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은 우선하여 생각하면 하만이 신적인 경배 행위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것에 마음이 내키지 않을 것은 하만이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를 받았던 아말렉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만으로 하여금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는 적의를 품도록 하기 위한 의도로 모르드개가 일부러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페르시아 왕들은 자신들을 신적 조언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모르드개는 자신이 절하기를 거부하는 이유가 자신이 유일신 여호와를 섬기는 자이기 때문임을 암묵적으로 알게 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곧 그런 점에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밝혔다.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알렸더니 그들이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전하였더라(4).” 단지 모르드개가 높은 사람에게 절하는 일 자체를 기피하지는 않았다.

 

이는 상전을 공경하는 것은 그를 섬기는 마음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세우셨다는 데에 기인하는 하나님 존중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엡 6:5).” 이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이는 깊은 묵상을 필요로 한다.

 

세상에 권세 잡은 자라 하여 무조건적으로 숭상하듯 공경하라는 게 아니다. 곧 그 권세 잡은 자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그러한 권세를 부여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데서 기인한다. 하여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고후 10:8).”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이 땅의 권세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선 명심해야 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기란 말씀을 중심으로 바른 분별력이 필요하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에게 뿐 아니라 모든 높은 신분의 사람들에게까지 절을 함으로써 경의를 표하는 관습을 갖고 있다.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삼상 24:8).” 비록 저가 악하여 나를 해하려 하는 자라 해도 말이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하만이 왕의 후광을 힘고, 신적 경배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자신은 유일신 여호와를 섬기는 자임을 밝히고 일부러 더 보란 듯 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숨은 의도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알고 일부러 자신이 유대인인 것을 밝히면서 절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뿐 아니라 민족에도 위협이 될 수 있는 처사인 것도 모를 리 없다.

 

이 같이 다른 신하들의 반문에도 모르드개는 유난히 그러했고, 오히려 그의 유난스런 행동을 모두가 조롱하려는 의도에서 “그들이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전하였더라(4).” 즉 그는 포로 출신으로 무명의 인물로서 모르드개다. 그들과 같은 직위에 있으나 저들보다 못한 처지의 처지였다. 그런 사실로 그들 또한 시기하고 있었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모르드개가… 유다인임을 고하였”다. 이것은 자신이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신분이란 것을 일부러 드러내고 사수한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의 심리가 그렇듯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이 일을 하만에게 알렸다. 여호와만을 섬기는 유다인이기 때문에 ‘하만’에게 ‘신적 경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하는 모르드개의 변명이 저들로서는 더 불편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과연 하만에게 이런 사실이 받아들여질지 호기심이 생겼을 것 같다. 당연히 하만은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은 사실을 잘 몰랐다.

 

굳이 왕명을 거역해가면서까지 자신에게 절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다고 여겼다. 모르드개는 하위 관직이었고, 항상 대궐 문에서 일하는 정도의 신분이라 우습기도 했고, 그런 저의 행동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를 놓고 보면 모르드개가 절하지 않은 사실은 분명 ‘어떤 의도’를 숨긴 행동임을 짐작하게 한다. 당연히 그러한 모르드개에 대해 악의적으로 보고되고 하만은 이에 더 격노했을 것이다. 이렇듯 본문에서 하만의 등장은 유다 민족과 적대 세력으로 그 불화를 심화시킨다.

 

하만은 유대인 모르드개와 대립하는 이방인으로서가 아니라, 유다 민족을 위협하는 박해자로 보게 한다. 그로 인한 위기감은 의도된 것이다. 피할 수 없는 대학살의 위협이 드러나 있음과 동시에 복선으로 깔려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그대로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며,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이를 읽으면 전제하게 한다. 즉 하만의 등장과 유대인 박해의 원인이 된 모르드개의 갈등(1-6), 유대인을 박해할 하만의 본격적인 준비 과정(7-11), 그리고 실제 유대인 학살 명령이 칙령을 통해 반포된 것(12-15)을 알린다. 곧 이야기는 점점 더 긴장과 갈등을 고조시킨다.

 

주를 바라면서 늘 중심에 두고 살다보면 어떤 사람이나 무슨 상황, 어떤 일에 있어서 그 의중을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하고 놀라워하는 난감한 일일수록 하나님의 숨은 의도는 오히려 뚜렷하다. 남의 이야기에서나 내 이야기서나 동일하다. 가령 어떤 일에서는 당연히 될 줄 알았는데 안 되면 하나님이 숨겨놓으신 축복을 생각하게 한다. 혹은 의당 안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쉽게 풀리면 더욱 더 감사하게 된다. 그래서 지혜자도 그렇게 말한 것 같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13).” 하여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천하의 솔로몬도 일생을 살면서 이를 다 늙어서야 깨달았을까! 우리가 복이 많은 것은 굳이 다 살고 난 뒤에야 후회와 참회로 속절없는 시간에 한숨짓는 게 아니라, 이처럼 말씀으로 ‘예언’을 보고, 듣고, 앞서 대비하여 행할 수 있다.

