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욥 8:3, 7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 117:2
욥과 친구들 간의 논쟁이 서서히 일고 있다. 앞서 엘러바스에 이어(4-7장), 욥의 답변이 이어졌고(8-10장), 오늘은 수아 사람 빌닷의 변론이다.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저는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연다.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앞서 욥의 논고를 듣고, 그에 따른 저의 평가는 지혜자의 말처럼 옳은 것이다.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하고 단정적으로 지적하고 있다(1-3).
결국 빌닷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당하게 대우하신다’고 한 데 대하여 ‘욥의 고난의 원인’이 그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4-6).” 그렇게 욥이 당면한 고난의 원인을 죄로 볼 때,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욥 자신을 죄 때문이든지, 자녀들의 죄 때문이든지 그 죄의 결과이어서 이를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다시 의롭게 하시고,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론적인 빌닷의 이와 같은 정의와 해결은 첫 번째로 말하였던 엘리바스의 경험적 지식에 바탕을 둔 철학적 논조와 같이 옳은 말이지만 공허하고, 단정적이지만 그러한 주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고찰할 수 없다. 둘 다 욥의 고난에서 인과응보를 바탕으로 논한다. 그러므로 믿는 자로서 이를 풀 수 있는 것으로는 회개하는 것으로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것뿐이다. 그런데 욥은 앞서 엘리바스의 충고 후에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기보다 도리어 친구들이 무정하다고 책망하였다. 더하여 말하길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당하게 대우하신다고 원망하였다. 이는 엄연히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인정하지 않는, 신성모독에 해당한다. 하여 그리 규정하고 욥을 정죄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개를 촉구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5-6).” 그리 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예전보다 더 큰 복을 주실 것이라고 이른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7).” 그러면서 빌닷은 옛 선조들의 지혜를 배울 것을 요구한다.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8).”
이러한 빌닷의 주장을 대할 때 뭐라 반박할 게 없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불의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의를 행하면 복 주시고, 잘못을 했을 때 회개하면 용서하신다. 이러한 관점은 의당 바르나 문제는 하나님의 절대 공의로우심의 실현을 종말론적이 아닌 현세적이고 기계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 공의를 강조하기 위해, 모든 고난의 원인을 죄에 결부시키고 우리의 제한적 사고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인간의 단순한 논리로 제한하고 있다.
저들의 시선은 마치 한쪽 면만 보고 있는 듯하다. 매우 도식적으로 파악하여 함부로 욥을 정죄하고 있다. 욥이 잘못을 범한 것으로 그 결과가 오늘의 고통이란 것이다. 특히 빌닷의 이러한 변론은 반박할 수 없는 듯 공감할 수 없다. 수긍할 수 없는 듯 상대하여 대꾸하기도 어려운 마음이 든다. 이런 식의 관점으로 옳은 말만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오히려 반감이 든다. 나 역시 누구의 어떤 문제에 대해 이와 같이 빌닷의 교과서적인 정석으로 접근하여 뭐라 지적하고 훈계하기 일쑤였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잠 26:4).” 내가 그였고, 그러하여서 남에게 엄격하고 나에게 관대하였다. 주 앞에 나를 앉힐 때면 그러한 나의 모습이 더 강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서 송구하고 민망하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15:1).” 지혜자 솔로몬의 이와 같은 교훈이 자신의 날들을 돌아보며 회환에 찬 어조로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2:4-5).” 아무리 옳고 바른 말도 때에 맞는 것이 적절하다.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잠 24:26).”
어제는 그와 같은 느낌으로 감회가 새로웠다. 딸애가 교제하는 아이를 데려왔다. 온 가족이 명절을 맞아서 다 모인 자리였다. 꽤나 긴장하고 두려웠을 텐데 아이는 잘 적응했다. 심지어 같이 윷놀이를 하고 저녁을 먹고 다 같이 돌아들 갔다. 나는 그것으로 감회가 새로웠고 아이의 좋은 성격이 딸애의 마음을 이해하고 너그러이 대해줄 것 같아서 흡족했다. 하나님이 다 때가 되심에 그리 준비하셨는가? 하고 감격하였다. 부모님은 물론 온 가족들이 모두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일일이 사촌 동생들-처음 보는 처제들 혹은 처남들인데 얼마씩 용돈도 슬그머니 주었다고 들었다. 그러한 면면이 인상적이었다.
하나님의 때,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하신 그 말씀과 같이 어느덧 나의 인생에 그러한 때가 이르는 것을 느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 아는 곧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우리의 그와 같은 만남과 새로운 인연은 주가 더하시는 은혜이다. 하나님은 유일무이하신 분이며 완전하신 분이다. 서로는 저마다의 기도가 있었음을 말하였다.
이에 대해 오늘 빌닷은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욥 8:3).” 하고 아주 정당하고 옳은 말을 하였다. 이는 늘 묵상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인정하는 데서 나온 말이다. 나는 이 말에 공감하지만 빌닷의 이러한 지적과 바른 말은 썩 옳은 게 아니다.
