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하현. 2025. 9. 28. 17:28

 

정한 기간에 이 부림일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는 유다인 모르드개와 왕후 에스더가 명령한 바와 유다인이 금식하며 부르짖은 것으로 말미암아 자기와 자기 자손을 위하여 정한 바가 있음이더라

더 9:31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시 108:1

 

 

안 믿는 가정에서 혼자 신앙을 지켜 믿음으로 사는 일이란 쉽지 않다. 곧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가야 한다는 이유로 아이가 주일예배를 같이 드리지 못하고, 안 믿는 가정에서 일요일이 한가한 날이라 외식을 하거나 어디 나들이를 하기에 좋기는 하다. 그러니 온 가족이 그러한데 스스로 안 된다, 하기는 어려운 일이라… 나는 그저 속상할 뿐 달리 뭐라 이르거나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가정이 믿는 가정이라 주일에 교회에 오고 같이 예배를 드리는 일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일찍이 나의 부친이 선조들의 길에서 벗어나 교회를 다니고 믿음으로 세워짐으로 오늘의 우리 가정은 복이 많다. 이를 위해 부친이 당하였던 학창시절의 박해와 젊은 날의 고난은 가히 희생적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시편의 고백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시 108:13).

 

이를 누구에게 선뜻 강조하기가 민망한 것은 나 역시 믿는 가정에서의 은택으로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가능하였던 것이라… 이를 망각하였을 때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과 같이 포로로 끌려와 이 같은 수모를 당하다 주의 도우심으로 그 신앙을 회복하였던 게 아닌가? 그러니 복을 복으로 여기지 못하는 것보다 안타까운 일도 없겠다.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의 포로로 잡혀가서 경험한 사실은 ‘부림일’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섭리를 새삼 경험하게 되는 내용이다. 본문은 전반부(1-4장)에서 위기에 처한 유대인들의 모습을 그리며 힘없이 비참하게 당하였던 것과 이어서 후반부(5-10장)에서는 이스라엘을 대적하였던 하만과 유대 백성의 구원자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펼치는 활약이 드라마처럼 전개되었다.

 

특히 하만을 물리친 모르드개(5:1-8:2)를 중심으로 모르드개가 승리하게 된 배경(5:1-6:3)과 그에 따른 명예를 얻은 모르드개(6:4-14)와 하만의 죽음(7:1-10)이 대조된다. 곧 시편의 찬송처럼 다루어져,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하는 것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계속해서 아하수에로 왕을 향한 에스더의 탄원(8:3-6)과 아하수에로 왕의 조서(8:7-14)로 많은 이방인들의 개종(8:15-17)이 이루어지면서 승리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내용이 이어지는 본장은 유대인들의 승리와 축제를 묘사한 대목으로 본문의 절정에 해당하여 이 날을 하여 부림절이라 지킨다. 그만큼 모르드개의 명성이 확산되었고(9:1-4), 대적들을 처형함으로 완전히 쟁취한 이스라엘의 승리를 언급하면서(5-16),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절기 곧 부림절이 제정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17-32). 이러한 내용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해 대적들을 물리침으로 승리의 기쁨과 평화를 드러낸다. 그리고 더불어 이를 기념하여 부림절의 절기가 재정되었다.

 

본문은 8장 사이에 적어도 몇 개월의 시간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하만의 음모에 왕의 조서가 내려지자마자(3:13) 모르드개가 그에 대해서 방어적 노력을 시작하였고(4장), 그 성과를 얻은 것은 극적인 여러 사건 이후(8장), 하만의 일당이 제비를 뽑고(3:7) 그에 따라 조서를 내린 정월 13일(3:12)에서 얼마 경과하지 않아서이다. 이를 감안하면 최소한 9개월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해하려는 원수들을 어떻게 무찌를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지 않은 상태였을 것이다. 결국 원수들과의 전투를 거치듯 저들을 처단하여야 했고, 그것이 자신들과 자손들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길임을 판단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으로, 격전의 12월 13일(8:12)을 묵묵히 기다려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공포에 떨고 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위권이 자신들에게 허락되자 마치 승리라도 얻은 것처럼 먼저 기뻐했었다. “왕의 어명이 이르는 각 지방, 각 읍에서 유다인들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을 명절로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17).” 이유는 원수들과 접전을 치르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저들은 앞서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과 경과를 통해 유대인은 승리를 얻었다. 원수들의 처음 계획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일방적으로 그들에 의해 학살당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간발의 차이로 원수들의 그 같은 계획이 성사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실 언약적 의무를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조상들과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왕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옵소서(느 9:31-32).”

 

곧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결코 원수의 손에 붙여 멸망하게 두지 않으신다. 이는 오늘 우리 믿는 자들의 삶에서도 같다. 최소한 나는 이제 확실히 인정한다. 당시 세상과 어울리고 저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어떻게든 성공하고 싶었다. 세상으로 위로를 얻고 싶었다. 신기하게도 또 그렇게 내 곁의 ‘좋은 사람들’ 역시도 하나님이 선별하여 그리 곁에 두셨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즉 어릴 적 가난에서부터 어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희한한 경험들 모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의 일이다.

