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지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니라 하니라
더 8:8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07:1
돌아보면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살았다. 다음 주에 딸애가 결혼할 사람을 데려와 인사시키겠다는데, 시집보낼 생각을 하면 자꾸 눈물이 난다. 나는 늘 말하지만 너무 못해준 게 많아서 그게 늘 마음을 찌른다. 오늘도 처조카 결혼식이라 내가 늙으신 장모와 가족들을 데리고 결혼식장에 가야 했다. 그러나 결국 택시를 불러 딸애가 날 대신하듯 거동이 불편한 아흔 살 장모를 건사하며 서울로 갔다. 택시를 태워 보내고 내심 우울한 마음으로 말씀 앞에 앉았다. 그런데 시편이 나를 울린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시 107:1, 15).
자꾸 딸애에게 못해준 것만 생각나면서 나름 그래도 젊을 때는 오만 군데를 다 데리고 다니면서 아이들한테 한다고 했다. 그러느라 나는 ‘남들처럼’ 또는 ‘남부럽지 않게’ 해주려고 한다면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을 가까이 했다. 기를 끄고 살았고 덕분에 내 곁의 사람들은 제법 그럴듯하여 같이 어울리면서 이런저런 은덕을 받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주의 부르심은 한사코 외면했고, 결국은 하나님의 강권하심이 나를 치심으로 나는 더 이상 내가 원하는 바, 내 갈 길로 띠 띠고 다니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는 주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신 것과 같이 되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주께 순종하고 목사가 되면 좀 나을 줄 알았는데 그 또한 마음 같이 되지 않았다. 신대원을 하면서 온 공황으로 딸애 중고등학교 입학식이며 졸업식에도 갈 수 없었고, 대학교 졸업식에도 못 갔다. 물론 아들애 필리핀에 혼자 보내고 한 번도 갈 수 없었고 졸업식 때도 손위처남이 나 대신 여행 삼아 갔을까, 그때도 혼자서 참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오늘도 결혼식 장 가기 전에 다음 주에 그 애 오면 울 것 같은데 어쩌냐? 하고 딸애에게 물었더니 딸애는 의당 그러려니 하는 것처럼 나도 아빠 얘기하다 울었으니까 괜찮아! 하고 흘겨 듣듯이 말했다. 목사가 되고 늘 곁에 붙이시는 이들이 다들 영적으로 상한 심령들이라, 나 역시 허덕거리는 주제에 저들의 사연과 그 처지를 듣다가 내가 운다. 그런 게 하는 일이라, 어쩔 땐 내가 더 입을 삐쭉거리며 울먹거리다가 힘들다. 그러니 나로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31, 43).
돌아보면 나의 생이 참 길고도 험난했다. 다들 눈 깜짝할 사이라지만 나는 늘 너무 길고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기억이 닿는 아주 어릴 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생은 늘 고달프고 난감하였으나, 주가 키우시고 돌봐주신 아이들의 오늘은 감개무량하다. 내가 한 게 없어 더 그렇다. 한 번도 업어주지 못했고, 늘 잘한다고 한 것이 공연히 아이들에게 화풀이나 하듯 짜증을 부렸던 기억만 난다. 특히 딸애가 이런 나를 늘 위로 하였고 곁에서 다 받아주었다.
오늘 본문에서 모르드개의 감격스러움과 에스더의 애끓는 심정이 이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중첩되어 괜한 소리부터 하게 되었다. 오늘 결국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으로 유대인들과 모르드개의 지위가 반전(反轉)되는 것을 본다. “모르드개가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 왕 앞에서 나오니 수산 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고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15-16).”
즉, 앞장에서 하만이 에스더의 활약으로 처형당하고, 오늘은 에스더가 동족을 적대시하는 세력으로부터 유다를 구원하기 위해 왕에게 그 권한을 받아내는 기사를 본다. “조서에는 왕이 여러 고을에 있는 유다인에게 허락하여 그들이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지방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치려하는 자들과 그들의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되(11).”
