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하현. 2025. 10. 8. 05:57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욥 9:2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시 118:17

 

 

사느라 사는 동안의 일은 모두가 주를 알게 한다. 어려움이든지 즐거움이든지, 실패이든지 성공으로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생을 허락하신 것은 천국 백성으로 그 영생의 삶을 익혀 연마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 땅으로 끝인 인생은 짐승과 같아서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잠 12:1).” 그러므로 한 날의 삶이란 주를 더욱 느끼고 바라며 주 없이 살 수 없는 삶인 것으로 영원을 사모하게 한다. 이를 오늘 시편으로는,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시 118:4, 7).

 

그러므로 살며 사랑하며 배우는 날들이 귀하다. 한 날의 수고로 그 사실을 알게 되는 바,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19-20).

 

오늘은 앞서 빌닷의 충고(7-8장)에 대해 욥이 답한다(9-10장). 이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논쟁을 통해서는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할 수 없다는 ‘불공정한 상황’에 대한 욥의 진실한 고백이다. 곧 인생이 무엇이라고 주가 상대하시며 마주하셔야 하는가? ‘호의를 권리처럼 여긴다’는 말이 특히 믿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자주 드러난다. 마치 자신의 신앙이나 믿음이 특권인 줄 안다. 스스로 취하여 얻은 것으로 여겨 훈장처럼 삼기도 한다. 다만 그렇게 여겨주신 바,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한낱 돌멩이에 불과한 존재인 것을…!

 

하여 슬픔의 노래 중에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애 4:1).” 하고 탄식하기도 했다. 곧 우리가 외치지 않는다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눅 19:40).” 종종 나는 이를 묵상하면서 행여 내가 목사입네, 하고 내 안에 어떤 자만한 마음이 들 때면 이를 묵상한다. 내가 외치지 않아도 돌들이 외칠 것이다. 내가 이처럼 묵상하고 글로 쓰지 않는다 해도 돌들이라도 주의 뜻을 새겨 전할 것이다.

 

본문을 보면 욥은 빌닷의 말에 동조하였다.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1-2).” 하고 빌닷의 말을 보충하듯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20).” 곧 우리가 의로울지도 우리의 어떤 의로 얼마큼 주 앞에 온전할 수 있을까? 스스로는 그리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곧 자기의 불의함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듯하다.

 

이는 머리의 지식으로나 삶의 실천으로도 의에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함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원망하고 불평하였던 자신들의 허물을 토로한다. 욥이 자기의 불의함을 인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는 다만 사람이 자기가 옳다는 것을 하나님께 설득시키려고 논쟁하거나 논리를 전개하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에 대비되는 인간이 논쟁을 벌이는 것은 그 자체로 불가능하고 의미가 없다. 곧 자기는 하나님과의 논쟁을 통하여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말은 그런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3-4).”

 

곧 우리 누구도 감히 하나님을 논쟁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하나님께 항거할 수 없다. 그 근거로 욥은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우주적인 위엄을 근거로 삼는다(5-10). 그렇듯 인생이 관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무 력한 인간의 실상을 강조한다(11-14). 지금 자신의 불의함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논쟁을 통해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하는 것보다 지혜로운 것을 깨달았다.

 

욥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기 위해 제시한 것을 앞으로, 38-41장에서 나타낸다. 즉 점차적으로 말을 듣거나 하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말씀하실 때 제시하시는 말씀과 같아진다. 곧 하나님은 욥이 이러한 것들을 모른다고 하셨는데, 이는 욥이 본문에서 이러한 것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세상에서 완전한 의인이 없다는 것을 의인 욥이 인정하기까지 하게 하신다. 고로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2).” 하는 오늘 욥의 고백이 모든 답을 함축한다.

 

더러는 살면서 주변 아무개든지 나 역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삶을 비관하면서 마치 자신이 자신의 인생에 뭐라도 기여한 듯 억울해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흔히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식의 반문과 ‘어떻게 나에게 이러실 수 있는가?’ 하는 따위의 말에서 ‘어떻게’ 하고 말하는 것을 부사어가 아닌 형용사어로 바꾸면 자신의 상태나 의견, 성질 등을 논하여 마치 자신의 지금, 그 모양이나 상태에 대해 자신의 몫을 스스로 요구하고 인정하는 셈이다.

 

하나 성경은 어느 것도 주께 받지 않은 게 없음을 강력하게 일갈하신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이를 마치 스스로 뭔가 남다른 열심으로 얻은 줄 알고 스스로 권리 행사를 하는 꼴이 가관이다. 흔히 요즘 검찰청이 폐지되면서 갑론을박이 끝이 없는데, 저들이 검찰이 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공부하고, 남들 놀 때 자신들은 수고하고 노력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배달하는 이의 수고나 일용직 노동자의 삶은 또 어떻고? 자신들이 죽기 살기로 노력하여 얻은 것이라 여기지만, 누군들 어떤 삶이라도 그러하지 아니한 삶이 어디 있겠나?

