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내 앞에서 증언하리이다
욥 16:8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 125:1
우리의 오늘이 증거가 된다. 어려움으로든지 기쁨으로든지,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살아계심을 알게 한다. 대부분은 어려운 일에 처하여서 이를 선명하게 느낀다. 즐겁고 기쁜 일에서는 저마나의 삶으로 적당하여서 잘 모른다. 그러다 뜻하지 않은 고통 중에 비로소 주의 이름을 부른다. 기도를 부탁할 때도 대부분은 그러할 때이다. 누가 스스로 우울증이라 할 때 나는 그리 느끼고 아는 것으로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하였다. 좀 어떠니? 하고 물을 때 저는 자신의 처지에서 하나님의 증거를 알 수 있다.
곧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내 앞에서 증언하리이다(욥 16:8).”
즉 우리의 곤고함으로 주 앞에 선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나로 주 없이 살 수 없는 것을 알게 한다. 엘리바스와의 두 번째 변론에서 욥이 답하고 있다. 여기서 욥은 친구들의 무정하고 무익한 변론에 대해 경멸한다. 자신의 고난으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한탄한다. 더는 사람을 바라지 않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만을 구하게 된다.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할 수 있는 기회다.
이 무익한 변론을 일삼는 친구들을 원망한다. 여기서 욥은 자신에 대한 동정심이 없는 친구들을 향하여,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2).” 하고 저들을 정의한다. 하며 고난당하는 자신을 위로하기는커녕 도리어 정죄하기에 급급한 데 대해 원망한다. 그리고 그들의 말은 공허하고 무익하다고 하고, 서로 입장이 바뀌었다면 자기는 그들을 위로하였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무정한 태도를 원망하고 있다.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4).”
우리가 흔히 누구의 일에 있어 쯧쯧, 하고 혀를 차며 뭐라 일컫는 것은 쉽다. 누구라도 남의 일에 그리 평가하고 비난할 수도 있다.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어쩌면 너무 당연하다는 듯 우리는 남의 일에 뭐라 말을 보태길 좋아한다. 심지어는 그 일의 원인과 결과를 속단하고 함부로 결정지어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욥은 여기서 자신으로 고난에 처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우선 인정한다. “이제 주께서 나를 피로하게 하시고 나의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나이다(7).” 궁극적으로 잘잘못을 떠나서 이러한 일의 원인과 결과는 주의 것임을 인정하였다.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내 앞에서 증언하리이다(8).”
먼저는 이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고,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가 되게 하신다.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은 이 일을 통하여 주께서 알게 하시고 일깨워서 돌아보게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음인데,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이를 대면한다. 그리고 내 앞에서 증언한다. 먼저 나로 곤고하게 하셨다는 것, ‘주께서 나를 곤고케 하시고’ 할 때, 이제 욥은 친구들-사람들에 대한 반박, 원망을 멈추고 그의 내밀한 고통을 토로한다. 이는 곧 욥이 그나마 호소할 데라고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우리로도 알게 하는 것이다.
“이제 주께서 나를 피로하게 하시고” 더하여 가까운 가족을 ‘황폐하게 하셨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욥의 가족들을 치심으로 멸망하게 하셨음을 나타낸다. “나의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의지하고 살았던 것들, 그 대상을 모두 하나님이 거두시는 것 같을 때, 다른 그 무엇으로도 위로가 될 수 없게 하심으로 오로지 내 앞에 하나님만 계심을 직면하게 된다(7). 그리하여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여기서 ‘시들게 하셨다’는 것은 뜯다, 일그러지다 하는 등의 뜻이다. 곧 ‘주름살지다’ 하는 의미로, 주름살이 만들어진다는 것으로 질병과 고난으로 온몸이 일그러지는 것을 뜻한다.
누구는 살림이 위태롭게 되고, 누군 우울증이 와서, 누구는 자식 일로… 이러한 ‘예기치 못한 슬픔’으로 우리의 주름살이 만들어진다. 곧 시름이 깊어지는 것이다. 하여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할 때, 병들고 고난당하는 것이 우리의 허물과 연약함에 대한 공정한 사실임을 인정하게 한다. 누구라도 예기치 못한 일은 닥친다. 나름은 이런저런 대비를 하고 철저하게 관리하여 잘 살았다고 살았는데도 징벌처럼 우리 앞에 이와 같은 일은 예고 없이 찾아든다.
곁길로 빠져 하나님을 멀리하는 큰 애를 두고 어느 사모님은 매일 새벽 눈물로 기도하였다. 저로 세상에 빠져 주와 멀어지기보다 주께로 돌아오게만 해달라고 말이다. 그렇게 십 수 년이 흘렀을까? 나이 서른 후반에 뜬금없이 위암이란 진단을 받고 주 앞에 엎드렸다. 사모님의 마음은 어미로서 찢어지게 아팠으나 그는 비로소 주 앞에서 감사가 나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둘째 딸이 안 믿는 가정에 안 믿는 자와 결혼을 하여 서서히 주를 멀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주일을 반드시 지키기로 약속하여 결혼하였으나 안 믿는 시댁이 또 부자라. 이런저런 교회 일에 도움도 받는 터라, 사모님은 선뜻 둘째를 놓고는 기도가 어렵다.
이렇듯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하는 오늘 욥의 고백을 듣다, 어느 사모님의 현재 상황을 생각하다, 우리 자신은 어떠한가? 하는 마음으로 되묻게 된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임하는 재난은 우리의 죄악을 증거한다. 따라서 욥은 이제 자신이 친구들에게 결백을 호소해 봐야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 탄식한다. 즉 우리 또한 우리의 어려움으로 남의 이해와 참여를 바랄 수는 없다. 다만 ‘대면하여 나의 죄를 증거하나이다’ 하는 우리 자신의 허물과 실수를 주 앞에 아뢸 뿐이다.