곧 에스더가 왕에게 유대인의 구원을 간청하는 장면이 앞선다(1-6). 왕의 명의로 내려진 조서는 변개할 수 없어서(7-14), 이를 기적적으로 되돌림으로 유대인들의 기쁨이 드러난다(15-17). 결국 앞서 하만은 죽었지만 유대인 학살 명령은 유효했었다. “아하수에로 왕 제십이년 첫째 달 곧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열두째 달 곧 아달월을 얻은지라(3:7).” 이처럼 여전히 유효하였던 명령을 중지하고 되돌릴 있는 것도 결국 왕뿐이었다.
하여 “이르되 왕이 만일 즐거워하시며 내가 왕의 목전에 은혜를 입었고 또 왕이 이 일을 좋게 여기시며 나를 좋게 보실진대 조서를 내리사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이 왕의 각 지방에 있는 유다인을 진멸하려고 꾀하고 쓴 조서를 철회하소서(8:5).” 그렇게 이 일을 직시한 에스더가 왕으로 하여금 유대인을 위한 새로운 조서를 내리도록 했다는 사실은 기적 같은 일이다. 당시 페르시아의 상황에서는 유대인을 진멸하라는 하만의 조서가 제국 전체에 반포되어 그에 대해 많은 무리들이 기뻐 날뛰고 있었다. 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어떤 피해를 입은 자들이 아니었다. 다만 유대인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멸하고 싫어했다. 곧 저들의 유일신 사상을 두고볼 수 없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를 배격하고, 무언가 구별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인데, 이것에 혐오감을 갖고 있는 자들로서는 그러한 유대민족을 전멸시킬 수 있다면 통쾌할 거였다. 이는 곧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멸이었다. 아달 월 1일, “이에 그 조서를 역졸에게 맡겨 왕의 각 지방에 보내니 열두째 달 곧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 하였고(3:13).” 그 하루 동안 주어진 합법적인 기회를 이용하여 그동안 자신들에게 눈엣가시와 같던 유대인들을 몰살시킬 만반의 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유대인을 학살하려던 자들에게 하만의 죽음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의 죽음과 관계없이 유대인을 학살하라는 왕의 명령은 여전히 유효하였다. 그들은 하만의 조서에 왕의 도장까지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달 십삼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어 하만의 명령을 따라 왕의 대신과 각 지방의 관리와 각 민족의 관원에게 아하수에로 왕의 이름으로 조서를 쓰되 곧 각 지방의 문자와 각 민족의 언어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치니라(3:12).”
그러니 누구도 이를 취소할 수 없었다.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실진대 와스디가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되 바사와 메대의 법률에 기록하여 변개함이 없게 하고 그 왕후의 자리를 그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1:19).” 그런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도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지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니라 하니라(8:8).” 같은 명령이나 그 내용은 바뀌었고 이 또한 왕의 명령이었다. 유대인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이러한 계략을 허무시는데 유대인의 위기를 모르는 체 하지 않으셨다.
결국 하나님께서 여종 에스더를 움직이셨고, 당신의 백성들을 학살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의 이러한 섭리는 이방인들의 창칼에 무참히 학살당할 유대인들을 구원하셨다. 즉 이 일을 위해 오늘의 에스더를 왕후로 삼으셨고, 앞서 모르드개의 애통함을 위로하셨다. 결국 하나님은 이방 중에서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높이 드러나게 하신다.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사 25:9)” 하여,
악인들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가 되어 없어지리로다
(시 37:20).
곧 이런 사실은 오늘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서도 나타난다. 누구보다 나는 이를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고, 돌아보면 나의 생은 전체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는 데 증거가 된다. 내가 비록 예전처럼 내 마음대로 다닐 수 없고 어떤 일에서는 공연히 위축 되고, 주눅 들어 내 앞가림도 못하며 사는 것 같지만… 그래서 내 곁에 그러한 사람들(?)이 붙는다는 것을 안다. 보니까 대체로 내가 환자인 것과 죄인인 것을 인정하면서 내 곁에 그와 같은 이들이 수두룩하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거식증으로 병원에까지 입원했던 아이와 그 일로 찾아와 울다 갔던 아이엄마나 더 심각하게 자해를 하여 온통 팔뚝이 낭자하던 아이와 그 애 엄마의 경우도 내가 환자라는 데서 속을 열었다.
