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하현. 2025. 10. 10. 05:54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욥 11:7-9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시 120:6-7

 

 

앞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말에서도 그렇고(4-7), 수아 사람 빌닷의 말에서도 그렇고(8-10), 오늘 나아마 사람 소발에게서도 그렇고(11-14) 이를 듣고 욥은 변론하지만 나로서는 저들의 말에 뭐라 반박할 수 없는 말들이라, 들으면서 유구무언이다. 오늘 소발의 주장은 사람이 살면서 그에 따른 관례와 신앙적인 전통 교리를 내세운다. 그의 말은 다소 독선적이고 노골적이다. 자신이 아는 그것이 비춰 욥을 비난한다.

 

오늘은 앞서 욥의 자기주장에 대해 소발은 질책한다. 먼저 욥이 말이 많은 사람으로, 자신의 정결과 순전함을 주장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결코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받을 수 없다고 하고 있다(2-4). 소발이 욥을 향해 말이 많은 사람이라고 한 것은 앞의 두 친구와의 변론에서 장황한 욥의 반론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즉 이러한 인식은 욥을 죄인이라 정죄하는 것으로 전해져 오는 지혜를 단서로 하고 있다.

 

솔로몬의 지혜서에서도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 하는 것과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전 5:3).” 하는 내용이 있듯이 말이다. 소발은 욥의 고난의 원인을 스스로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에서 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에 비해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여 욥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비난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직접 욥에게 말씀하심으로 그의 죄악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바라고, 그렇게 된다면 욥이 당하는 고난이 오히려 그의 죄보다 가벼운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5-6). 소발은 자신의 전통적 교리에 근거하여, 욥이 처한 상황이 악한 자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라 단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의 의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가증하고 악하다고 여겼다.

 

소발의 말들은 도무지 위로자의 것이라 하기 어렵다. 훈계도 없고 교훈도 없이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자로서 욥을 비난할 뿐이다. 저가 진정으로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것인가 싶다. 물론 욥의 변론이 자신의 기준으로 볼 때 그렇게도 어리석고 한심했던 모양이다. 소발은 자신의 편견에 사로잡혀 욥을 정죄할 따름이다. 이를 욥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자기 의를 주장하자 욥을 극악한 죄인으로 매도하고 있다. 심지어 그는 지금 욥의 재난이 욥의 죄에 비추어 너무 가볍다고까지 한다.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14).” 곧 욥이 이 지경인데, 당해도 싸다는 의미로 들린다. 소발의 직언은 잔인하기 그지없다.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12).” 이러한 권면과 충고는 아니 한만 못하다.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됐을 것을 저마다 보면 한 마다씩 거든다. 나름 옳은 말이라 해도 그것이 상대의 상처를 후비는 것이란 생각을 못한다. 소발은 다짜고짜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2).” 하는 말로 욥을 몰아붙인다.

 

그런 뒤 욥의 변론에 대해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3).” 하고 공격적이다. 원칙적으로 소발의 지적이 맞겠다. 지혜자의 교훈과 같이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렵다.’ 또한 ‘말이 많으면 적에게 문을 활짝 여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렇다고 하나 욥의 대부분의 말은 주 앞에 아뢰는 것이었고 힘에 겨워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말들이었다. 물론 친구들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다 보니 말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변명도 설명도 사실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그의 생이 억울하였던 다윗은 하나님께 아뢰었다.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포악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들은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 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나이다 (셀라)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

(시 140:4-6).

 

이제 와 보면 그러하였다. 가장 편히 이 말 저 말 못할 말 없이 가까웠던 사이가 가장 어려운 사이가 되었다. 나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도움을 구하였던 이가 돌아보면 가장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란 그와 같아서 은연중에 사람들은 점점 인격적인 관계가 아닌 비인격적인 관계로 그 시점을 옮겨 가는 것 같다. 사람보다는 짐승을, 짐승보다는 캐릭터 인형이나 모형들로… 우리의 관계가 점점 더 보이지 않는 벽으로 가로놓이는 것 같다.

 

누가 내게 백만 원만 빌려달라며 문자를 했다. 이런저런 어려움을 아는 터라 마음이 어려웠다. 어떤 의미에서는 겨우 백만 원일 뿐인데, 나로서는 어찌 감당이 안 되는 것이었다. 실질적으로 이처럼 돈이 걸리면 사람이 난감하고 민망해진다. 가뜩이나 추석을 쇠느라 아내에게 주는 사례비 50도 이번에는 아직 주지 못하고 있고, 한 달에 백만 원이면 교회 월세에 기타부대비용으로 그 정도인데, 늘 간신히 감당하게 하시는 터라…, 천만 원도 아니고 일억도 아니고 적다면 적은 금액일 백만 원을 두고 이런 상황을 설명하고,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기도뿐이라는 말로 답을 보내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디 누구에게 부탁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지금의 욥의 처지나 심정이 이러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오죽하니 나 같은 이에게 그런 문자를 했을까 싶어서 더욱 마음이 어려운데 그러니 단돈 5만원이라도 보내야 할까, 하는 생각으로 새벽에 일어나 내내 마음이 어려운 채 오늘 말씀 앞에 앉았다. 그리고 소발의 주장을 듣다보니 그의 되바라진 말들이 너무나 가혹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성경은 늘 이르시길,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하여 하고 싶은 말은 주께로 돌리는 훈련을 자주 한다.