죽음을 비롯하여 모든 고난은 죄를 원인으로 한다. 처음 사람 아담 이래로 우리를 모두 ‘나의 죄를’ 직면해야 한다. 한사코 이를 외면하거나 부정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 더러는 더 열심히 성실하게 산다고 하지만, ‘대면하여 증거하나이다’ 하는 욥의 호소가 이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한다. 우리 자신의 슬픔이 말이나 침묵으로 진정되거나 완화될 수 없다. 다른 어떤 것으로 위로하고 잊고 산다고 해서 해소될 것도 아니다.
하여 지혜는 외치기를,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 13:14).” 고로 오늘의 어려움이 오히려 우리 영혼을 돌이켜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이라면,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15:4).” 곧 누구를 탓하고 어떤 일을 두고 내내 원망하는 패역한 마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억울한 심정으로는 우울하기만 하여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하는 마음을 사탄은 거듭하여 내 안에 두길 원한다. 그것으로 감사보다 원망을, 찬송보다는 한탄을 하게 한다.
하여 지혜는 더하여,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 25:11).” 곧 우리로 진리의 말씀을 바로 알고자 하는 마음이 값지었다. 그리하여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15:23-24).”
의당 원망과 불평의 소리가 나오게 되지만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신앙 안에서 연마한 언어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할 때, 우리 주님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1).” 이로써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부디, 그리 살자.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나에게 종종 내 자신도 들려준다. 아침에 이처럼 말씀으로 먼저 내 자신에게 선포하는 일은 말씀으로 선포하지 않으면 내 안에 ‘세 친구들’이 나를 정죄하기 일쑤다. 눈 뜨기 무섭게 걱정과 근심이 밀려오고, 자책과 억울함이 아우성친다. 어떤 원망도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 하여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욥 32:3).” 그와 같이 우리 안의 가장 큰 난제가 우리 자신이었다. 만족함이 없는 영혼으로는 날마다 숨 쉬듯 염려와 근심뿐이다.
“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고 그 중에 사는 자들이 정죄함을 당하였고 땅의 주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도다(사 24:6).”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산다고 하면서도 최소한 세상에 안 믿는 사람보다 더 깊은 한숨과 걱정으로 시달리는 것은 ‘남은 자가 적도다’ 이는 우리 영혼의 기력이 점점 쇠하여져 가는 증거다. 우리의 고난은 이를 증거하려고 오늘도 어려움을 직면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르시기를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7).” 그러니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차라리 안 믿는 살면서 당하는 일이면 오늘의 원망이나 불평이 어울리기라도 할 텐데….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나는 바울의 이와 같은 증거를 자주 음미한다. 오늘의 고난이 또한 염려와 근심이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를 다시 욥의 고백으로 되새기면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내 앞에서 증언하리이다(욥 16:8).” 곧 이 어려움이 나는 누구인지? 이럴 때 어떠해야 하는지?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떨어내야 하는지? 과연 나는 지금 무엇을 위로삼고 의지하며 살고 있는지? … 실제 성도의 어려움은 무수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답을 찾았을 때,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당장에 내 코가 석 자인데 우리 믿는 자들은 그런 처지에서 곁의 한 영혼으로 더불어 주의 이름을 부른다. 흔히 내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인 것 같은데 남의 일로 씨름하고 그와 같이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이런 일이 실제 가능하였다. 아주 가끔씩 나는 내게 의문이 든다. 지금 나 하나 건사하기 어려운 주제에 누가 누구를 위한다고 이러는가? 하고 피하려 하지만 그런 내게 주가 한 영혼을 보내시는 것이다. 저들로 내 앞에 세워 증거하시는 것이다. 나로 알게 하심이다.
그리하여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결국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으니,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그것이 나였고 우리 믿는 자의 사명이었다. 이를 위해 여기 두심이다. 하여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그렇게 전심으로 주를 바라게 하시려고, 오직 주만을 신뢰하게 하시기까지, 오늘도 우리로 우리를 시들게 하여 이를 증거삼아 직면하게 하시는 것이다. 할 때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이를 이루어지게 하심으로 내가 주의 사랑으로 모든 죄에서 속죄함을 받은 것을 알게 하신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그리하여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4-5).” 이 놀라운 구원의 과정을 오늘 이 어려움, 고통 가운데서 우리들로 하여금 마주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오늘 욥은 또 하나를 깨닫는다. “그가 나를 치고 다시 치며 용사 같이 내게 달려드시니 내가 굵은 베를 꿰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욥 16:14-17).” 그렇게 나의 어려움으로 나를 치고, 다시 치며 용사 같이 내게 달려드시는 하나님의 강권하심에서 우린 우리 스스로 모면하려 했던 노력과 스스로의 자부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진정한 울음으로 주 앞에 엎드리고, 죽음의 그늘까지 곁에 머물렀음을 알게 된다. 상황은 그리 험악한데,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즉 이를 악 물고 주먹을 쥐고 내가 하려 온 힘을 다하던 것을 풀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기도가 정결하여 지는 것은 오직 주만으로 주를 바라고 간구하게 되는 것일 텐데, 여기까지 인도하심은,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그것으로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오늘의 이 말씀으로 진정 오늘의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비참하고 부끄러운 게 아니라, 도리어 “내 앞에서 증언하리이다.” 곧 나는 누구인가? 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 125:1).
단순하게 오늘의 문제가 전부가 아니었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2).
오늘 이 일은 영원을 위한 것으로, 영원히 있을 주의 사랑으로,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3-4).
그리하여,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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