현재 조현증으로 힘들어하는 아이와 또 동일하게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아이엄마도 혹은 모녀가 둘 다 조현병으로 약을 복용하는 아무개의 가정처럼… 저들의 사정을 글로 옮길 수 없지만 그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같이 울다 가만히 주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뿐이다. 그런 거 보니 개인적으로 기록하여 둔 내용에서 대부분이 우울과 조울과 불안과 강박과 망상 등으로 가족이 붕괴되고 개인의 삶이 피폐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개의 큰 형님은 은둔형이 되어 폭식으로 체중은 가히 공포스러운데 하루 종일 게임만 한다. 아이는 이제 중학생으로 지적장애에 조울증이 진단되었다.
오늘 이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이처럼 세상의 횡포에 고통당하고 신음하는 것을 하나님은 가만히 지켜만 보고 계시지 않는다. 나로서는 저가 믿는 이든지, 안 믿는 이든지 보내심으로 같이 상담을 하고 주를 전하는데, 저들의 공통점은 ‘동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어쩌다 어떤 계기로 여기까지 왔다가도 금세 싫증내고 돌아가고 끊는다. 억지로 할 수 없다. 그러면서 뭐라 이르면 자신들은 괜찮다고 한다. 스스로 잘 살고 있는 줄 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 간청하였던 에스더와 같이 나는 주 앞에 구한다. 최소한 이런저런 소개로나 이유로 만나게 됐고, 여기까지 보내시면 뭔가 성과를 내게 해주십사하고… 그런데 열에 아홉은 오래 가지 않는다. 끝이 좋지 않게 나를 욕하면서 떠나기도 한다. 당연히 돈벌이로 하는 게 아니니까, 어찌 내가 강제할 수 있는 일도 아니어서… 나는 저이들이 오든지 가든지 주가 보내시면 보내시는 대로 가게 하시면 가는대로… 대체 뭘 하는 사람인가? 하는 자괴감으로 혼자 시름하다 또 누구를 만난다.
그런 가운데 결국 ‘하만이 모르드개를 달고자 했던 나무’에 대해 묵상하면서 내가 저들을 위해 무얼 하는 게 아니라, 저들이 나를 위해 오고 가는구나, 하는 확신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번에 딸애에게도 말했다. 널 죽어도 시집을 못 보내겠다. 그러니 그 애더러 아들로 오든가, 아니면 말든가 하라고 해라! 하고 다음 주 금요일에 확답을 듣기로 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나를 사용하신다면 나 역시 하나님의 일에서 그 필요와 사명을 다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러느라 나는 전도하여 성도를 불리는 일도, 누가 와 상담을 하든지 글쓰기로 하든지 어떤 성과에 대해 일체 나의 책임을 두고 더는 운운하지 않는다.
‘나 같은 것’을 사용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나로 환자로 살든지 빙충이로 굴게 하시든지, 그것으로 주의 영광이 드러날 것을 믿는다. 이를 에스더는 알게 되었고, 그러므로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4:15-16).”
이를 사도 바울 식으로 표현하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러니 나의 오늘도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으로 한 날이 그저 그렇다 해도 '사나 죽으나' 그것으로 족하여서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그리하여 다만 오늘도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4:2).”
이에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 1:6).” 그러시다면 까짓, 주가 책임지시리니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7).” 그러하여서 나는 살아서 사는 동안에 나의 날들을 돌아보면 모두가 주의 인자하심은 분명하였다. 하여,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셀라)
(시 81:7).
이를 나보다 더 생생하게 경험하며 살았던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러니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하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그러므로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07:1).
이 짧은 시편에서 우리 하나님의 모든 역사하심이 담겼다.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5-7).
그렇게,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8).
나의 날들이야, 두 손을 든다. 그리고 주를 찬송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15-16).
그렇게 오늘도 그러하여서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4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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