 

아들에게 뭐라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이번에 딸애가 결혼까지 생각하면서 인사시키러 온 아이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나의 무기(?)는 말씀이라, 나는 말씀을 펴고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주의 말씀으로 전하였다. 누가 들으면 ‘어지간하다’ 하고 혀를 끌끌 차지만 나로서는 말의 특성을 잘 아는 터라, 더욱이 진지하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나는 기도하고, 이를 말보다 말씀으로 대신하여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대체한다. 나는 친구에게도 베드로와 요한의 심정으로 기도뿐이라, 그리 전하였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주가 이루시길…. 욥은 자신이 정결하여 하나님이 보실 때 깨끗하다고 말한 바가 없다.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9:2).” 하면서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별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였다. 다만 그가 두고두고 주장한 것은 과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일 수밖에 없지만 이같이 극한 징벌이 너무 크고 결정적이어서 여기에 의문을 품은 것뿐이다. 그런데 이를 듣다 오늘 소발은 욥의 말은 거두절미하고 자신이 완전한 의인임을 주장한다고 왜곡하는 것이다.

 

소발은 마치 욥의 말을 두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처럼 강박적이고 공격적으로 사람을 찌른다. 누구나 자신의 의도와 달리 자기가 한 말이 다르게 전해지면 그 상대에게는 큰 위험과 피해를 줄 수 있다. 그래서도 말은 될 수 있으면, 특히 남의 일에 대해서는 적은 게 좋다. 오늘날 서로의 말을 얼마나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공격적으로 피해를 가하고자 애쓰는 시대인가? 아무리 진영이 다르고 서로의 입장이 그러하다 해도… 사람들 속에 어느 때보다 화가 불의가 가득한 것 같다. 거짓에 거짓을 더하고, 걸리지 않으면 나쁜 게 아니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하긴 걸린다 해도 저마다의 망상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사는 시대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사탄은 본래 말을 비틀어서 왜곡하는 데 능하다(창 3:1-5). 그렇게 처음 사람을 속였다.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 유혹하였다(마 4:1-11). 오늘날 우리가 사탄의 역사를 보는 것이 거리에서나 여러 뉴스채널의 패널로 나오는 사람들의 인식과 그 굳어진 혀끝으로 알 수 있다. 저마다는 사탄의 하수인처럼, 이단자로 살면서 말씀을 왜곡하고 성도들과 사람들을 유혹하기에 여념이 없다. 다른 사람의 말을 왜곡하거나 곡해하여 전달하고, 실제 자신이 한 말도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정당화시키는 것이 현실이다. 이 모두는 사탄의 행위다. 하여 예수님은 이르시길,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

 

군더더기가 많은 말은 뭔가 그 속에 감추는 게 있다. 하여 시인은,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시 34:13).

 

하였고, 지혜자는 더하길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니라(잠 17:4).”

 

이를 오늘 우리 사회의 거울로 놓고 보면 들린다. 누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사 53:9).” 곧 우리는 오늘 누구와 함께 어떤 말에 귀를 기울이는지, 혹은 어떤 말을 하기 좋아하는지, 오늘 소발이 말하길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6).” 이 말에는 욥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가를 하나님께서 밝히 드러내 주시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결국 소발의 말은 읍이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이 가당치도 않다는 것을 입증하려 든다. 소발은 욥을 극악한 죄인으로 몰아붙인다. 그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려 하는 것처럼, 고발자로 행세하는 게 사탄 같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 3:1).” 이렇듯 사탄은 오늘도 우리 안에 또는 남의 일에 허물과 실수를 고발한다. 그러한 사탄은 오히려 하나님은 나무라신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2).”

 

즉 우리의 허물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같이 쓸모없는 것으로 정죄하나, 하여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3).”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4-5).”

 

곧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천대로 조롱을 당하나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러한 우리를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대언하신다. 나는 이 말씀을 알고부터 내가 할 말을 삼키고 굳이 해야 할 말이면 말씀으로 전한다. 이번에도 아이가 인사 온다고 했을 때, 여러 마음이 교차했다. 떨리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고,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마음은 어려워서… 나는 예배하였다.

 

누구에게도 나는 줄 게 기도뿐이라, 나의 미안하고 민망한 마음을 어찌 표현할 길이 없어서 새벽에 저의 문자를 보고 가만히 기도하였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내가 뭐라고… 누구에게 무슨 말로 위로든지 충고든지 할 수 있을까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1:7, 9:10).”

 

그러므로 오늘도 주를 바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나의 언사를 주 앞에 내려놓으며…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이를 더욱 붙듦으로,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시 120:1-2).

 

아무리 세상이 어떻다 해도, 주가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며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