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하현. 2025. 10. 4. 06:33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욥 5:8-11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시 114:2

 

 

일찍 또 눈을 떴다. 새벽을 깨워 묵상글을 쓰기로 했다. 낮은 마음이 조바심 나고 새벽은 늘 일정하게 나를 깨운다. 욥을 향한 엘리바스의 말을 듣다가 내가 늘 그렇듯 ‘바른 말’로 사람을 가르치려 들고 뭘 더 아는 것처럼 굴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흔히 선생으로나 목사로 살면서 빠지기 쉬운 함정이 남을 향해서는 엄격하고 자신을 향해서는 관대하다는 것이다. 일일이 대꾸는 안 한다고 해도 속으로는 저를 향해 인색했던 것들이 생각난다. 오늘 엘리바스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8).” 하는 데서 당연하면서도 위로가 안 되는 소리란 생각을 하였다. 이어지는 내용은 더하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9-11).” 더러 누구에게 서슴없이 말하고 그리 취급하며, 마치 나의 경험과 아는 것이 덕목이 되는 것처럼 굴었던 적이 많다. 순간 주 앞에 회개한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늘 그래왔던 것을 말이다.

 

어제는 딸애가 결혼할 아이가 왔다. 오전에 내내 먹먹하였던 감정이 나로 하여금 묵상글을 쓰게 하였고 정오에 약속된 시간 전까지 말씀 앞으로 앉게 했다. 기도하고, 생각하고, 묵상글쓰기를 하면서 마음을 진정하였다. 있는 그대로 아이에게 말하고, 그렇게 함께 해온 딸애를 진정으로 사랑하기를 바랐다. 사랑은 주를 경외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좋아한다’와 ‘사랑한다’가 혼용되는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은 더 좋은 게 생기면 덜 좋아하거나 싫어질 수 있고, 그때그때의 감정에 따라 좋거나 또는 싫거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절대적인데 이는 서로의 사이에 하나님이 우선하심으로 가능하다. 그리 일러주며 당부하였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아이가 오기 전에 준비하였던 본문(전 7:13-18)으로 아버지로서 혹은 목사로서 내가 당부하고 싶었던 말을 전하였다. 그리고 이 아침 말씀 앞에 앉아 혹여 내가 ‘엘리바스’가 아니었나? 하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된다. 오늘 저의 훈계는 어제에 이어 계속되고 있다. 즉 고난에 있어 그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악’에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여 탄식하는 욥을 향해 그러한 생각이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자신의 주장이 타당함을 마치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엘리바스는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을 제시하고(4:12-21), 이어 악한 인생에게 벌을 주신다는 교과서적인 주장을 펼친다.

 

오늘 본문 6, 7절에서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하는 말은 매우 시적이고 철학적이기도 하다. 즉 고난의 개연성을 주장하는 데 있어 결코 이유 없이 고난이 오지 않는다는 것과 욥의 탄식이 너무 하나님을 모르고, 고난의 원리를 알지 못해서 그렇다는 듯 가르치려 든다. 다시 말해서 욥이 모르는 욥의 숨겨진 죄가 있을 것이고 그러한 죄 때문인 것을 나무라듯 말한다. 그러면서 어리석다고 정죄한다.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1-2).”

 

아, 내가 ‘엘리바스’였다. 누가 고난으로 신음하거나 나름의 생각을 말할 때 직간접적으로 나 또한 엘리바스와 같이 다그치듯 몰아세우기 일쑤였다. 마치 나는 능숙하게 생의 고난을 터득하고 사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렇듯 ‘불평은 무익하고, 주어진 축복의 기회를 망치는 길’임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정작 생을 다하기까지 고난을 피할 수 있는 삶이 있을까? 다들 이제 나이들이 들면서 여기저기 아픈 곳이 생기고, 노인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어디가 부러지거나 다쳐서 더는 거동이 어려운 경우도 다반사다.

 

이를 두고 ‘~때문이야!’ 하는 식으로 속단하거나 그리 단정지을 때가 많다. 더욱이 남의 아픔이나 고통을 보면서는 더욱 엄격하였다. 종종 누구를 위로하거나 상담할 때 나의 당연하다는 듯 한 말 한 마디가 저의 상처를 후벼대고 파는 고통을 더할 수 있었다. 오늘 엘리바스의 질문이나 반어적인 말투가 익숙하게 들린다. 내가 그러했고 습관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누구의 일에 대해 그리 판단하거나 충고하기까지 하였다. 거기에 나의 개인적인 경험까지 얹어서 마치 내가 겪어보니 그러하다는 식으로,

 

“내가 미련한 자가 뿌리 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그의 자식들은 구원에서 멀고 성문에서 억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그가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덫에 걸린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3-5).”

 

섣불리 아무렇지 않게 그리 예단하였던 것을 회개한다. 주 앞에 아뢰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흔히 솔직하게 나의 경험을 말하면서 마치 이를 보편적인 진리인 것처럼 강조하고 강요하기 일쑤였다. 흔히 목사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고, 그리하여 당시 예수님도 가장 경계하고 꾸짖었던 무리들이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 서기관들이었다. 저들은 그렇듯 큰 거리에 서서 기도하였다. 즉 자신이 옳은 추가 되는 것처럼 거룩한 표정과 말투와 옷차림으로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

 

하고 스스로에게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 하고 그럴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시편은,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 100:4).

