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
욥 6:25-26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어찌하여 뭇 나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시 115:1-2
위로가 고통이 되고 충고가 욕이 되어 달랜다고 하는 것이 폭력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고통은 잔인하고 개별적이어서 상대가 이를 이해할 수 없는데도 위로와 충고와 권면이 고통을 더욱 후벼 파는 것만 같다. 이에 오늘 욥은 그만 하라고 비명을 지르는 듯하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하고 주께 눈을 돌린다(7:17-19).
결국 오늘 시편의 외마디 비명 같은 기도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시 115:11).
어찌할 바 모를 때 사람을 상대하느니 주께 의뢰하고, 절망이 극에 달하여,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6:9).” 하는 참혹한 지경에 이르러도,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10).”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우리로 하게 하시는 것이 말씀이었다. 할 수 있다 하신 이가 할 수 있는 힘도 우리에게 더하시는 것으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이는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지만 설령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해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17).” 곧 믿음의 사람들은 ‘더 좋은 것으로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이 놀라운 공통된 믿음의 확신이 필요하다.욥은 앞서 4장에서부터 14장까지 일차적으로 세 친구와 논쟁을 벌인다. 먼저 4, 5장에서 세 친구 중 가장 연장자 엘리바스가 먼저 변론하는 것을 들었다. 저의 말은 가르치고 훈계하는 어투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매우 철학적이고 관념적이었다. 이어 6, 7장으로는 그 말에 대한 욥의 반박과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다루어진다.
본문은 이러한 욥이 탄식의 이유와 그 정당성을 제시한다. 있는 사실을 말한다. 욥은 자신의 친구들이 듣기에 경솔하게 들리는 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1-4). 즉 ‘자기에게 임한 재앙의 무게를 달아보면 바다의 모래보다 무거울 것이라’고 한다. 이는 듣기에 경솔한 탄식 같다. 그의 견딜 수 없는 극심한 고통에서 비롯된 것일 뿐인데도 그렇다(2-3). 욥은 자신에게 임한 고통에 대해 ‘하나님께서 과녁으로 삼아 쏜 독 묻은 화살’ 같다고 묘사함으로 고통이 극심함을 호소한다. 화살이 박히고, 독이 퍼지는 것 같은 고통을 당사자가 아닌 이상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어서,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4).”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고통보다 두려움이었다. 자신의 고난 자체의 무게보다 이해할 수 없는 재앙을 갑자기 당한 자신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엘리바스의 층고가 그만큼 더 허황되고 무의미한 것임을 지적한다. 그런 가운데 욥으로서는 자신의 탄식의 정당성을 주장한다(5-7). 이 또한 문학적으로 구사하면서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하고 묻고,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내 마음이 이런 것을 만지기도 싫어하나니 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하였는데 고난을 먹을거리로 비유하고 있다.
즉 자신은 엘리바스의 주장대로 죄악 때문에 재앙을 당하여 고통 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재앙을 당할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재앙을 당한다는 항변이다. 그로 인한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나귀나 소가 먹이가 없어 본능적으로 우는 것처럼’ 자신도 본능적으로 부르짖어 탄식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엘리바스는 당면한 고난으로 불평할 것이 아니라 거기에 순복할 것을 촉구하였는데, 고난이란 게 맛 있는 음식을 먹듯이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의미로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욥의 탄식을 ‘지나친 자기 정당성’으로 보면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몰아갈 수 있다. 그래서 욥은 잊지 않고 설명한 것이다.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8-9).” 즉 이 모든 과정과 원인과 목표가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10).” 이를 성경의 논리로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곧 오늘 이 우리의 고통에 대하여도 하나님이 앞서 체휼하심이다. 그분은 우리 인간의 진정한 위로자가 되실 수 있다. 왜냐하면 당해보지도 못하고 말로만 위로하고 충고하는 엘리바스와 친구들처럼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특별히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의 최대 문제인 죄의 문제를 몸으로, 마음을, 하여 직접 고통을 받아 죽으심으로 해결하셨다. 그러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어떤 고통의 문제도 모르실 리 없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위로자로 우리와 같이 고통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사 49:13).”
