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복이 있도다

하현. 2025. 10. 2. 17:20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욥 3:26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12:1

 

 

나는 묵상글을 의무감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쓰고 싶다. 그래서 추석 연휴 때 교회에 올 수 있는 시간과 집에서의 시간들, 그렇다면 평소와 다른 동선에 따라 어디서 어떻게 묵상을 하고 글을 써야 할까? 하는 계산으로 며칠째 시간표를 짜듯 이리저리 생각해본다. 이는 누구에게 보여줘야 하는 것 때문이 아니다. 실상은 하루에 서너 명도 안 읽는다는 것을 안다. 문제는 나를 위해 써야 하고, 그 이유는 수시로 어디에서든지 다시 읽을 수 있기 위해서이다. 설교도 묵상글도 나는 어떤 의무감이나 책임감보다, 사실은 내가 나의 하루를 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누구에게 의무감으로 보내던 상대를 하나둘 줄여간다. 어차피 읽지도 않지만 그와 상관없이 책임감으로 보내던 것이었는데, 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읽고, 묵상하고 같이 나누려고 하는 이들은 찾아 들어와서 읽는다. 그러니 드는 판단은 ‘탓’이다. 어차피 읽지도 않는 것을 굳이 보내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일종의 책임회피의 성격이 강하다. 오늘 이러한 속엣 얘길 먼저 하면서 시작하는 것은 ‘~하였더라면’ 하는 가정법은 그 시제를 과거로 돌려 원망과 불만을 바탕으로 ‘탓’을 하는 것이다.

 

사실 이는 우리의 본성이다. 처음 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3).” 하고 여자도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4).” 하고 그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근본적인 속성이다. 이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경우도,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이 주님 탓이듯 마리아도,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32).”

 

그런 식으로 오늘 본문은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욥 3:3-5).” 하고 이어지는 내용으로 오늘의 고통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고 하나님께 전가한다.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9-10).”

 

곧 ‘죄로 일그러진 영혼’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후회와 원망뿐이다. 오늘 이러한 욥의 원망 내지 푸념은 앞으로 이어지게 되는 친구들과의 격돌을 예고한다. 저들과의 논쟁은 당사자와 주변인의 괴리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간극이다. 남의 일이야 누군들 뭐라 못할까? 오늘 욥의 독백이 하나님이나 친구 등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단순히 그가 처한 상황에서 혼잣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탄식을 토로하여 7일 밤낮을 함께 슬퍼하며, 차마 누가 먼저 위로의 어떤 말조차 할 수 없던 상황에서 불을 붙인 셈이다.

 

이럴 때 누구라도 가만히 하나님께 아룀으로 입을 다물고 침묵으로 곁을 지켜주기란 쉽지 않다. 모든 고통은 절대적인데 이를 무심히 상대적인 것으로 접근하려드는 욕구가 우리에게 있다. 이 또한 죄의 속성으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곧 남의 어떤 점을 뭐라 말하기란,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4).” 오늘 우리 사회나 국제정세가 온통 그러하다. 그건 본래 그렇다 치고, 우리 자신은 어떠한가?

 

욕먹을 소리지만 나의 묵상글쓰기와 설교원고 작성 및 설교하기는 솔직히 날 위해 한다! 모르겠다, 이런 나의 자세가 옳은 것인지… 처음에는 뭔가 대단한 사명감으로 누구를 위해, 성도를 위한, 교회를 위한… 하는 식의 당위로 의무와 책임을 가졌다.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하여 설교원고를 준비하고 설교를 할 때도, 누구와 상담을 하고 그의 일을 가지고 같이 기도할 때도… 나는 그러한 사명감이 부르심으로써 책임이고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도 뭔가 해야 한다는 데서 조바심을 내고 어떤 성과가 없으면 실망하고 또한 원망하였다.

 

누군가 설교 중에 자신이 반평생 목사로서 설교를 하며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어찌 하였다는 표현들을 할 때, 사실 좀 거부감이 들었다. 그보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닐까? 가령 부모가 나중에 자식들에게 서운해 할 때, 내가 널 위해 어떻게 살았는데… 하는 따위의 얘길 하면 반감이 든다. 결국은 자기가 좋아서 한 일이지 않나? 사랑이란 그런 것이어서 ‘널 위해 내가’ 하는 시선으로는 아니다. ‘날 위해 내가’ 하는 것이 옳다. 하나님은 그리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3).” 이를 위하여 “내가 너희에게 준 땅에서 그 뿌리를 뽑아내고 내 이름을 위하여 거룩하게 한 이 성전을 내 앞에서 버려 모든 민족 중에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리니(대하 7:20).” 곧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사 48:9).” 이는 이기적인 게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출발은 ‘내가 나를 위하여’에서 출발한다.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달리 행하였었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나라들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겔 20:14).” 곧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손을 막아 달리 행하였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여러 나라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22).” 이로서 참 사랑, 곧 하나님을 사랑함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내가 사랑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나를 사랑하심을 알 때, 내가 나를 사랑함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말 1:11).”