욥기를 읽을 때면 자주 드는 생각이 그러므로 침묵이 답일 수도 있다. 그리 인정하고 같이 슬퍼하고 감사하는 정도이면 족할 수 있는 것으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아이를 앉혀 놓고 적당한 질문과 오래된 사이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특이 오늘 본문의 욥은 고난의 대표적 인물이랄 수 있다. 그리고 친구들의 말까지 일일이 다 성경으로 남기신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시다. 그 가운데 내 안의 그 속성, ‘엘리바스’에 이어 ‘빌닷’이 있다. 가끔은 훈계를 일삼으며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누구를 권면하면서 당연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논하며 상대를 정의하기도 한다.
물론 시대가 그러하여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게 되었다. 교회가 제 구실을 잃어갈수록 타종교와 비교되고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여 신앙과 믿음이 인간의 선택의 범주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한 심판을 마지막 때로 유보하셨다. 세상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그래서도 이를 이용해서 사탄은 여러 각도에서 우리로 죄를 짓게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정죄다. 어떤 일을 두고 무엇 때문이라고 단정짓기를 특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극심하게 잘한다.
그렇게 해서 좋은 일은 축복 받은 것으로, 안 좋은 일은 벌 받은 것으로 단정짓기도 한다. 그러한 이유로 의인들도 마치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아직도 정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로 판단하기 십상이다. 고난을 당하는 것을 그리 해석하여 말씀을 왜곡하는 경우도 있다. 세상의 마지막 때가 이르러 하나님이 절대 공의는 세상을 심판하시는데, 의인과 악인은 그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 한다. 자칫 오류에 빠지는 게 그때 가서 하나님이 의롭다하신 이도 뒤늦게 영벌에 처할 수 있다는 주장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하는 것은 일반론적으로 그러하고,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하여 우리는 더 이상 영벌의 정죄와는 단절되었음을 분명히 하셨다. 오늘 빌닷의 사고는 지극히 구약적이고 당대의 여러 우상숭배에 따른 신앙적인 행위와 연관이 있다. 우리도 ‘하늘은 스스로 높은 자를 의롭다고 한다’는 사상이 강하여, 구원의 문제와 은혜의 문제를 혼동하고 그에 따른 보상의 결정을 이 땅의 형태로 가늠하려 든다. 그러나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생명책의 가부간의 결정은 단회적이다.
이는 이미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그러므로 오늘 빌닷은 말은 맞고 또 틀리다.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욥 8:5-6).” 그러나 이것이 기복의 조건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지혜자도 살아보니 알겠더라.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전 7:15).” 오늘 이 현실의 욥과 같은 의인도 있는 것이다. 흔히 선하고 착하다 말할 수 있어 법 없이도 살 사람인데, 그렇다고 저가 구원의 사람으로 의인의 반열에 올라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분명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곧 우리의 의는 의롭다 하시는 이의 것이다.
노아의 의도 아브라함의 의도 ‘저로 은혜를 입었으므로’, ‘그리 여겨주셨으므로’ 의인이다. 하여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7-8).” 둘 다 공통점은 ‘믿음으로’가 그 앞에 붙었다. 하여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고로 오늘 빌닷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면서 단정적이다. 즉 빌닷의 주장은 욥의 회개가 자기를 성결하게 하여, 죄에서 떠나면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회복시켜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녀들의 죄로 인하여 자녀들이 죽었고, 욥의 죄로 이처럼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신앙은 항상 우리 자신이 죄인 됨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분명한 성경의 주장은 죄인이 회개해도(할 수도 없지만), 세상적인 축복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축복도 이 땅에서의 형통한 삶으로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하면 정작 죄인들의 잘 됨을 어찌 반박하고, 안 믿는 자의 구원(이 세상에서의 것)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하여 시인은 그처럼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고 있던 것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 73:1-3).
여기까지는 빌닷의 관점으로도 같다. 그런데 그런 악인들-하나님을 거부하고 안 믿는 자들의-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다. 그 힘이 강건하다.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다.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없다.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다. 강포가 그들의 옷이다.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다.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한다.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는 것 같다(4-9). 실제 우리 현실에서 이러한 사람들은 너무 흔하다. 안 믿고도 잘 살고 부족함이 없다. 부럽기까지 하다. 하여, 이들은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불어난다.
상대적으로 우리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손을 씻어(회개하며) 무죄하려 주 앞에 선다. 그런데 종일 재난을 당하는 것처럼 어렵다. 아침마다 징벌을 받는 것 같다. 그래서 스스로 나도 그들처럼 살고, 생각하고, 말하리라 하면 어떨까? 그래서들 적당히 교회도 가고 믿는 사람처럼 살고, 세상과도 잘 어울리면서…,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시인은 그러했던 자신이 악하였음을 인정하는 것이다(10-15). 하고,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6-17).
한 마디로 세상적인 관점으로나 철학적으로 윤리적으로는 이와 같은 현상을 감당할 수 없다. 시인과 같이 성전에 들어갈 때, 곧 주의 말씀 앞에 나를 앉힐 때야 알 수 있었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18-19).
곧 이 땅의 어떤 현상과 사정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척도삼아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부활신앙에 이어 재림신앙이 있다. 그렇게 해서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20-21).” 이를 어찌 누구의 어떤 현상을 두고 왈가왈부하며 마치 자신이 다 아는 것처럼 ‘빌닷’의 언어로 폭력을 휘두를 수 있겠나?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시 34:9)
그러므로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117: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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