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 10:2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시 119:25, 49
욥이 기도한다. 듣기로는 푸념 같고, 원망 같고, 불평하는 것 같아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침이 없다. 아뢰고 고할 때 이 모든 게 기도가 되고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찬송이 된다. 오늘 본문에서와 시편 119편의 긴 내용은 일치하여 고통을 안고 주의 말씀으로 의지하고 새 힘을 구한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50, 67).
하는 심정을 그리스도인이면 다 같이 공감한다. 우리로 주가 아니면 무엇으로 위로를 삼을까? 세상은 여러 대체물을 두어 우상숭배와 온갖 자기만족으로 위로를 얻지만,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71).
하는 시인의 심정이 욥의 것이고, 오늘을 사는 우리의 공통된 위로가 아닐까? 빌닷의 첫 번째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이면서 기도가 이어지고 있다(9-10장).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과 표현을 빼면 우리가 무슨 말을 더 이어갈 수 있을까? 우리의 좌절감을 직설적으로 토로하고, 하나님 앞에서 이를 거침없이 아뢸 수 있는 것이 복이다. 목 놓아 울 수 있는 자리와 상대가 있는 것이 복이다. 우리가 한결같이 주를 바라는 것은 더러 그것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항변하는 투 같아도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심을 우린 안다. 마침 오늘 시편 119편은 그리하여 ‘신앙의 응급전화 119번’ 같이 주께 토로하며 말씀을 붙들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75, 105).
오늘 나로 괴롭게 하심이 주의 성실하심이라니! 그리하여 주의 말씀이 내 발의 등불이었다. 욥은 자신이 알 수 없는 지금의 이 고통을 두고 항변한다(2-17). 그 심정의 원통함을 참다못해 자기의 생각을 여과 없이 그대로 하나님께 쏟아 놓는다. 즉 이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께 해명하시라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하고 요구한다(3).
이어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여(곧 하나님의 창조물인 것을 앎으로) 두 가지의 의문을 제기한다. 먼저 자신의 고난의 부당성을 항번하고, 그런 뒤 자신의 무죄함을 역설한다(4-13). 이 중에 자신의 무죄함을 아뢰며 하나님이 창조주로서의 능력에 의문을 품는다(4-7). 이는 교만하여서가 아니라 그만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러한 주의 능력에 의문이 들어서이다. 그런 뒤 호소한다(18-22). 육신의 한계를 아시는 분이 어찌 이와 같은 고난을 가하시는가? 하고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여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함으로 자신의 고난의 부당함과 무죄함을 간접적으로 역설한다(14-17). 나아가 직접적으로 죄의 유무와 관계없이 자신을 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부당함을 항변한다. 이러한 호소는 앞서도 있었다.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7:20-21).”
나도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설령 내가 잘못했고 죄가 있다 해도 그게 하나님께 무슨 해가 되겠나? 즉 우리의 죄값 때문에 뭘 이렇게까지 사랑하시는가? 하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고통으로 주의 사랑이 느껴지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일찍이 어려서부터 남모르게 힘들어할 때면 차마 부모나 주변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어도 속으로는 하나님께 얼마나 자주 투덜거리고 원망하고는 했는지 모른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신단 말인가?’ 하듯이.
‘왜?’ 하고 물으면 어떤 답도 없었다. 물론 백 번 천 번 내가 잘못해서 그러는 것이라 인정한다 해도, 그게 대체 하나님에게 무슨 손해가 되고 해를 끼친다고 이러실까? 하고! 어린 게 혼자서 형평성을 운운하며 참으로 긴 시간 동안을 원망하며 살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이 알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랑 앞에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 8:4).
이를 바로 아는 데까지는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하심인데, 욥과 같이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하는 반문으로 세상을 이해하지 못했다(10:3). 또한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6:4).” 하는 의문과 체념이 동시에 들기도 했었다.
즉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찌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학대하고 멸시하심으로 쾌감을 느끼시는가? 혹시 ‘괴팍한 신(神)’이신가? 하는 불만족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실제 누가 아이를 낳았다. 전신마비로 태어난 아이를 낳고 불철주야 교회에 엎드려 주의 이름을 부르며 고쳐달라, 살려달라 애원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셨고, 그래서 교회를 떠났고 하나님을 버렸다. 둘째를 낳아 방치하듯 키웠다. 아이가 글방에 다닐 때는 고1이었는데, 외동딸인 줄 알았다가 그러한 사연을 듣고 글로 쓰면서 아이가 당시 큰 대회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것으로 대학도 갔다. 같이 와서 주일에는 예배도 드렸다. 한동안 인천까지도 왔다. 그러다 아이 또한 공황이 오면서 저 역시 교회를 떠났고 하나님을 부정하게 되었다. 어떤 위로도 거부하고 외면하는 영혼에게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건축하였으며 자기들의 아들들과 딸들을 몰렉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하여 유다로 범죄하게 한 것은 내가 명령한 것도 아니요 내 마음에 둔 것도 아니니라(렘 32:35).”
