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하현. 2025. 10. 17. 05:40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

욥 18:2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 127:1

 

 

두 번째로 엘리바스의 말에 욥이 답하고, 이어 빌닷이 말한다. 이처럼 21장까지 욥과 그 친구들 간의 2차 논쟁이 기록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친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점과 그 주장에 유념하는 것은 저 세 사람의 시선과 태도가 고스란히 내 안의 속성으로도 유사하여서 그렇다. 그런 가운데 일일이 답하며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욥을 더욱 주시하는 것은 그 또한 내가 배워야 하면서 동시에 다투어야 할 내 안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앞서(15-17장) 엘리바스와 욥의 논쟁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욥의 태도가 더욱 간절하였고, 이는 엘리바스의 권면과 충고가 정죄함으로 찌르는 것이어서 그렇다. 다 맞는 말 같으나 다 모순되고 자가당착에 빠진 말들이 충고가 될 수는 없다. 이러한 가운데 뒤이어 빌닷의 변론은 전반부터 자신들의 조언을 거부하는 욥을 향해 감정적으로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3-4).”

 

하는 데서 이미 충고나 권면을 넘어선 감정적이고 공격적인 것을 느낄 수 있다. 빌닷은 욥이 자기를 변호하기 위해 헛된 말을 계속 지어내고 있다고 비난한다.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2).” 즉 자신들의 선의의 조언을 묵살하고 친구들을 짐승과 더러운 자로 취급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다(3). 그러면서 욥이 하나님을 향해 아뢰는 것을 지적한다.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적대시 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16:9).”

 

즉 16장 9절에서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찢고 적대시하신다고 말한 것이다. 이를 반박하며 빌닷은 욥이 자신의 삶을 찢는 것이라며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18:4). 곧 말이란 이처럼 감정이 같이 따르고, 앞서기도 하여서 서로의 말이 길어지면 의당 우리 안의 격한 감정이 올라오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도 나는 누구에게든지 묵상하고 이를 글로 쓸 것과 기도하며 이를 글로 쓸 것과 자기 안의 어떤 말을 말로 길게 하기보다 글로 쓸 것을 권한다. 글쓰기는 감정보다 이성이 작동하고, 한 번 더 여과하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장치가 있다. 표현을 고르고 문장으로 다듬는 가운데 그런 작업이 이루어진다.

 

앞서도 그렇고 뒤로 이어지면서 그렇지만 욥과 그 친구들의 말과 말 사이에서 점점 감정의 지배를 받고 그러다 소위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도 다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도 오늘 빌닷의 감정이 격앙되어 격렬하여진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욥이 자신들의 변론을 무지한 자의 말로 취급하였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권하는 회개의 촉구를 거절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말은 듣는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도 전달된다. 격한 말과 부드러운 말은 그 표정이 다르듯 표현이 다르다. 강조하고 했던 말 또 하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말의 한계를 보여준다.

 

극단적인 감정적 언사를 하려고 저들이 찾아온 게 아니다. 고통 중에 있는 친구를 위로하고 같이 그 슬픔을 나누려던 것이다. 우리는 이를 글로 읽고 들으면서 욥의 고난에는 하나님의 깊으신 목적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저들은 이를 말로만 듣고 보면서 오직 접근하는 통로가 인과응보적인 차원으로 이해하면서 욥을 정죄하게 되는 것이다. ‘대화의 기술’에서 상대의 하는 말을 듣기만 할 게 아니라 보고, 읽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저런 말을 하는 저의 심정과 그 사정을 살펴야 한다. 모든 일과 그 일의 말 속의 말에는 하나님의 관여하심이 있고, 인정하고 시작해야 감정에 끌려가지 않는다.

 

곧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해하는 영적 이해력이 부족할 때 우리는 아무리 많은 지혜와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해도 자칫 사탄의 관점으로 그의 방식을 따라 감정이 요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가령 누구와 대화할 때 저가 아프다는 것, 심령이 상한 가운데 있다는 것, 실제 정신적으로도 정신과적으로 약을 먹고 있다는 것을 자주 인정하고 명심해야 한다. 어쩌다보면 저의 말을 듣거나 저에게 말을 하다 격앙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답답해하고 화를 내서 해결되는 게 아니다. 이는 사탄이 바라는 바로 결국은 ‘내가 옳다’는 게 말의 흐름이다. 자기 생각을 주장하다 싸움이 난다.

 

하여,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사 47:10).”사람의 말과 말의 한계는 서로의 말이 서로를 유혹하듯 마음을 격분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11).” 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증거가 같은 맥락이다.

 

예리미야 선지자도 말하길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렘 8:9).” 곧 우리의 이러한 상태가 ‘여호와의 말을 버려서 그렇다.’ 말씀의 지혜가 없이는 말이 헛됨을 상기시킨다. 해서 지혜자는 이르길, “곧 작고 인구가 많지 아니한 어떤 성읍에 큰 왕이 와서 그것을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그것이라 그러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전 9:14-16).”

 

결국 우리의 한계는 은연중에 그의 배경과 학벌과 권세와 힘을 의식하고 그것에 따라 우리의 귀가 열리거나 닫히는 것이다. 당시 예수님이 가말리엘 사원에서 바울과 같이 수련하고, 명문의 집안에서 자라 그 부모의 배경도 있는 가운데 천국 복음을 전하였다면 어땠을까? 동방박사 세 사람이 별을 보고 메시아께 경배하러 오다 헤롯 왕궁으로 간 이유도 그런 것 아닌가? 오늘 날 우리 사회도 대통령이 노동자 출신에 검정고시를 한 자와 그 부친이 비록 독재자였다 해도 대통령의 딸과 감사출신의 사람으로는 첫 인식부터 다른 것이다. 선입견이 그렇게 무섭다. 나의 짧은 소견으로 전 세계가 퇴보하는 문화를 겪는 것은 극 보수 세력이 많은 나라를 지배하는 가운데 저들은 그 힘과 권위와 사회적인 전통과 위신이 판단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교회마저 이미 그러한지 오래인데,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 2:1).” 실제 우린 이와 같은 틀에 붙들려서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2-4).”