하여,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이러한 말씀 앞에서 더러는 여전히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 얼마 전 딸애와 인사 온 아이 앞에서 말했다. 목사가 되면 뭐든 달라질 줄 알았다. 어떤 어려움을 해결하실 줄 알았다. 나에게 덮친, 나를 강권하심으로 붙들어놓으려 공황과 불안으로 붙드신 두려움이나 현실의 이런저런 일들이 저절로 풀릴 거라 여겼다. 그러나 오늘도 여전한 것은 나로 하여금 이와 같은 이를 위로 위로하고 격려하게 하시려고, 이에 대하여 바울은 말하였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어렴풋이 하루하루를 더하여 살면서 이 의미를 알겠다. 내게 주신 이 놀라운 은혜, 계시의 말씀으로 행여 자만할까 하여… 곧 나의 예전의 기질대로라면 부흥강사나 선동가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사람들 앞에 서길 좋아하고 어울리기 좋아해서 마치 내게 주신 이 놀라운 은총(나는 이 내용을 잠시 아이에게도 설명했다)으로 행여 자만할까 하여 ‘내 육체의 가시’를 그대로 두심인데, 여기서 더욱 놀라운 것은 그곳에서 더욱 귀한 주의 은혜가 넘쳐남이다. 그것으로 아픈 영혼을 달래고, 상한 심령을 위로한다. 그럴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한다. 하여 바울도 깨달은 바,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
이는 어떤 고통을 안고 사는 사람의 진실 된 고백이다. 내가 아는 누구는 어떤 돕는 이의 손길이 없이는 스스로의 식사는 물론 똥오줌도 치울 길 없다. 그런 가운데서 저는 더욱 큰 감사를 느낀다. 오늘 우리가 남모를 고난 중에 있다면,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하게 하신 말씀 앞에 자신을 가만히 앉힐 것을 권한다. 누가 친정오빠의 교통사고와 그 치료를 위해 무리하게 돈을 끌어다 썼다. 이를 감당하려 분식가게를 차렸는데 늘 하루하루가 간당간당하다. 이러한 내용을 적어주고 기도를 부탁하는데, 나로서는 오늘의 저의 고난이 헛되지 않기를… 저로 인하여 그 가까운 이들이 주를 영접하고 주의 은총 아래에 거하기를… 이러한 기도는 막연하여 힘이 없는 것 같지만 그것으로 주의 놀라우신 도우심이 역사하실 것을 믿는다.
오늘의 욥의 이 고난의 이야기가 후대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지표가 되어 당면하는 고난을 두고 어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그 친구들의 터무니없는 위로들 같지만 그들의 태도가 우리 안에서 누구라도 같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곧 우리가 서로의 고통을 공유하는 것은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자랑하여 자고하고자함이 아니라,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고 함께 하셨는지를 알려서…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하는 이 성경의 원리로 살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러할 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어제는 모처럼 우리 네 가족만 슬그머니 나와 집근처에 새로 생긴 ‘가온당’에 갔다. 빵과 커피를 놓고 딸애의 결혼에 따른 실제적인 말들이 오갔다. 딸애가 그동안 이래저래 모아둔 돈을 다 끌어 모은다면 1억은 되었다. 대학동안의 학자금대출도 다 갚고 그 정도라, 나는 그저 기특하였다. 문제는 그 돈을 아내가 아파트 전세에 쓰고, 여기저기에 다 써서 현실적으로는 어렵게 됐다. 아들과 나는 나란히 앉아 딸애와 아내가 나누는 심각한(?) 대화를 묵묵히 듣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니 상대가 없어 시집을 못갈까 걱정, 좋은 상대가 생겨 시집을 가려니까 그것도 걱정…. 더욱이 나로서 그래도 아빠이고 가장인데 뭐 하나 줄 게 없으니….
나는 주 앞에 아뢰는 것 말고는 달리 손 벌릴 데도 없어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라, 그런 가운데 딸애는 저쪽에 인사하고 승낙을 얻는 일보다 ‘우리 아빠’를 ‘목사님’으로 지칭하여 그 애에게 먼저 허락을 받아야한다고 일렀던가보다.
이런저런 심각한(?) 대화중에, 엊그제 인사 올 때 그 애는 양복을 새로 드라이클리닝 하고 아침 일찍 미용실에 들러 머리까지 하고 온 것이라며 딸애가 말했다. 이렇듯 나를 존중하는 것이 어찌 단지 나를 향한 것이겠나? 딸애는 한 달에 한 번 수고하여 십일조를 교회 통장으로 넣을 때면 ‘목사님! 십일조 드립니다. 이번 달도 감사합니다.’ 하고 카톡을 남긴다. 그때마다 나는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로 갚아주실 것을 기도한다. 곧 내가 뭐가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나는 무능하고 연약할 뿐이나 그런 가운데도 엘리 제사장에게 어린 사무엘을 맡기는 한나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시 115:11).
오늘 시편이 기준이 되어 삶의 좌표를 찍는다. 그리하여,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1).
나는 소리 죽여 주께 아뢸 뿐이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3, 9-10).
그렇듯이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12-13).
그리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
여호와께서 너희를
곧 너희와 너희의 자손을 더욱
번창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11, 14-15).
하여,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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