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욥 13:15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 122:1
우리로 죄인인 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은 고난으로다. 즐거울 때나 기쁠 때는 이를 마치 개의치 않는 것처럼 생활한다. 그러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면 새삼 주를 찾게 된다. 고난의 의미는 그리하여 ‘축복의 통로’라는 찬양도 있다. 오늘 여기 욥의 절규가 가슴 저리게 한다.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23).” 고로 오늘의 이 고통으로 저는 구하며 더욱 단단하여진다. 그런 가운데,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5).”
하는 고백은 순간 멈추게 한다. 오늘의 고난이 나를 죽일지라도, 나는 이 고난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아뢰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이 가능한 것은 순전히 고난이 준 소망 때문이다. 나아마 사람 소발의 말이 그치고 욥의 변론이 이어지고 있다. 욥이 들나귀와 같이 지각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하여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소발이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것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기보다 구하고 아뢰어,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을 여기 욥은 보여준다.
욥은 자신도 하나님에 대해 저들이 아는 만큼은 안다고 항변하고 있고, 그 증거로 12장에 이어 친구들의 무가치한 변론에 대해 비관하여 하나님께 더욱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다.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점검하시나이다 나는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 먹은 의복 같으니이다(27-28).” 즉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친구들의 것보다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주 앞에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는 것으로 욥은 역설적이다. 그러면서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자신을 죽이신다 해도 자신은 주께 아뢰겠다’고 확신한다.
그런 점에서 친구들과의 언쟁은 더 이상 무의미한 일임을 피력한다(1-3). 이는 다음 단락에서 욥이 하나님과 직접 변론할 것을 희망하며, 이에 친구들과의 변론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짓이고, 쓸데없으며, 무가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4-6).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불의와 궤휼을 말하게 되면 그 둘 위에는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이 임하게 되리라고 경고한다(7-12). 특히 욥은 여기서 친구들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재판정에서 하나님이 마치 자기들을 변호하여 자신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될 것인 양 말하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한 행동이야말로 하나님의 존엄과 자유를 모독하는 일임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의 서두 부분에서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가 흔히 하는 ‘잔소리’를 바로 할 줄 알아야 하고, 바로 들을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2절에서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하고 반문하고 이는 앞서 12장 3절에서 “나도 너희 같이 생각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하였던 내용을 반복한다.
이는 결정적으로 저들이 착각하는 것으로, 우린 흔히 누구에게 잔소리할 때 그 상대가 나만 못하다는 기본적인 태도로 시작한다. 마치 자신만 아는 것으로, 그 깨달음을 알게 하려는 듯 말이다. 즉 저들 친구들의 공통된 생각 가운데 하나는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회복시키실 텐데 왜 그것을 못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문제를 자주 이야기할 때 이를 마치 자신만 확신하는 것으로 상대는 모를 것이라는 전제로 지적한다.
하지만 우리 자신도 그러하듯 몰라서 문제가 아니라 다 알면서도 아는데도 늘 같은 실수와 허물을 되풀이 하는 고질적인 죄의 습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늘 보면 우린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이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눅 6:41).” 이를 마치 못 견뎌하듯 자신은 온전한 줄 아는데,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42).”
오늘의 이 현실을 보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지혜이다. 뭐라 언성을 높이는 자들의 특징은 대체로 자신이 그런 점에 약하다. 그와 같은 허물이 있다. 자신이 잘 알기 때문에 더욱 더 상대의 허물과 실수에 민감하다. 예전에 아무개 누가 이혼을 했다. 어느 교회 목회자가 여신도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세간의 이목을 끌고 뉴스가 되어 지탄을 받을 때였다. 누구보다 저는 아주 몸서리치며 그 목사에 대해 힐난하였다. 서로가 그런 점에서 유난히 예민하게 된다는 말이다. 아이에게 뭐라 나무랄 때 한참 꾸중하다 보면 순간 내가 들어야 하는 말이 내게로 되돌아오는 것 같은 착각을 한다.
