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욥 4:6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시 113:1-2
잠을 설쳤다. 새벽 한 시에 깼다가 뒤척거리다 잠시 또 잠이 들기는 했는지, 시계를 보니 세 시가 조금 넘었다. 그리고 다시 뒤척리다 깨다 하다 다섯 시에 일어났다. 전날에 쓴 묵상글을 읽고, 그것 가운데 마음이 와 닿는 말씀구절을 손으로 쓰고… 그러면서도 자꾸 시선을 놓치듯 생각이 다른 데로 갔다. 오늘 날에 딸애가 결혼할 아이를 인사시키러 오겠다는데, 모두가 믿는 가정에 아이도 믿음이 좋고 성실하고 더욱 딸애에게 더없이 잘한다고 하니 더는 바랄 게 없는데도 마음이 자꾸 울먹울먹하다. 그간의 시간이 모두 후회와 아쉬움뿐이라 마음이 어렵다.
안 되겠다 싶어서 오늘 묵상글쓰기를 일찍 끌어다 본문을 읽었다. 늙은 엘리바스의 말이 귀에 안 들어와 다시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울먹거리며 노트에 썼다. ‘딸애를 시집보내지 못하겠다.’ 그리 쓰고 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아들을 필리핀으로 보낼 수밖에 없을 때 그리 결정되고 내내 울다 공황이 왔다. 그렇듯 지금 심정도 그래서… 주님! 하고 외마디 주의 이름을 부르니까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큰일이다. 오늘 오기로 이미 다 약속이 됐는데 다음에 보자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래서 다시 붓펜을 들고 주님! 하고 종이에 적으니까, 시집내보내지 못하겠다는 말 다음에 대신, ‘하나님이 내게 아들을 하나 새로 주셨다.’ 하고 썼다. 적어놓고 가만히 글자를 보는데, 마음이 평안해졌다. ‘그래, 내가 우리 딸을 시집보내는 게 아니라, 내게 새로운 아들을 하나 주시는 것이다.’ 하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더 큰 은혜를 주셨다.’ 하고 생각하니, 요동치던 마음이 잔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다시 본문을 읽는데,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훈계하듯 말한다.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하는 말은 한 마디로 남의 일에 대해서는 훈계하더니 네 일에 대해서는 놀라는구나? 하고 질타하는 것이다(2-5). 그러게, 우리가 다 그렇지 뭐! 이러니저러니 남의 일에 대해서는 뭐라 말로 위로하거나 훈계하지 않나?
앞서 욥이 탄식하여 ‘저주와 한탄’을 쏟아낸 것이 이런 빌미가 되었다. 욥이 결코 특정한 대상을 두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욥의 친구를 대화자로 한 것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면 혼잣말이고 더 들어가면 하나님 앞에 한탄하고 애통해서 하는 말이었다. 소위 자기 독백이다. 그럼에도 한탄이 내포되어 있었으니 친구로서 엘리바스는 듣다못해 하는 소리였겠다. 엘리바스는 나이가 많은 자로 알려져 있다. 그럴 증거가 있다. 우선 말이 길게 늘어지고, 보편타당한 사고로 ‘지당하신’ 말씀이고, 훈계적이다. 그의 어투가 경망스럽지 않고 내용은 보편타당할 정도로 맞는 말들이다.
그의 말이 다음 장인 5:27에까지 길게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가장 연장자이거나 노인일 것 편견으로 읽힌다. 그렇다고 욥을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 너무 보편타당한 진리로 악은 징벌을 받고, 선은 보응을 얻는다는 도식적인 사고에 이어간다. 그러다보니 ‘욥의 특수한 상황’ 곧 저가 알기로 욥이 의인인데도 어찌 징벌을 받는가? 하는 데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욥의 탄식을 정중하게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곧 엘리바스의 말은 보편적으로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피력하면서, 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하고 되묻는 것도 그 때문이다(7). 그러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데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8-9).” 하고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틀 안에서 말한다.
그러면서 또 자신이 마치 남다른 ‘하나님의 계시’로 하는 말처럼 “어떤 말씀이 내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사람이 깊이 잠들 즈음 내가 그 밤에 본 환상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느니라(12-14).” 하고 자신의 특별한 경험, 남보다 더 살면서 느꼈던 혹은 체험했던, 나이든 자들 특유의 전재로 흘러간다.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느니 그 영이 서 있는데 나는 그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를 들으니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15-17).” 나도 말하다보면 시쳇말로 ‘꼰대’란 소릴 듣는데,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일반화시키고, 보편적인 진리를 마치 자신만이 아는 특별한 것처럼 훈계하듯 말하는 것이다. 오늘 엘리바스의 말에서 특히 그러한 느낌을 받는 것은,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하면서 가르치려 드는 것이다.
