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작은 것이냐 어찌하여 네 마음에 불만스러워하며 네 눈을 번뜩거리며 네 영이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며 네 입을 놀리느냐
욥 15:11-13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시 124:8
앞에서 한 차례 각각 세 친구들이 돌아가며 뭐라 하였고, 이에 욥이 답하였다. 27장까지 두 번 더 욥과 친구들은 이러한 논쟁을 하게 된다. 오늘 15장부터 17장까지 가장 연장자인 엘리바스의 두 번째 반박과 훈계가 이어지고 욥의 답변이 따른다. 먼저 엘리바스는 자기 의를 끝까지 주장하는 욥을 불경건한 자로 규정한다. 인간은 자기 의를 주장할 수 없는 근거로 인간 존재가 근원적으로 악하고 보편적으로 부패하였다고 강조한다.
이에 먼저 욥의 주장이 허황되고 무익하다고 비난한다.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을 그의 복부에 채우겠느냐 어찌 도움이 되지 아니하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 하고 되묻듯하고(2-3), 그러면서도 자기 의를 주장하는 욥을 거듭 정죄한다.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하느니라(4-6).”
결국은 자신과 그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경험과 지혜가 욥보다 못하지 않음을 꾸짖는다. “네가 아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깨달은 것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고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느니라(9-10).” 그러면서 결국은 자신들의 충고와 훈계를 욥이 가볍게 여겼음으로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내게서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이니 그들의 조상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였느니라(17-18).”
즉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주장하는 일이 어리석은 일임을 강조하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임을 역설하다, 결국은 엘리바스 특유의 자기가 이상 중에 체험한 계시를 전한 것과 같다. “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작은 것이냐 어찌하여 네 마음에 불만스러워하며 네 눈을 번뜩거리며 네 영이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며 네 입을 놀리느냐(11-13).”
결국은 저마다의 논조가 있고 그 기질과 사고방식이 다르지 않다. 곧 엘리바스의 논지에 발전이 없고 욥의 말을 전혀 듣지 않은 채 자신의 경험과 사고로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고 단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또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히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부패하여서 하나님 앞에 스스로 자기 의를 주장할 수 없었다. 칼빈도 인간의 절대적 타락을 강조하였고 이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만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성경은 언제나 이를 명백히 증거 한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두 가지 잘못된 인식을 보인다. 하나는 이러한 진리를 욥에게 잘못 적용 시키고 있다. 앞서 욥의 항변에서 한 번도 욥은 자기가 절대적으로 의로운 존재라는 것을 주장한 일이 없다. 다만 그는 친구들이 자기의 고난당함을 죄의 결과라고 주장하면서 정죄하는 것에 대해, 자신은 그러한 죄를 지은 일이 없음을 변명하였을 뿐이다. 두 번째 엘리바스의 잘못된 지적은 인간은 다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임을 강조하면서 정작 자신은 제외이고 거기서 벗어난 존재인 것처럼 특별하게 나타내었다. 즉 인간이 모두 절대적으로 악함은 욥이나 엘리바스나 다르지 않다.
스스로 자신은 좀 나은 듯 아니 그런 악한 존재에서 제외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 특유의 자기주장에 불과하다. 나는 요즘 뉴스를 보면서 사람들의 저마다 주장을 듣다 기겁을 한다. 어쩌면 저렇듯 자신들은 제외인 것처럼 상대를 정죄하고 공격하는지, 이는 진영을 떠나 우리 모두의 관점이 그러한 것을 느낀다. 그럴 때 소름이 돋는 것은 끝까지 거짓으로 거짓을 덮으며 자기주장에 함몰되었다가 증거가 드러났는데도 항변하다가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은 마치 그래도 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문제였다는 식의 항변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지적이 오늘 우리 모두를 꼼짝 못하게 한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절대적인 악함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눅 6:42).”
그러니 서로의 주장과 지적이 공허할 뿐이다. 문제는 또 이를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면서 떠들어대는 것이다. 이를 스스로들 잘 알면서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을 그의 복부에 채우겠느냐(욥 15:2).” 그렇다면 굳이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적하고 판단하고 꾸짖고 나무라는 것인데, 그게 다 외식함으로다. 겉으로 드러나는 자기 의 때문이다. 스스로의 만족이다. 자기 분에 겨워하는 소리밖에 안 된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18-20).”
