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하현. 2025. 9. 30. 17:30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 1:5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0:3

 

 

욥기서는 첫 장부터 숨차다. 이를 어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요즘 며칠 순응(順應)을 생각하여 한자어를 풀어보는데 이게 참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에서도 인정하고, 주의 선하심을 살피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러는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듣고, 보고, 배운 바 말씀을 따라 순종(順從)하는 것으로 ‘한 걸음씩 척(彳)척 따라 걷는 일이었다. 욥기서를 묵상할 때면 이를 실감한다.

 

먼저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절대 순종이 요구된다. 욥기는 사람으로서는 예기치 못한 채 상황을 맞닥뜨리고, 당하는 그 고난의 원인을 떠나 주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20-22).”

 

먼저 저는 그런 슬픔 속에서 ‘예배 했다.’ 그 심정을 암시하듯 ‘땅에 엎드려 예배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는 우선 인생의 덧없음을 인정한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그런 다음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한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이 모든 것,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모든 게 여호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함으로,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저는 순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곧 우리로서는 극단적으로 누구든지 그 대상을 향해 원망했을 것인데 말이다.

 

이어지게 된 욥과 그의 세 친구들의 지리한 논쟁은 마땅히 ‘그럴 수 있는’ 우리의 반론을 제기한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 및 엘리후와의 논쟁은 충분히 갈등하고 서로 주장할 수 있는 인간의 입장들이다. 이러한 논쟁 가운데 의인의 형통과 악인의 고난이 이 세상에서 완성된다는 우리의 ‘현세적 인과응보’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반대로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형통이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욥의 인식 또한 정리되면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관’을 정립하게 한다.

 

이러한 논쟁은 결국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게 하고, 우리 인간의 절대 순종이 의가 된다는 궁극적인 귀결로 정리된다. 즉 사단으로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있는 현세에서 유한한 우리의 지혜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측면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 궁극적인 절대 의와 절대 선은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께 절대 순종하는 삶으로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또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감찰은 강한 인정하심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8).” 곧 하나님은 하늘에서 모든 인생을 감찰하신다. 이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증거한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시 11:4, 33:13-14).

 

이에,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5:3).”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를 명확하게 제시하여 준다. 우리의 경건한 삶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인생의 책무이기도 하다. 그러한 가운데 의인의 고난은 원인이 분명하지 않고, 사탄의 참소는 터무니없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선하여 우리의 순전한 믿음을 보시고, 이로써 영광을 받으신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허락하신 결과라는 사탄의 참소는 언뜻 그럴듯하다가도 이러한 기복적인 신앙이 의외로 우리 믿음을 좌지우지한다는 데서 어쩔 수 없는 나의 한계도 느낀다.

 

악인이 세상에서 잘 되고 복 받는 것을 부러워하다 미끄러질 뻔하였다는 시인의 고백은 상대적으로 의인이 형통하고 복을 받아야 한다는 당위적인 논리에 빠지게 한다. 그러다 저는 성전에서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73:2-3, 16-17).

 

요는 욥에 대한 시험이 사탄을 정죄하고 성도들의 의를 주의 영광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그렇게 사탄은 늘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하는 자이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 12:10).” 하여 저를 정죄하고자 하심인데,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슥 3:2-3).”

 

결국 하나님은 사탄의 참소에 대하여 모든 것을 감안하시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성도의 ‘아름다운 옷’을 위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4).” 이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세마포를 입는 우리 성도의 영광을 위하여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8).”

 

여기서 우리의 옳은 행실이라 하심은, 욥과 같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연단하시는 것으로 우리는 때로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는 듯 하나,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목격하고 인정하게 된다. 이를 두고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는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 5:8-10).”