이처럼 욥의 친구들도 자신들의 죄의 문제로 하나님 앞에 풀리지 않는 것으로 욥을 비난하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의 잘못으로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잠 29:1).” 하여 이사야는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5-6).” 이는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런 가운데 오늘 욥의 놀라운 고백은 남다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5).” 이는 우리의 본질적인 죄의 속성으로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겔 12:2).” 그러므로 오늘 욥은 단언하길,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3).” 곧 이처럼 사람들과 변론하느니 하나님께 아뢰겠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를 권장하신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흔히 요즘 어른들이 ‘꼰대’란 소리를 듣는 게 상대가 젊다고, 어리다고, 자신이 먼저 살았다고 다 아는 것처럼 변론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뭘 알겠어?’ 하는 태도로, ‘나 때는 말이야!’ 하고 시작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상대를 변론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하고 이를 권장하시며 심지어는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즉 아무리 어리석고 한심하다해도 주가 상대하심을 다 듣고 그 상황을 헤아려주실 것을 보장한다. 그뿐인가?
“너는 나에게 기억이 나게 하라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 너는 말하여 네가 의로움을 나타내라(사 43:26).” 이는 참으로 하나님이 몰라서 하시는 소리가 아니라, 그와 같을지라도 괜찮다는 허용의 무한정한 자비하심을 보여준다. 또한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하고 우리 자신이 숨기고 감추고 거짓으로 꾸며 아닌 척 하고 사는 일에 대하여 그러지 말라고 하신다(40:27).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 56:10-11).
하는 시인의 고백이 오늘 여기 욥의 심정과 같다. 실제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아뢰어 하나님의 들으심을 입음으로 힘을 얻는다. 전능하신 이, 모든 삼라만상과 온 우주를 창조하신 이가 나의 말을 들으신다는 것보다 더 위로가 되고 놀라운 사실이 있을까? 가령 한 나라의 대통령이 모두가 외면하는 유가족을 찾아가 위로하고 저들을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데… 하다못해 이 부족한 사람이 누구의 말을 듣고 공감하여 같이 눈물을 흘릴 때 저가 위로를 얻는 것을.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렘 12:1).” 우린 주께 아뢰며 우리가 차마 묻지 못하였던 사실을 고하며 아뢸 때 우리 주님은 이를 더 바라시고 귀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 것 같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33:3).” 세상에 이런 위로와 새 힘이 어디 또 있을까?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렘 17:14).”
하면서 우리는 주 앞에 구한다. 할 말 못 할 말이 따로 없다. 주 앞이 아니면 누구에게 말할까? 누가 어떤 어려움을 겪으며 기도를 부탁하면서도 차마 그 속내를 다 말하지 못하는 것을 느꼈다. 물론 내가 다 듣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어서, 주께 아뢰어 고하기를… 우리 주님은 그 어떤 말이라도 그 속을 다 알아주신다는 사실을…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이 나이쯤 살아보니까 확실한 것은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전 5:3).” 사람 앞에 말을 많이 해서 나중에 그것이 해가 되면 됐지, 그러므로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10:14).” 이는 누구보다 말도 많고 지혜도 넘쳐서 오만가지 일과 사람에게 다 관여하고 살았던 솔로몬의 산 증거이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잠 17:28).”
생이 참 아이러니한 것은 잘한다고 하는 것도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어서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20).” 바울 사도의 여기까지 마음 쓰고 주의하였던 이유를 알겠다. 결국은,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시 7:9).
주가 아시면 되는 것을,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0-11).” 하여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20:12).”오직 주 앞에서 오직 말씀으로만 살게 하시기를.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시 10:4).
상대적으로 이러한 자들을 경계하면 된다. 그러할 때에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미 7:6-8).” 오늘의 이 현실에서 다소 흔한 현상으로 우리가 더욱 주를 바랄 수 있게 되는 것이어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시대가 점점 어둡고 삭막하다 해도,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곧 우리가 사람보고 하는 게 아니다. 내 곁의 아내와 가족을 사랑하는 일도 궁극적으로는 그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저를 더욱 사랑하고 이 가정과 교회를 위하는 일이어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하여 내가 주 앞에 설 때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시 22:6).
그러하나 오늘 욥은 그것을 알고 “너희의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가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12).” 이에 부탁한다.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닥치든지 내가 당하리라(13).” 하고 주 앞에서만 아뢰어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5).” 이 확신과 분명한 의지가 없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살 수 있을까? 하여 점점 더 바라는 한 가지 일,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 122:1)
나의 기쁨이 바뀌어서,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6-7).
내가 거하는 곳, 내가 영원히 거하게 될 곳에서,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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