가령 나는 요즘 아이들이 다 커서 뭐라 훈계하거나 내 의견을 말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소극적이다. 적극적으로 소극적이라고 하는 것은 뭐라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도로 삼키기도 한다. 자식만 해도 다들 나이 서른이 훌쩍 다 넘었다. 그러니 설령 어떤 의사나 행동이 마음에 안 들어서 감정이 상할 때도 그냥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거나 입을 다문다. 뭐라 하면 자칫 다툼이 되고, 서로의 감정만 상할 수 있다. 하물며 남에 대해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좋은 의도의 말도 듣는 이가 그리 여기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어느 학자가 자식 교육에 대해 자신이 사는 것을 보면서도 배우는 게 없다면 뭐라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였던 것처럼 내가 바로 사는 게 교훈이 되고 교육이 되게끔 스스로를 낮추어 주 앞에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 누가 예배를 같이 못 드리고 예배에 빠지고 할 때, 뭐라 꾸짖고 야단치며 바른 소릴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는 이처럼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 여기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이 우선이 된다. 더러는 나 역시 하기 싫을 때 ‘해야 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놓고 ‘억지로’라도 나를 그 앞에 앉힌다.
‘억지로’라는 말이 다소 부정적이지만 실제 우리 인간은 좋은 것, 편한 것,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가 우선한다. 아이의 결혼 이야기가 현실이 되면서 실제적인 돈 문제가 화두로 올랐다. 대학 등록금부터 모두 학자금 대출로 하여 혼자 해결하였던 아이는 10여 년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를 다 갚고, 이런저런 적금을 들어서 얼추 1억의 돈을 모았다. 그런 걸 보면 요즘 흔히 뉴스에서 나오는 몇 억의 돈을 누가 주고받고 하는 따위의 가벼움을 대수롭지 않은 듯 여기는 인간들이 위정자로 있는 것이 불행이다. 어떤 식으로 각자 그 큰돈과 재물을 얻었는지 알 수 없지만 돈 무서운 줄 모르고 사는 인간들은 엘리바스와 같이 항상 자신을 우위에 두고 특별하게 여긴다.
이런 세상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단호하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곧 ‘오직’이 붙은 말씀 앞에서는 일단 멈추어야 한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2-3).” 스스로의 판단과 기준에 함몰된 사람의 특징은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다들 저마다의 판단과 기준이 있고 그 척도가 있을 수 있으나 우리는 주의 말씀으로 중심에 두고 ‘오직’ 말씀 앞에서 삼가 자신을 주에게로 가까이 한다. 훗날에 엘리바스와 같은 이들 곧 욥의 친구들과 같은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꾸중을 듣고 화 내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욥 42:7).”
이는 그만큼 우리의 평소 마음이 강퍅하여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히 4:7-8).”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3:13).” 흔하게 서로 회피하는 ‘나중에’는 없을 수 있다. ‘내가 알아서 할게’ 한 것이 영영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여전히 청소년 자살률과 노인 자살률 1위라 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의 극단적인 선택이 그만큼의 생을 주신 이에 대한 존중이고 자백이 된다. 민족적인 기질인지, 신앙이 온통 무속에 물들어서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여전히 누가 극단적인 선택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그만큼 우리가 하나님을 헛되이 알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곧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5-6).”
점점 더 이 시대는 자기를 사랑하면서부터 스스로를 그렇듯 함부로 버리는 경향이 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하면 이러한 오늘의 현상과 사회와 사람들의 특징을 눈여겨보며 나 자신을 돌아보아 주 앞에 바로 서는 일이 중요하여서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4-6).”
오늘도 이처럼 욥에 대하여 엘리바스의 교훈(?)을 들으며 동시에 내 안에 여전한 엘리바스를 생각하게 된다. 누구의 어떤 일에 대하여 나는 또 얼마나 나의 판단과 기준과 남다른 경험을 위주로 속단하고 판단하길 잘 하는지… 그러므로 부디,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시 73:6-9).
세상이 그러하다 해도,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잠 16:8).” 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9).” 이는 결국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2).” 곧 우리가 하나님을 그만큼 의식하지 못하는 자로 살면 그 삶의 모든 기도도 가치도 열심도 헛될 뿐임 엘리바스의 주장에서 역설적으로 읽게 된다. 하여 저의 주장,
“그가 스스로 속아 허무한 것을 믿지 아니할 것은 허무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인즉 그의 가지가 푸르지 못하리니 포도 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짐 같고 감람 꽃이 곧 떨어짐 같으리라(욥 15:31-33).”
하는 말이 공허할 뿐이다. 우리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살고 있다. 이는 불가항력적이라 내가 싫고 좋고, 원하고 추구하여 얻는 것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우리로 그리 행하심이어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하여 오늘도 주 앞에 앉아 말씀으로 나를 채우며,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잠 14:15).”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하여,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1-2).
할 때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1-2).”
하신 말씀을 붙들고,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124:2, 6).
곧 오늘도 주가 보호하시나니,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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