 

‘어찌 내게 이런 일이…’, 하고 억울하던 것들이 변하여 감사와 영광의 ‘예배’가 되게 한다. 요즘은 부쩍 그러해서 주의 은혜로 오늘까지 함께 하심을 인정하다 울컥, 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고는 한다. 오늘 늙으신 장모와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지난날을 떠올리며 그때 일을 계속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또 하고’ 하듯 하지 마시고, 주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그 온통 우상단지 속에서 건져내시고 오늘 이렇게 주의 이름을 나의 주님으로 부를 수 있음에 감사하시라 말하다가 내가 또 울컥, 하였다. 곧 우리의 고난의 원인이 단순한 죄의 결과나 징계로만이 아니라, 더 큰 은혜를 위한, 고난 앞에서 하나님께 가져야 할 신앙을 회복시키고 하심을 묵상하게 된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그 놀라우신 섭리를 바로 알지 못한다 해도, 오늘 이 현실은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서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할 때 순응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대한 작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모든 일은 선하시다는 것. 우리로 여기서 조건 없는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순전한 믿음이 되게 하신다는 것.

 

욥기서는 이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즉 우리의 ‘조건 없는 신앙’만이 진실한 신앙으로 <순전한 기독교>의 참 의와 진리를 깨닫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 사탄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저는 곧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본다. 즉 저는 단지 그 쓰임의 때를 다할 뿐이고, 이 일이 끝나면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 20:14).” 그뿐인가?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15).” 그러므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저로서는 현세에 아무리 기세등등하여 모든 것을 다스리는 듯하나, 분명 하나님의 주권적 통제에 있음을 우리는 확인한다.

 

또한 욥의 신앙에서도 결국은 우리 모두 누구라도 ‘자기의 의로움’과 ‘고난의 부당성’을 안고 산다는 것이다. 이를 전도자의 표현대로 바꾼다면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고로 오늘 우리는 새삼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데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곧 주를 경외함이란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 이는 우리의 경험과 지혜로 알 수 없는 것임을 앞으로 전개된 욥의 세 친구들과의 논쟁으로 느낄 수 있다. 곧 우린 그 누구라도 자신의 지혜를 절대화하는 것으로 어리석음을 자처할 뿐이다. 고작 생각하여 도달하는 결론이 인과응보로 ‘하나님은 의인에게 상을 베풀고, 악인에게 벌을 내리신다’는 아주 단순하고 원론적인 결말로 끝이 난다.

 

가령 찬송가를 지은 작사가들의 사연과 그들의 생애를 찾아 읽다보면,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이런 찬송의 표현이 가능하였을까? 하면서 불가항력적인 인상을 거둘 수 없다. 이는 우리의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40).” 그렇게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36-37).”

 

하여 바울도 우리가 더러는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 하는 이 놀랍고도 역설적인 은혜의 사람들이 곧 우리들인 것을 일깨운다. 하여 오늘도 사탄은 우리를 참소하여 고난을 당하게 하나,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이 원리는 생각보다 간단한 이치여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곧 오늘 우리 형제들의 목회가 나름 주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는 가난과 질병으로였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의지하여 간절하고 절실하게 주를 바람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 8:13).”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때 아버지가 5층 건물로 교회를 짓고 부흥하여 소위 승승장구하듯 목회하였으면 오늘의 경건한 삶이 가능했을까? 나는 돌이켜 주 앞에 두 손 들었을까? 이는 상대적인 논리로 하는 말이 아니다.

 

더 오래전 사업체가 물에 잠기고 모든 걸 다 하나님이 거둬내지 않으셨다면 과연 나의 부친은 사업하는 평신도 수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다분히 기복적이면서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교회 집사로야 살았을지 모르겠으나… 나 역시 하나님이 오늘의 처지로나 돌이켜 나를 강권하심으로 붙드실 때와 같이 꼼짝 마라, 하고 붙들고 계시지 않으면 이처럼 목사가 됐을 리도 없고 말씀 앞에서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을 테고…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하는 이 말씀이 나의 고백이 되어 감사하다.

 

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이 놀라운 원리를 욥기는 알게 한다. 오늘 욥의 이 비극적인 아니 무자비하고 참혹한 현실에서,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1-24).” 하심이 선명하고 강렬하게 비춰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시 110:1).

 

주가 다스리신다. 하여,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3).

 

하는 것과 같이,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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