 

사실 본문은 에스더와 모르드개 두 유대인의 신분 상승에 이어, 시간적으로 에스더가 왕후로 등극된 후 얼추 3, 4년의 세월이 지난 뒤이다. 그러는 동안 또 한 사람 더 왕의 총애를 받은 하만의 권력도 급부상하였던 것이다. 곧 저는 유다 민족을 제거하려는 세력을 뜻한다. 이를 묵상하면 신앙이 성장할 때 이를 꺾으려는 사탄의 획책도 같이 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마치 공식 같아서 신앙 안에서 바르게 살려하는 만큼 엉뚱한 공격성도 우리 주변에서 같이 배양되고 있는 것이다.

 

곁의 안 믿는 가족 때문에 일어나게 되는 일이든지, 혹은 누구처럼 부동산에 호재를 만나 이를 축복이라 여기면서 갭투자도 마다하지 않고 감당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정도까지 욕심을 부리다 호되게 당했다. 주식으로든 뭐든… 내가 아는 몇몇도 그렇게 물려(?) 속된 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신세로 후회가 깊다. 그런 우리 일상의 ‘하만’에 대해 경계하는 태도로서 오늘 모르드개의 당당함은 어떨까? 오히려 화를 당할 게 뻔하다 하여도, 즉 남들이 다 고리타분하다느니 심지어 누군 내게 ‘광신자’란 표현을 쓰기도 하던데….

 

하만은 엄연히 유다 민족과 적대적인 혈통의 아멜렉의 후손이었다.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함께 있는 모든 대신 위에 두니(1).” 여기서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이라 하고 먼저 소개하는 것이 그 단서다. ‘아각 사람’은 사무엘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말렉 왕 ‘아각의 후손’이다. “사무엘이 이르되 네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삼상 15:33).”

 

어쩌면 나의 소심한 대응이겠으나 누구의 연락을 받지 않거나 아예 차단을 하고 지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예전에는 둘도 없는 사람으로 내가 의지하고 존경하던 인물이었으나 하나님을 알고 사모하면서 그의 사상과 대화는 번번이 나를 너무 어렵게 하였다. 그렇다고 대놓고 뭐라 할 수 있는 친구 사이도 아니고, 저는 선생이면서 동시에 내가 존경하던 이라… 그런 저는 누구보다 내가 돌이켜 신대원을 하고 목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이런저런 이유로 엄청 만류했었다. 저의 설득은 모두 다 타당하여서 나로서는 반박할 수 없었다. 이렇듯 우리 곁에 일상의 ‘아각 사람’ 하만이 있다. 그게 더러는 사람이고, 돈이나 자신의 취미일 수도 있다. 참으로 거절하기 어려운 무엇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 족속들이 출애굽 직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한 것으로 인하여 그들을 영원한 진멸의 대상으로 삼으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출 17:14).” 이를 바울은 이렇게도 적용하여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사실 우리 곁에서 가장 떨치기 어려운 ‘아말렉’은 돈 같은 존재 아닌가? 그리하여 성경은 일관되게,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오늘 날 교회고 성도고,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게 돈이다. 하만은 ‘함므다다’로 ‘달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곧 저의 이름은 바벨론식 이름으로 ‘하만’은 엘람의 주신인 후만과 관련이 있다. 엘람은 오늘 날 이란의 서쪽 끝으로 일람 주와 남서쪽 끝으로 이라크 남부이다. 이렇게 ‘하만’은 여러 의미가 복합적으로 내포된 인물이면서, 동시에 상황이고, 사물이고, 심지어는 우리 안의 본심을 의미하기도 한다. 비록 본문에서 페르시아 사람이 아닌 아말렉 사람이지만, 페르시아 왕의 포용적 통치 정책에 따라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처럼, 교회 내의 실용적인 타협과 허용의 범주에도 속한다.

 

하만의 음모는 무자비하고(1-6), 복수심에 눈이 어둡고(7-11), 불공평한 상황이다(12-15). 이어져 학살 음모를 꾸미고 실행을 명령하여 반포한 후 기뻐하면서 마시고 즐기는 부류의 죄악성을 상징한다. 이처럼 악의와 불의가 가득하여 득세하는 것 같지만,

 

그들의 죄악을 그들에게로 되돌리시며

그들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끊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그들을 끊으시리로다

(시 94:23).

 

이에 우리가 고난당할 때,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102:1).

 

하고 주께 기도한다. 비록,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

(11).

 

그렇다 해도,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13).

 

오늘도 붙들고 서는 시선은 저 본향을 향한 것으로, 성경에서 믿음의 영웅들이 그러했듯이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함께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21-22).

 

그러므로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26-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