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
욥 20:1-3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시 129:4-5
나아마 사람 소발이 초조한 마음으로 대답한다. 스스로 자기 중심이 조급함을 알린다. 이는 욥을 위한 마음처럼 느껴지지만 욥의 말과 태도에서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타나는 태도이다. 하여 자신을 스스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 하면서 오늘 본문의 말을 더한다. 이를 보면서 그럴듯한 선하고 의로운 말들이 참된 진리와 뒤섞여 같은 말로 여겨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엘리바스나 빌닷의 변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장하는 내용은 ‘악인은 멸망한다’는 것이다. 이 세 사람의 주장은 같은 말을 되풀이하듯 한다. 이 땅의 주관적인 진리인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틀을 맴돈다.
오늘 소발은 1차 변론에서도 악인은 모두 징계를 받으며 따라서 징계를 받는 자는 모두 악인이라는 논리를 이어간다. 이는 고난당하고 있는 욥이 죄인이라, 그의 악함으로 고난이 따른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내용은 모두가 옳은 말들뿐이다. 악인의 번영은 일시적이며 궁극적으로는 멸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 한때 번영하였던 욥이 한 순간에 몰락하게 된 것이 다 그가 악인인 것을 입증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이 세상의 악에 대한 관점이다.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4-5).”
이는 반박할 수 없는 사실과 같다. 해가 뜨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소발의 변론은 전반적으로 악인의 허무한 멸망에 대하여 강조한다. 그러면서 앞서 자신을 무자비하다고 비난하며 심판을 경고했던 욥의 말에 극도로 흥분하여 변론을 시작하였다. 즉 소발은 욥의 책망에 수긍할 수 없었다. 이어 소발은 악인의 번영은 일시적이며 궁극적으로는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을 주장한다(4-11). 특별히 본문에서 악인의 번영이 지극히 일시적인 것이고 허무한 것으로 ‘똥, 꿈, 환상’으로 비유하여 강조하였다.
이를 보면서 그것이 진리인 양 행동하는 소발의 오만함을 보게 된다. 자기 생각과 주관에 매여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소발뿐 아니라 욥의 두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에게서도 나타난다. 궁극적으로 이는 우리의 기본적인 속성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도 동일하게 교회 안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우리의 기준과 가치관이 이와 같아서, ‘내 생각에는’ 하고 시작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일상의 원칙과 상식을 기준으로 판단하려 든다. 흔히 상식은 우리가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데 상식이란 말 그대로 우리가 판단하고 수용하는 평균의 값이다. 그 너머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데 있어 이보다 걸림돌은 없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상식적인 선에서 알 수 있거나 이해할 수 없다. 그리하여 성경은 ‘믿음으로’ 우리의 보는 눈이 새로운 사람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곧 우리는 ‘상식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한다. 상식적으로는 노아가 홀로 그 시대에 홍수 심판을 대비하여 방주를 지을 수 없었다. 상식으로는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인 우르를 떠나서는 안 되었다. 상식적으로는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하겠다고 막대기와 물맷돌을 들고 뛰쳐나가서는 안 되었다. 상식적으로는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 죽으실 수 없는 일이었다.
성경은 숱한 믿음의 영웅들이 바로 이 상식을 벗어버리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는 것이고, 이는 성경의 기본원리가 된다. 상식으로가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 곧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하는 일들이 가능하였다(33-35).
심지어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36-38).” 결과적으로 믿음으로 행하는 자들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고, 상식적으로는 남득이 가지 않았다. 곧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믿음이란 이처럼 때로는 허무맹랑하여서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이것이 구약의 온전한 신앙의 주류이다. 미약하나 그러하여서 선과 악으로 구분하려는 세상에서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 1:12).” 고로 오늘 우리를 위로하는 것도 믿음으로다. 곧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7).”
하여 이 의는 차별이 없는 것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그렇게 우리의 인식과 상식을 뒤엎고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30).” 즉 이를 바탕으로 하여 바울은 설교할 때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4).” 하여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한 믿음 안에서 주를 바라게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갈 3:26, 엡 2:8).” 결코 오늘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 얻어진 게 아니라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3:12).” 하여 이방에 세운 에베소 교회를 향해 설교하였던 것이다.
오늘에도 상식에 위배되는 믿음에 대하여 세상으로부터 이해를 구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살후 1:4).” 곧 온전히 주 앞에 주만 바라며, 말씀으로 믿음으로만 바로 서고자 할 때 그에 따른 배척은 큰 교회로 또는 부흥하는 교회로 성장하는 길을 가로막기도 한다. 사람들의 관점은 점점 더 ‘상식적으로’를 적용하여 동조세력으로 그 힘을 모으는 데 급급하나,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 우리를 향하신 보호하심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을 알아야 한다.