 

나는 그런 논리에 반박할 가치도 못 느낀다. 길거리 어느 모퉁이에 앉아 하루 종일 나물줄기를 다듬어 한 소쿠리 팔아서 생을 연명하는 이의 수고나 누가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밤샘을 하며 수고한 일이나? 가끔 나는 신기시장으로 산책을 가는데 사실은 시장 안으로 들어설 때마다 가슴이 벅차고 두렵기까지 하다. 이는 저마다의 생이 다 치열해서이다. 끊임없이 소리치며 무얼 얼마에 판다며 손뼉치고 발을 구르는 이부터 그 가격을 흥정하여 단 천 원이라도 깎으려고 아등거리며 늙으신 어머니의 악다구니도 그러하고… 그래서도 가끔씩 시장 입구에서 안쪽 저만치 사람들이 바글거리며 팔거나 사거나 기를 쓰는 모습들이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하물며 검사니 국회의원이 하며 마치 자신들만 생을 다해 그 수고를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꼴들이 더러는 역겹다. 심지어는 젖 먹이 아이조차, ‘젖 먹는 힘’을 다해 생을 산다. 살아서 산 자의 생의 과업을 준수한다. 그러니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랴?’ 하고 묻는 오늘 본문의 울림이 크게 느껴진다. 하여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53:1).

 

그래놓고 악다구니 쓰는 꼴이란 게 마치 자신들 아니면 이 나라가 망하기나 할 것처럼, 국회고 검찰이고 이 나라의 정의는 자신들이 지키는 것처럼 착각하는 인간들을 혐오한다. 정작 그러했다면 스스로가 부족했음을 놓고 오늘의 이 시국에 대가리 처박고 용서를 구해도 시원찮다. 하물며 마치 자신들은 우월한 존재인 듯 대놓고 국민을 개돼지 취급하는 것들이 권력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4-5).”

 

곧 오늘이 시련이라면 이는 선을 이루시고자 함이라,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 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하시나이까(14:2-3).” 하는 욥의 변론이 설득력 있다. 곧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전 7:20).” 저마다의 인생이란 모두가 그러하여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 9:20).”

 

그러니 어느 집단이나 개인이나 자신의 의를 스스로 선언하고 외쳐 정당화는 것들에 대하여 나는 역겨움을 느낀다. 설령 그것이 목회자들이라 해도 다를 게 없다. 오히려 그리 삼으시고 사용하신 바, 주의 은혜가 값지고 송구할 뿐인 것을… 우린 욥기에서 하나님 앞에 누구라도 변론할 수 없음을,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40:4-5).” 하여 고백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

 

오늘의 이 악다구니 틈바구니 속에서 다들 살려고, 살아서 자신이 얻고 쥔 것을 놓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을 알기는 알겠는데….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시 39:9).

 

주를 인정하는 자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을 잇지 못한다. 송구하고 감사하여 그저 가만히 감격스러워 할 뿐! 어제도 진통제를 맞으러 병원에 갔다. 명절 다음 날이라 그런가, 대기인원이 수두룩하였다. 늙었든지 젊었든지 어디가 아픈 사람들이 인상을 쓰고 앉아서 모두가 자기 차례를 기다리느라 지친 듯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의사 진료 없이 진통제 주사만 원한다고 하자 10여 분 만에 내 차례가 왔다. 사는 게 다 그러해서 부자면 뭐하고 가난한들 어쩌겠나? 아프면 모두가 악, 소리 내며 가누기 어려운 몸뚱이를 이끌고 잠자코 대기순번을 기다리는 것뿐….

 

인생이 이처럼 가볍고 보잘것없는 것을 마치 자신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남다르다는 우월의식으로 사는 것이겠으니! 아무리 지혜가 뛰어나도 거기에 힘이 따라주지 않으면, 즉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이를 알지 못할 때 인생은 무용한 것이다. 오히려 안타까움만 더한다. 지혜 없이 험담만 하는 생이 수두룩하다. 하여 우리는 “지혜로도 못하고, 명철로도 못하고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하지 못하느니라(잠 21:30).” 누가 감히 인생을 당할 수 없듯이 하나님을 상대하여 자신의 의를 주장할 수 있겠나?

 

다만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 1:8).”

 

그리하여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할 때에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잠 8:22-26).”

 

이에 어느 인생이 감히 주 앞에 마땅하게 요구하겠나? 부디 바로 알자. 더욱 힘께 알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이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그러므로 오늘도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욥의 진술을 듣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9:6).” 이를 새삼 인정함으로 숙연하여진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4-35).”

 

하여,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18:1).

 

이에 누가 이를 자신의 의로 반박하거나 마땅히 여기겠나?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4).

 

할 때에,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5-6).

 

이를 나처럼 살면서 사는 동안에 직접적으로 느끼는 은혜로 산 사람이 또 있을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7).

 

그때,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16).

 

하여 나는 알고, 이를 인정함으로 남은 생이 주께 있음을.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9-20, 28-2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