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하현. 2025. 10. 1. 17:0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욥 2:10

 

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시 111:4

 

 

무덤덤하게 읽을 수 없는 내용이다. 자식들이 한 날 한 시에 죽고, 모든 재물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심지어는 극심한 질병까지 찾아와서 그의 아내가 이르길,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9).” 하는 이 심정이 이해가 간다. 욥의 자식들이 곧 아내의 자식들이었고, 같이 누리던 것을 일순간에 잃은 것이야 같을 테니 거기다 남편 욥이 질병에 못 이겨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8).” 이와 같이 처참한 상황에서, 그럴만하다.

 

둘은 같이 여호와를 경외하여 때마다 자식들 이름대로 제사를 드리며 주의 은혜와 은총을 바랐을 텐데, 오죽하니 아내의 심정으로는 그러하지 않겠나?

 

본문은 욥의 이야기에서 발단으로 이야기 전개의 핵심 소재가 되는 동방의 의인 욥의 고난으로, 천상에서 이루어진 하나님과 사탄의 회의에 따른 일이다. 앞서 1장에서는 욥에 대한 소개와 하나님과 사탄에 의한 ‘욥의 고난의 목적’을 다루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결국은 욥의 생명을 뺀 건강까지도 사탄에 의해 주도하게 하신다. 여기서 두 번 다 증인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등장한다. 하나님이 욥의 행적에 대해 묻자 사탄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땅을 두루 다니다 왔다고 대답한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2).”

 

하나님은 그러한 사탄에게 재차 당신의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는가? 하고 물으신다. 곧 욥의 순전함과 경건함에 대하여 사탄이 하나님께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있다. 먼저 하나님은 욥을 인정하셨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3).” 그러나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4).” 하며 고난 가운데 가장 실질적으로 고통스러운 게 몸의 통증이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하고 사탄은 반문하듯 재차 참소하였다(5).

 

사탄은 욥에 대한 이러한 하나님의 인정하심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더욱 강력한 시련, 곧 몸의 극단적인 고통으로 욥을 시험하실 것을 요구하였다. 즉 사단은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 생명을 바꾸올지라’ 하고 직접적인 육체적 시련을 가할 것을 요구하고, 그러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욕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 우린 자기 육신의 실질적인 고통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마음이 어렵고 가슴이 아픈 것도 슬픈 일이지만 이는 실질적이지 못하다.

 

결국 그렇게 다시 하나님은 사탄의 제안을 수용하신다. 사탄에게 욥의 육체를 칠 수 있도록 허용하셨다. 물론 이는 하나님께서 사탄의 주장을 인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이를 통해 욥의 순전한 신앙을 보이시려 하심이고, 한층 더 그의 신앙을 성숙시키시기 위한 것이다. 늘 육체의 어디가 아픈 사람이라, 나도 실제 이 고통이 가장 무섭다. 종종 안락사를 소재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나 역시 그러한 극단적인 고통이 찾아오면 과연 저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기도 한다. 그때마다 마음에 되새기는 말씀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여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하실 것을 굳게 붙든다. 왜냐하면 나로서도 특히 육체의 고통 앞에서 잘 참고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섣불리 순교를 운운할 때는 순간 내가 더 두려움을 느낀다. 그것은 결코 우리의 의지로 참고 견디는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단에게 욥의 육체는 허용하시되 생명 자체는 해하지 못하게 하셨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울먹, 한다. 가령 내가 늘 바라는 소원 중에 하나는 행여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 때 부디 한순간에 데려가주시기를 나는 바라기 때문이다. 고통은 너무 싫다. 그 자체로 두려움이다.

 

그런 가운데 인간의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오늘 본문은 알게 한다. 사탄이 자신의 파상적인 공격에도 굴복하지 않은 욥을 하나님께 다시 참소할 때 하나님은 그의 생명만큼은 사탄의 손에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는 사탄의 사악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순전함으로 그의 정직과 경외함을 인정하셨다. 그러므로 끝내 의인에게 돌려서는 안 되는 고난까지도 사탄에게 허용하셨고, 이로서 욥의 신앙은 물론 그의 아내와 친구들의 신앙도 점검하게 하셨다.

 

이로써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 1:19).” 하는 바울 사도의 증거와 같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은 순응이다. 더러는 따를 수 없고, 내 뜻과 다른 것으로 심지어는 고통으로 가해진다 해도, 그리 두심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인 것을 인정하기까지….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우리 스스로가 아무리 생각해도 의롭고, 이 정도는 괜찮다고 여기는 선이라 해도 그 모든 것으로는 악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5:6-7).”