 

고로 나는 나의 묵상글을 사랑한다. 나의 설교원고를 사랑하고 말씀전하기를 사랑한다. 누가 읽고 듣고 어떤 변화나 감동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그와 하나님의 일이다. 내가 나의 묵상글쓰기를 사랑함은, 이 시간, 이렇듯 오늘 욥의 ‘~하였더라면’ 하는 가정법의 숨은 원망과 불평에서도 궁극적으로 저가 그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사랑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서러움, 푸념, 넋두리 같은 ‘탓’이 결국은 하나님을 더 깊이 온전하게 알 수 있고 사랑하게 한다는 것을 배운다. 그러므로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3).”

 

즉 오늘 욥의 이러한 혼잣말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향한 외침이 된다. 이는 세 가지의 탄식으로 구성되었다. 첫째는 자신에게 임한 극심한 고통으로 인한 것이다(1-10). 이는 원초적으로 우리의 죄의 결과로 당면하게 되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알린다. 둘째는 태어나며 사산되지 못한 것 에 대한 탄식이다(11-19). 이는 이 땅에 태어나 산 자보다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자의 복됨을 역설적으로 묵상하게 하는데,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가? 최소한 이제 60 가까이 살았을 뿐이지만 정말로 험난하였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셋째는 고통스런 삶의 연장에 대한 회의와 탄식이다(20-26). 아직도 우리에게는 살아야 할 날들이 남았다.

 

산책을 하다 힘겹게 생을 다하는 노인들을 보면 경이롭다. 오늘은 두 노인 부부가 몸도 가누기 어려운 상황에서 박스를 정리하여 테이프를 떼고, 다른 종류의 쓰레기를 정돈하여 놓는 것을 보았을 때… 길가 외진 곳에 다 구부러진 허리와 손가락으로 나물줄기를 다듬어 작은 소쿠리에 담아놓는 왜소한 노인의 힘겨운 표정을 볼 때… 몸을 뒤뚱거리면서도 어디 볼 일을 보러 가시는가, 얼마 남지 않은 횡단보도 신호를 눈치 채고 절뚝거리며 바삐 길을 건너는 모습을 볼 때… 아, 우리는 얼마나 더 생을 다해야 이 땅의 생에서 놓여날 수 있을까?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8-19).”

 

사는 게 지옥이라,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욥은 극심한 고통 앞에서 아예 잉태되지 않았거나 사산되었거나 혹은 죽기를 희구하며, ‘~하였더라면’ 하고 죽음을 동경하며 생을 원망한다. 여기에 동원되는 의인법, 반복법, 대구법, 열거법 등의 다양한 문학적 표현은 욥의 고통, 생의 고통을 한층 더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이럴 때 지혜는 침묵이겠다.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잠 17:27).”

 

가끔 아내와 장모의 끝없는 말다툼을 듣다보면 어느 한쪽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대꾸를 하지 않거나 입을 다물면 될 것 같은데… 이게 그렇게도 어렵다.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도 같지 않나? 우리는 그저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 곧 이 시대는 너무 많은 말들로 서로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간다. 하여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그러니 이게 그렇게 어려워서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그렇다.

 

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시 10:7).

 

보면 서로 한 마디도 안 진다. 거짓말도 거짓으로 더하여서 수레를 끌 정도로 동아줄이 될 지경이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사 5:18-19).” 곧 거짓말의 힘은 망상이다. 자신의 일을 속속히 이루실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앞으로 점점 극렬해지듯 오늘 욥의 말들이 친구들의 훈계와 교훈과 책망의 말들로 서로가 옳다는 소리로 논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들은 아니한만 못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곧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4).”

 

이를 우리 스스로 아니할 수는 없겠으나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 그러할 때 우리의 고질적인 가정법, ‘~하였더라면’ 하면서 오늘의 시제를 과거로 회귀하여 시쳇말에 지난 일로 가져갈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하여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결국은 우리가 얼마나 주를 신뢰하고 의지하는가의 문제인데,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2:22).” 결국 이 땅의 미련이 늘 발목을 잡는 꼴이다.

 

하여,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일찍이 인생의 한계와 그 끝을 예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번에 누가 성대한 결혼식으로 1억 이상의 예식비가 들었던 모양이다. 상대 쪽에서 외동딸에 나름 좀 사는 부유한 집이라 그러기를 바랐는데, 그럼 자신들이 그 비용을 다 대던가… 그게 또 그런 게 아닌 것이라, 반반 하여 경비를 부담하고, 집도 강남에 어디 전세로 얻느라 것도 반반 하여 살림이 휘청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어떡해? 하고 아내가 묻는데 나야 할 말이 있나? 그러니 다들 사는 게 지옥이라는 말은 스스로들 자처하는 것이지 싶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시 71:20).

 

우리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터,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0-31).”

 

오늘 욥의 푸념 가운데서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20-23).” 하는 대목에서,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은연중에 인정하고 바라는 욥의 심정을 읽는다. 그런 가운데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26).” 하는 것은 그만큼….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12:1).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고 오늘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4).

 

주 앞에 정직하게 아뢰고 고할 때,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5-6).

 

하여 오늘도,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악인은 이를 보고 한탄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되리니

악인들의 욕망은 사라지리로다

(8-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