 

하고 우리가 또한 누구라도 그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어제 나는 진심을 다해 딸애와 결혼하겠다고 찾아온 아이에게 말하였다. 즐거운 일에서는 감사하고, 슬픈 일에서는 기도해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 두시는 생으로 우리로서는 그 앞날을 알 수 없게 하셨기 때문이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하여 성경의 여러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하였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당장 죽을 걸 알았다. 이는 저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의 계책인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더욱이 그러한 것은 일찍이 어릴 때부터,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1:8-9).”

 

특히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저마다 다 지극할 테지만 나는 어제 고백하기를, 일찍이 결혼하면서 젊을 때는 문학을 하고 세상에서 어울리면서 저들과의 관계를 더 중히 여기느라 본이 되지 못했다. 신앙적으로는 물론 인격적으로도 모난 사람이었음을 고백했다. 그러다 뒤늦게 강권하심을 받아 부르심에 끌려갈 때는 그래서 또 닥친 하나님의 결박으로 인해 부모로서 아이에게 온전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인간적으로도 잘해주지 못했음을 말하다가 울었다. 나의 눈물은 오장육부를 쥐어짜며 올라왔고 미안함으로 깊은 신음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제 줄 수 있는 것은 말씀뿐이어서 나는 당부하였다.

 

원망하지 마라. 불평하지 마라. 모든 것에서 주를 인정하며 살자.

 

이는 내가 아버지로서도 아니고, 목사로서도 아니고, 먼저 살았던 사람으로서도 아니라 우리가 아직 가야 할 길을 두고 하는 것이었다. 지극히 외롭고 어렵고 부족한 사람으로서,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4, 8).” 나는 이제 아이 앞에서 아이다. 아이들 앞에서 누구보다 어리석었고 나약했고 한심할 정도로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자로 살다가 이제 주 앞에 서서 말하기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

 

하시는 시편의 세계를 살고 싶다. 감사하다, 모든 게 다 감사하였다. 나의 실패와 좌절의 시간들도, 그리하여 죄악 된 길로 돌았던 어리석었던 나의 날들로… 이제는 모든 게 다 감사하여서 그리하여 주를 바란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3-4).” 우리가 잘 사는 길은 겸손과 경외함으로다. 주실 때 감사하고 없을 때 기도한다. 이만하여서 찬송하고, 힘에 겨워서 주를 바란다. 어떠하든지 주를 사이에 모시고 좋아하는 게 사랑이다. 나는 그리 일러주었다.

 

그러할 때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그렇게 새 사람이 되었을 때,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그러할 때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31).” 우리가 얻은 오늘 이 공의의 길이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14:29-30).” 삶이 우리를 노하게 할 때도 이를 주는 찬송이 되게 하신다는 것과 우리의 남은 노여움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말씀,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하시는 시편의 기도를 자주 읊조리면서, 오늘 여기 엘리바스의 옳는 말이나 틀리고, 맞는 말들이지만 옳지 않은 것은 저가 정작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강한 자의 칼과 그 입에서, 또한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주시나니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희망이 있고 악행이 스스로 입을 다무느니라(욥 5:15-16).” 이에 대하여 우리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하실 때,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슥 10:1).” 이 원리는 간단하였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먼저와 나중’의 원리로 주 앞에 우리의 생이 온전하기를. 그러할 때,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이는 엄연하여서 나의 생이 이를 증거 하는 듯 지나온 모든 것들이 그러하였다. 가난할 때나 아프고 힘들 때도, 이해할 수 없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도… 내 안에 주의 영이 대신 간구하셨다. 분명 그러하였다는 것을 스쳐지나간 ‘애굽의 바로’를 생각해도, ‘바사 왕 고레스’도 모두가 그때마다 주가 내 곁에 세우셨던 이들이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4).” 내가 날 위해 기도하다 어느 순간 더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곁의 한 영혼을 두고 주 앞에 구하고 아뢰게 되는 것이었다. 이를 엘리바스는 몰랐을까? 오늘 이 지당하고 마땅한 권면과 충고보다 주 앞에 기도하며 욥의 고통과 그 목적을 두고 기도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5:18-21).” 이 말이 주께로 향한 아룀과 의뢰로 함께 하는 기도였어야 했다.

 

새삼 나의 엘리바스를 돌아보며,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내가 구하고 또 기도하여야 할 것을 알게 된다. 그러할 때,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령하였어도 그들이 행하지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규정대로 그들에게 이루게 하였느니라 하라(렘 11:8).” 하심을 두려운 마음으로 찾아보며….

 

언제나 어떠할 때도 주가 함께 하셨음을,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시 114:1-2).

 

오늘에 이르러는 나로 주의 성소가 되게 하시고 나로 주의 영토가 되게 하심으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그리하여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9).”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