곧
“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 장막 줄이 그들에게서 뽑히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은 지혜가 없이 죽느니라(20-21).” 하는 것처럼 엘리바스의 말에서는 우선 자신의 경험적인 지식에 바탕을 둔 것이다. 결국 우리의 경험이란 ‘철학적 논조’를 벗어날 수 없다. 엘리바스는 앞으로 이어질 다른 친구들에 비해 보다 더 인과응보적인 시각으로 고난에 대해 접근한다. 고난의 결국이 죄에 있음이고, 모든 불행은 그러하듯 자초한 것이 된다.
일정부분 공감하고 존중하나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롬 14:1).” 하는 바울 사도의 설교에서나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 7:4).”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와 같이 이는 모두 다를 게 없다. 누가 누구를 정죄하고 비난할 수 있다고 엘리바스와 같이 이런 소릴 하겠나? 오히려 바울은 자신도 자신을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바울은 이 문제에 예민하였다. 우리가 흔히 빠지는 죄가 결국은 남을 판단하는 것이어서,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그러지 못하게 주께서 우릴 위해 정죄함을 받으신 게 아니겠나? 그러므로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
고로 내가 나로 옳다 하는 것은 이처럼 주를 바람으로 주 앞에 세우는 삶으로이다. 사실 나는 남을 많이 비판하고 심지어 비난하고 원망하며 살았다. 그러기에 적당한 조건의 가난과 질병과 여러 환경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다 결국 ‘보이는 나’와 ‘내 속의 나’는 다른 사람으로, 사람들은 나를 긍정적이고 활발하며, 착하고 심지어는 선하다고 여겨주었다. 예전에 어느 모임에서도 사람들과 어울릴 때 사람들의 그러한 시선이 나로 하여금 점점 더 가식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거기에 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아이엄마들을 주로 상대하다보니 나의 ‘선하고 낙천적인 기질(?)’이 저들에게는 보기 좋았던 것 같다.
실제의 나는 누굴 판단하고 비판하여 더는 아니다, 하고 스스로 답을 내면 더는 상종하지 않았다. 오죽하니 곁에 가까운 친구들일수록 나더러 차갑고 냉정하다고 했다. 하긴 나는 이별도 칼 같아서 서로 헤어지면 모든 관계는 끝이다. 그를 차단하고 단절하여 더는 내 모든 생활반경에서 사라지게 했다. 그러던 게 주 앞에 고꾸라지고 보니 백 번 천 번 하나님이 나를 그야말로 ‘손절’하셨어야 마땅할 것인데, 굳이 왜 이처럼 사랑하시는가? 하는 데서 늘 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조금은 의식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왜?’ 하고 묻지 않으려 한다. 어떤 문제 앞에서 누가 힘들어할 때, 무슨 일로 그러는지… 저의 말에서 유추할 뿐 다그치지 않는다. 어떤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이, 찾을 수 없는 일보다 더 많다. 그런저런 이유를 들이대면 오늘 이 엘리바스와 같이 보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판단하게 된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의 상당수는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그것을 찾는 게 어려운 일들로 가득하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 해도 결국은 누구 탓인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불가능한 원인을 두고 그럼 어쩌겠다는 것인지?
하여 나는 상대가 울면 같이 운다. 누군 내게 과몰입으로 공감하여 오늘 나의 정신과적인 문제가 낫지 않는다고도 한다. 그런데 이게 늙어서 갱년기라 그런가? 어떤 안타까움으로 저가 울면서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할 때 나로서는 할 말을 잃고 그저 가만히 같이 우는 것으로는 자신 있다. 물론 그래놓고는 상대는 좀 나아진 것 같은데 나는 또 그것을 두고두고 곱씹다, 주께 아뢰고… 이러한 감정이 어려워서 신경안정제를 달고 산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나로서 오늘 누구를 위해 울다, 그것으로 내가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해서 또 우는 일이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곧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는 해결되었다. 끝난 이야기다. 죄 때문에 더는 정죄를 받는 게 아니라, 이를 알게 하시려고 징계를 받는 것일 수는 있다. 심지어 예수님은 어느 창녀에게까지 이르시길,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1)”
곧 죄에 따른 정죄는 이미 승리하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러므로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이로써 오늘 우리는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고후 1:4).”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바른 목표는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잠 29:18).” 주가 다 아신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우리가 듣고, 보고, 따라야 하는 길은 예수시다. 말씀으로이다. 엘리바스가 당대에 얼마나 훌륭하고 귀한 인품의 소유자로 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저들을’ 따르는 게 아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그러므로 오늘은, 더욱 말씀으로 서자. 세상 이치가 아무리 어떻고, 사람들이 다들 어떠하다 해도,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호 8:7).” 더는 이처럼 허무한 길로 갈 수 없다. 하여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8:14).” 고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누가 속단하여 마치 정답처럼 말할 수 있겠나?
다만,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하신 말씀만을 붙들고… 오늘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앞서 묵상글을 먼저 썼다. 쓰면서 주가 주시는 평안으로 간구한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시 113:1-2).
우리가 사는 날 동안,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3).
그리하여,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할렐루야
(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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