하나님의 의도를 전심으로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린 이와 같이 허튼 것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하고 이상하고 어리석은 우상숭배로 자신을 소진시킨다. 그리하여 “너희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 틈에서 자녀를 도살하는도다 골짜기 가운데 매끄러운 돌들 중에 네 몫이 있으니 그것들이 곧 네가 제비 뽑아 얻은 것이라 또한 네가 전제와 예물을 그것들에게 드리니 내가 어찌 위로를 받겠느냐(사 57:5-6).” 오늘 우리 사회의 형편이 이러하지 아니한가 싶다.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하면서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그 결과 어떠한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1-23).” 온통 문화가 어떻고, 실용이 어떻고 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능사인 것처럼 변해간다.
이번에 누구의 결혼과 또한 혹시 딸애의 결혼을 연두에 두고 새로 알았다. 더는 주례도 없고 엄숙한 것도 싫어한다. 자기들끼리 좋을 대로 누구는 동생이 축사하거나 친구가 주례 아닌 주례를 선다고 한다. 그렇다고 예식이 간소화된 게 아니라, 비용은 말할 것도 없고 축가하고 춤추고 즐기는 것으로 시간을 채웠다. 그야말로 일가친척 어른들은 머쓱하게 됐다. 누구 결혼식에 식비가 15만원인데, 고기 몇 점에 국수 한 젓가락이 전부였다며 늙으신 장모는 혀를 찼다. 어쩌다 인원도 늘어서 예식비용이 1억을 넘겼다고 하였다. 나는 이를 어찌 이해할 길이 없었다.
우리는 최우선이 예배가 있어야 하고 목사님의 설교가 있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딸애는 당연하다는 듯 그리 받아들였다. 다행히 결혼하려고 하는 아이와 그 가족들도 그리 알고 있었다. 다른 것은 바랄 것도 없었다. 이번 추석 때 인사를 와서 어른들과 동생들에게 마음 쓰는 것을 보고 더욱 흡족하였다. 무엇보다 주를 알고 예배를 우선하는 데서 모든 게 감사하였다. 남들이 어쩌고, 요즘 시대가 어떻고 하는 말을 나는 혐오한다. 성경은 여전하고 말씀은 항상 같듯이 아무리 시대가 어떻다 해도, 변할 수 없는 게 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시 31:14).
나는 그리 작심하고 굽힐 생각이 없는데 딸애도 이를 마땅히 여겨 감사하고, 같이 사귀는 아이도 그 정도 신앙은 되어서 더더욱 감사하였다. 그래서도 주의 은혜인가? 아이가 다니는 교회가 부친과 매형 교회와 같은 노회이고 연배가 있기는 하나 누구인지, 서로가 아는 사이였다. 저가 아이의 고모부로 그 교회에서 섬기고 있었으니 것도 또 은혜이고 예비 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일은 복되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 139:2-4).
이와 같이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번하여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가 믿고 바라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시대가 어떻고, 요즘 애들이 어떻고, 하는 소리로는 너무 궁색하다. 믿는 부모로서도 그 권위를 상실하여 안 믿는 문화에 휩쓸려서 그야말로 인생에 한 번 있을 이 귀한 예식을 허투를 허용하고, 그렇게라도 결혼을 한다니까 좋아할 일인가? 결국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그러므로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고로 우리가 느끼고 보는 세상과 하나님이 보시고 이루시는 세계가 다르다. 그런 가운데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관해서 일체의 봐주심 없이 잘못과 죄악, 허물을 철저히 추적하시고 조사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럼 그럴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다. 하여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 같이 주를 바라자. 그리하여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23:17).”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도 잘 되는 사람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저는 뭘 해도 돈을 벌고, 사람이 붙고, 하는 일마다 척척 풀리는 것 같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성도의 잘못’을 묵과하지 않으시고 징계하시는 것으로 더러는 너무하다! 억울할 때도 있다. 악인은 죄악 중에서도 저질러도 평안하게 사는 데 비해, 성도들은 조금만 실수를 해도 고난이 찾아오는 것 같다. 그래서 싫다며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등지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뭐라 할 수 있는 게 없다. 다만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이것이 오늘 욥의 처지이고, 그에 따른 항변이나 하나님의 타협 없는 인도하심이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 8:5-6).” 고로 우리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어서 더러는 항변하고 원망도 하나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 주 앞에 더욱 엎드려 비는 것이다. 그러할 때,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7-8).”
그러므로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시 119:19).
이처럼 오늘도 말씀 앞으로,
고관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나이다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23-24).
다른 무엇으로 기준을 삼을 것인가?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25).
그렇게,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내가 주의 율법을 항상 지키리이다 영원히 지키리이다
(43-44).
그러할 때,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49-50).
하여,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65, 67, 71).
고로,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75, 13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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