 

가령 내가 처음으로 예민하고 가장 어려웠던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시절, 처음 서울로 전학을 갔을 때 나는 지진아였다. 학교에서는 특수학교로 보내려 했지만 나의 모친은 그럴 수 없다면서 학교에 나를 두고 그냥 갔다. 6학년에 올라가면서는 장애아동 하나가 큰 사고가 났고, 하여 모든 장애아동은 1층의 학급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학교의 고학년들은 3, 4층에 있었고 남녀반이 갈려서 수업을 했었다. 마침 6학년 15반이 1층에 한 학급 있었는데 여자 반이었다. 학기가 시작되고 난 뒤라 새로 남녀 반편성을 할 수 없는 학교로서는 나를 포함하여 4명의 남자아이를 53명의 여자 반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결국 그러던 시절에 교회 형이 자살을 했고, 여자 애 53명에 남자 4명의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수치심을 감수해야 했다. 한 아이는 휠체어를 태우고 왔는데 오전에는 모친이 방과후에는 우리들이 저를 데려다주어야 했다. 문제는 쉬는 시간 화장실에 가는 게 문제였는데 그 애는 원기소통에 소변을 보면 우리들 셋이 가려주고, 버려주어야 했다. 하루는 그 통이 넘쳐서 한바탕 또 난리가 나기도 했다. 나는 늘 우울하였고, 이는 역설적으로 철딱서니 없는 고집불통의 아이가 되게 했다. 그러나 가까운 형의 자살이 당시 어린 나의 위로였을까?

 

하필 졸업식 날이 수술날짜로 잡혀, 여수 애양원에서 3개월 넘는 병원신세와 또 그만큼의 병원 밖 기숙생활이 이어졌다. 당시로도 너무 먼 거리라 집에 와 있기도 어려워서 그랬겠지만 그러므로 나의 그 시절 반 년 남짓한 여수 애양원 나혼자촌에서의 생활은 돌아보면 기적 같은 날이었다. 그때 만난 소경 장로님과의 친밀하였던 시간도 축복이었다. 그렇게 한 해를 휴학하고 퇴원하고 돌아왔을 때 뜻하지 않은 이사가 또 하필 나환자촌에 있는 교회로… 하나님은 앞서 나의 시간에서 저들 한센병에 대한 거부감이나 생활을 경험하는 데 충분한 시간으로 앞세우셨다.

 

그리고 만난 교회 누나(실은 동갑 친구)와의 편지쓰기는 지진아였던 내게 글쓰기와 책읽기를 만나게 했다. 또 그 애는 공부도 잘하는 편이어서 우리가 만날 때면 서로 의정부 도서관 같은 데에서, 싫든 좋든 나는 저와 같이 공부를 해야 했다. 그렇게 또 3년 남짓한 첫 정의 연애기간이 나로 하여금 지진아에서 부진아로, 부진아에서 일반적인 문학 소년으로 만들었다. 하루 두 통씩 단 시간에 늘 편지쓰기를 했고, 그 애를 따라 읽었던 책이나 헌책방에서의 시간보내기는 나로 독서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의 만남과 사람들과 그때의 감정과 사랑과 연애는 오늘에 이르러 모든 게 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디딤판이었다.

 

세상이 아무리 노엽게 한다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를 일거수일투족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나를 대적하게 하였던 고질적인 우울감이나 불안은 오히려 주를 더 갈망하게 하여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2-13).”

 

고로 오늘은 사는 데 있어 이런저런 일련의 사건과 상황이 결코 이 땅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우리로 대적해야 할 대상이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그러므로 날마다 더하게 되는 것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하여 요즘은 부쩍 지난날을 돌아볼 때 은혜 아닌 게 단 하나도 없었다는 데서 나의 인생이 참으로 희한하고 놀랍고 신기하고 기묘하다. 중간 중간 씻을 수 없을 것 같은 죄악으로 마음이 짓눌리며 어려워질 때도 그리하여 주의 긍휼하심 앞에 더욱 더 엎드리게 되는데,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시 129:5).

 

곧 내가 늘 노여움으로 여기며 서러워했던 것을 주 앞에서 찬송이 되게 하셨으니 “나를 박해하는 자로 치욕을 당하게 하시고 나로 치욕을 당하게 마옵소서 그들은 놀라게 하시고 나는 놀라게 하지 마시옵소서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렘 17:18).” 그 대상은 늘 내 안에 있었고 내가 나를 괴롭히기 일쑤였는데,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8).” 곧 나로 내가 하나님께로 난 자였음을, 그리하여 그 숱한 이상한 일들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송하게 하는 것이어서,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0).

 

그렇게 승리하는 자의 것으로 순종을 배우게 하시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밟는 모든 땅 사람들에게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신 11:25).” 하신 주의 약속의 말씀을 이루려하심이었다. 곧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하여 “이는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3-34).” 하심을 주가 다 이루시었다.

 

결국 우릴 대적할 그 무엇도 없다. 우리 안의 악한 상대들로도 굴복하게 하신다. 그러기까지 더러는 꽤 긴 시간을 씨름하게 하시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그러므로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 31:6).” 하심을 이루신다.

 

오늘 본문의 이 유다의 승리는 모르드개 개인의 명성을 높이거나 에스더의 영화만을 위한 게 아니다. 곧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로 확정되어 대적자들을 치리하시는 하나님의 승리를 알게 하신다. 이에 유대인의 승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고, 여호와께서 의인으로 부르신 이에 대한 하나님의 확답이다. 노아는 그렇게 당대의 의인이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였어도,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나는 이를 실감하는 것이다.

 

하여,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시 44:5).

 

이에,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시 108:1).

 

하는 오늘 시인의 고백이 내 것이다. 남은 모든 사는 날 동안 내 것이어서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그러할 때에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58:14).” 하심을 주가 이루신다. 그렇게 하여서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그러므로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108:4-5).

 

이와 같은 찬송이 내 것이 되어서,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12-13).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0) 2025.09.30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0) 2025.09.29
여호와께 감사하라  (0) 2025.09.27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0) 2025.09.26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0) 2025.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