 

은근히 교회 안의 차별도 유난스럽다. 친구 아버님이 어느 오래 된 교회의 원로 장로이셨다 돌아가셨는데 워낙에 가난한 형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늘 밀리듯 재력 있고 학벌 좋은 장로들에게 밀려 그런 자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교회를 쥐락펴락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친구 부친은 한 아들을 목사로 키우고 두 아들을 장로로 세워 그 가족이 주 앞에 영광되었는데, 잘났다는 장로들의 자제는 사업을 하네, 어디 무슨 대기업을 다니네, 하였으나 교회와는 먼 삶을 살았다. 독특한 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상 우리 안을 들여다보면 교회 안의 차별과 무시가 사회 못지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외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누가 우울해하며 힘들어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실은 나름의 열심으로 뒤늦게 박사까지 되어 나름은 봉사도 가고, 사회에 일조하며 이를 주의 거룩한 일로 여겼는데… 생각처럼 하나님은 일을 잘 풀어주지 않으셨고 돌아보면 처녀 때 하던 일로 도로 그 자리인 게 되어서 그렇다. 이는 나 혼자 생각한 일이다. 저에게 말로 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본다는 일, 욥의 상황에서 친구들이 자신들을 돌아보았으면 어땠을까? 또는 욥의 경우에도 저들의 격앙된 말이나 충고를 들으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더 낮추어서 돌보았으면 어땠을까? 우리로서는 쉽지 않다. 선입견이나 편견이 그래서 무섭다. 속단하고 비난하는 일은 마치 총구를 겨누다 방아쇠를 당기는 일과 같다. 하여 예수님은 이르시길,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4).”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고후 10:10-11).”

 

사람의 판단과 기준이 얼마나 모순되어 그 한계가 어리석은가? 오늘 욥기서를 읽으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것으로도 갑갑한 심정이 든다.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네가 희망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보고 평안히 쉬리라(11:17-18).” 이는 소발의 말이었다. “사자의 우는 소리와 젊은 사자의 소리가 그치고 어린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사자는 사냥한 것이 없어 죽어 가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4:10-11).” 이는 엘리바스의 말이었고, 오늘 빌닷은 “밑으로 그의 뿌리가 마르고 위로는 그의 가지가 시들 것이며… 그는 그의 백성 가운데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을 것이며 그가 거하던 곳에는 남은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18:16, 19).” 이러한 비난은 욥을 짐승처럼 여기고 부정한 자로 매도하는 것으로 책망이라 할 수도 없다.

 

우린 그저 보이는 게 전부인 줄 안다. 흔히 여론조사로 민심을 가늠하는데 나는 이보다 어리석은 것도 없다고 본다. 마치 쓸려 다니는 안개 같다. 잔뜩 짙은 것으로 더는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인 줄 알았는데, 금세 또 해가 뜨기 무섭게 사라졌다. 서로의 판단이 뜬구름 잡는 짓들 같다. 너무 무정하고 야속하다. 같은 민족은커녕 원수도 이런 원수가 없을 것 같다. 저런 이가 어찌 판사였고, 검사였고, 무슨 학자였고 교사였을까 싶은 인물들이 국회에서 꿱꿱거리며 다니는 오리 떼 같다. 서로를 짐승 취급하는 세상에서 교회 역시 부화뇌동하여 영적인 판단이 흐려진 지 오래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 이는 성경의 관점이다.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잠 12:1).” 이는 오늘 날 사악한 세계의 특징이기도 하여서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계 13:4).” 하는 말씀이 오늘 우리의 현상을 적나라하게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 49:20).

 

그야말로 짐승의 세계와 다를 바 없는 ‘동물의 왕국’을 살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 멸망하는 짐승과 같이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도 오늘 우리는 말씀 앞에 앉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주의 뜻을 구한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그런 세상에서 영적으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도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 2:11).” 이를 경계함으로 근신하고 깨어, 말을 삼가고 어느 진영논리나 정치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도 나는 의식적으로 누구와도 정치 이야기를 피한다. 그 말의 결국은 서로 감정만 상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설령 분이 날 수 있다 해도 이는 피해야 하지 견주어 싸울 게 아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31-32).” 오늘 여기 욥과 그 친구들의 말과 말 사이에서 오가는 감정의 요동과 그에 따른 막말의 실체가 그러해서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6).”

 

그러므로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시 37:25-26).

 

믿는 자로 사는 자의 삶이란 고요하고 평안하여서,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5).” 지금이 다가 아니다. 아직 우리는 가야 할 길이 있고, 주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일은 거듭되면서 심화될 것이다. 하여, 빌닷의 말처럼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욥 18:21).” 하는 것을 자신에게 적용할 때,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 127:1).

 

하는 오늘 시편의 지혜가 일갈한다. 그리하여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2).

 

세상이 아무리 요지경이고 우리 사회가 극심한 대립과 혼란 중이라 해도, 우리는 평안하다. 딸 셋과 아내를 한 날 한 시에 잃고도,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나 영혼 평안해.’ 하는 찬송이 가능한 것은,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3-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