어쩌다 교회가 세상의 진영논리에 휩쓸리고 심지어는 그러는 정치논리에 덩달아서 휘말려서 ‘보수’라는 이름으로 한 사람, 목사의 권세와 권위가 교회의 크기나 교인의 숫자로 가늠되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런 시점으로는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와 소발과 빌닷의 논리대로 많은 사람의 의의 관점이 그러하여, 믿는 자나 안 믿는 자의 공통된 화두가 악인은 벌을 받고 의인을 복을 받는다는 식으로 하나 되는 게 옳은 관점인지, 욥기서는 우리에게 문제를 던진다.
분명히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이는 우리가 옳다 여기는 것으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당대에도 예수를 못 받으라 외쳤고, 이에 오늘 소발과 같이 스스로의 판단에 대한 자부심을 자존심으로 지키며 이를 신념으로 여겨 “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욥 20:2).” 결국 저의 함정은 스스로의 초조한 마음과 조바심이었다.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큰 교회가 점점 커지는 것에 나는 문득씩 두려움을 느낀다.
속한 교단에서 인터뷰를 했으면 했었다. 그러면 우리처럼 어렵고 미자립교회로서는 후원의 손길부터 전도효과도 있어서 좋을 것이란 권유를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다르지 않은 관점으로는 그와 같이 인위적인 수평이동을 주의한다.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 다니는 성도들이나… 요즘은 온갖 콘텐츠로 교회마다 예배를 상영하여서 굳이 다니지 않아도 되는 교회 생활이 가능해졌다. 물론 지역적인 한계나 보다 다양한(?) 말씀을 접할 수 있는 기회로 여길 수 있어 긍정적인 측면도 있겠으나…. 모르겠다, 나로서는 오라고 해서 각자 섬기는 교회를 이동하는 것에 조심스럽다.
진정으로 말씀의 역사는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행 17:11-13).”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 않던 자들을 상대하는 일이, 잘 알고 잘 믿고 살았다고 여기는 자들을 흡수하는 일보다 귀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마 15:9-10).” 이는 성령으로밖에 답이 없다. 사람으로는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자칫 세상의 상식으로 접근하여 믿음으로의 공식을 깨기 십상이다. 하여 나는 정치적 논쟁과 종교적 논쟁은 하나마나 한 시대라고 여긴다. 이미 그 싸움의 칼빈과 그 이전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로 치러졌고 모든 게 정립되어, 우리에게는 완성된 성경이 있다. 세상은 언제나 거짓이 진실 같이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하신 예수님의 때부터 오늘에도 여전하게 각종 특혜와 자긍함으로 자신의 안위를 도모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말씀 앞에서 신속함이란 결정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의 문제다. 심사숙고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으로의 상식을 초월하는 데서이다. 현재의 신설한 신앙은 우리의 내세의 삶으로 연결된다. 오늘 소발은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욥 20:5, 16).” 하는 죄의 결과론적인 사실은 맞는 말이지만 이로써 욥을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하는 믿음으로만이 이와 같이 실용적이고 상식적인 것으로 하나 되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굳건하게 설 수 있겠다. 그리하여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4).” 하여서 오늘 소발의 주장은 옳으나 그릇되고, 바른 말 같으나 그 상대를 겨누는 총구 같아서 결과가 어떠하든지 저의 처음 관점과 그 시작이 자신의 감정을 기반으로 하여서 바르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욥 20:1-2).” 어찌 이런 가운데 전하는 것을 복음으로 들을 수 있겠나?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우리의 실상은 그러하여서 풍요 속의 빈곤 같이 수많은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온전히 주를 바라기란 쉽지 않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0-24).” 결국은 새 사람으로의 진리와 삶이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남들에게 충분히 존경 받고 당대에 높임을 받을 수 이었던 종교지도자로서의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저는 어찌 그런 것일까? 이는 영의 본성을 따르는 삶이란 당장 지금의 이 땅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육신의 소욕을 매일 또 매순간 싸워서 이겨야 하는 문제였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오늘 소발과 같이 누구라도 감히 자신의 조급함으로나 초조함으로는 주의 일을 이루어갈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오늘 날에도 여전히 ‘상식’과 ‘믿음’의 싸움이다. 이때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3-5).” 이를 명심하면서 오늘 소발의 옳은데 허무하고, 바른 말인데 공허할 뿐인 진리 앞에서,
…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시 129:1-4).
그리하여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6-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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