 

사탄은 그렇게 오늘도 세상을 두루 다닌다. 오늘도 우리 곁을 배회한다. 그러다 순간 틈을 노린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 하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은 의도적이시다. 우리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말씀으로 항시 우리 곁에 사탄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닌다는 사실을 알리신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하여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신 25:18).” 하는 실제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사자가 자기의 굴에 엎드림 같이

그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당겨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시 10:9).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교훈처럼 먼저는 ‘근신하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근신(勤愼)이란, 말이나 행동을 삼가 조심하는 일이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이를 살펴 일정 부분 떨어져 있는 것을 말한다. 분리다. 단절을 의미한다. 고등학교 때 가출을 하고 돌아와 학교에 갔을 때 근신처분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일주일 동안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고 종일 혼자 반성문을 쓰게 하였다. 그때 경험으로 미뤄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다소 의도적으로 스스로 세상과 단절할 필요를 느낀다. 저들의 문화나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회에서 일정 거리 떨어져 있는 게 필요하다.

 

이런 시선으로 성경의 여러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했음을 짐작한다. 세상에서도 결코 저들처럼 어울려 즐기지 않았다. 요즘은 너무 무분별하게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시쳇말로 ‘K-문화’라 하여 온통 우상과 귀신을 소재로 하는 노래나 영화나 각종 예술분야를 높이 사고 덩달아 귀히 여긴다. 이번 정부에서 외치는 실용주의니 국민주권이니 하는 것이 그 배면에 얼마나 비기독교적이고, 비성경적인 주장들이 들어 있는지 분별해야 한다. 가령 성소수자의 인권을 운운하며 법적으로 허용하려는 것에서부터, 낙태나 안락사에 이르기까지 현대사회는 점점 더 ‘생명’ 곧 하나님의 영역을 스스로의 선택으로 끌어내리려 한다.

 

그래서도 근신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한다.’ 정작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대상은 안 믿는 자도 타종교인도 아니다. 사탄도 마찬가지로 저들은 각기 제 길을 갈 뿐이다. 문제는 외식하는 자들로 믿는다고 하면서 그 신앙에 이것저것 섞어서 정작 ‘사람에게 보이려는 신앙’의 소유자들이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마 22:18).” 하시며 저들 스스로 옳다 여기는 것에 대하여,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눅 13:15).” 하시며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에 대해 정죄하는 자들을 나무라셨다.

 

오히려 순전함으로 믿는 이방 백부장의 신앙을 칭찬하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그래서 이르시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스스로 믿는다고 믿는 믿음이 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오늘 욥이 보여주는 이와 같은 믿음은 궁극적으로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 2:10).” 그리하여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그렇다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는 내가 수고하여 노력하여, 인내하고 견디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곧 주가 내 안에 두지 않으시면 안 되는 것으로, 앞서 요셉도, 다니엘도, 모르드개도 모두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믿음으로’ 한결같았고 무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하면,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내가 어찌 해보려는 착안과 나름의 구상을 놓고 주께 맡겨야 한다. 주 앞에 내려놓을 때 주가 이루실 것을 믿는 것이다. 주일을 어길 수밖에 없는 아이의 형편과 사정을 두고 그리 자신을 허용하면서는 사탄이 그 자릴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자꾸 일요일이면 무슨 일이 생긴다. 한 번 허용된 것에는 두 번 세 번 연거푸 그와 유사한 일이 파생하여 거듭 요구하게 돼 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 하지 않으면 어느새 ‘그럴 수도 있는 일’이 되어, 우리들로 하여금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 없는 자로 만든다. 그래서도 사실 어떤 어려움은 의도적으로도 유익을 위해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누구라도 고난이 좋을 리 있겠나? 저마다 기복적인 신앙을 가지고 사는 것이야 인지상정이지만,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하여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며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현실적으로야 오늘 욥의 아내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지만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9).” 그 속상함이 오죽했으면 그러했을까? 그럴 때 엇비슷하게 하와의 그런 꾐에 아담은 일체 뭐라 하지 못하고 아내가 건네는 선악과를 받아먹었으나, 오늘 욥은 자신의 믿음을 분명히 하여,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10).”

 

인간적으로 그 고통의 당사자인 욥이 그러할 지경인데, 그의 친구들,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멀리서 욥을 보고 기겁을 하여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12-13).” 인간적으로 아내나 친구들의 속상함과 슬픔을 같이 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자칫 우리의 공감과 동조가 무조건 힘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여 오늘 시편으로 마음을 달래며,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111:1).

 

우리가 같은 마음으로 모여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그의 행하시는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

(2-3).

 

하고 주를 인정하는 일은 복이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9).

 

설령 오늘의 현실이 우리로 고통 가운데 있게 하나,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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