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하현. 2025. 10. 20. 05:30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

욥 21:14-15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시 130:3-4

 

 

적당히 믿거나 세상과 타협하듯 사는 자들의 삶이 윤택하다. 이를 두고 성경은 악인이라 하는데, 악한 행함으로 악인이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음으로도 악인이 있다. 후자는 선하고 의롭기도 하여 세상에서 여러 방식의 존경과 위엄도 가지고 산다. 이를 시편에서 시인은 놀라움을 관찰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아삽의 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시 73:4-9).

 

이러한 모습은 여러 역사의 증거뿐 아니라 오늘 날 우리 현실에서의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하다. 하여 오늘 욥의 표현 가운데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14-15).” 하는 부분과 같이,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12-15).

 

하는 부분의 내용으로도 같다. 이와 같은 원리와 그 속성을 우리가 어찌 이해할까? 누가 봐도 악행을 저지르며 사는 악인이 있고 누가 봐도 선을 행하며 사는 악인도 있으니, 때론 저 둘을 같다 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다르다고 하기도 애매하다. 교회도 적당히 다니면서 사회에서 안 믿는 자들과도 좋은 관계로 사는 저들로서는 죽기 살기로 주만 바라며 사는 신앙을 옳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내 곁의 몇몇 사람들도 적당히 믿으면서도 적당히 안 믿는 자들과도 잘 어울려서 하는 일이 잘 되고 만사형통이란 게 저런 것일까? 싶을 정도로 뭘 해도 잘 되는 것 같다. 하여 의아한 시선으로 저들을 보는데,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24-28).

 

하는 시편의 시선이 나를 붙든다. 앞서 욥은 소발의 변론을 듣고 이에 답하면서 말한다. “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2).” 하고 저들을 조용히 시킨다. 주목하게 하고,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7-8).” 하면서 세상의 이치와 논리를 이상히 여긴다.

 

먼저는 우리의 나쁜 습성에 대하여,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이는 시대와 교육의 차이가 아니라 사람이 본래 그러하다. 상대의 사정과 형편을 듣거나 인정하기보다 자신들의 주장과 할 말로 제압하고 싶어 한다. 서로가 그러다 보니 문득 화가 또 자기 분이 치밀어 성내게 되는데,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20).” 그러므로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 이는 다른 방법은 없고,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17:27).” 주를 경외함으로 가능하였다.

 

주를 경외함은 주께 맡김으로 나의 짐을 내려놓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할 때 굳이 안 해도 될 말에 대해 입을 다물기도 한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다. 사람을 신뢰하는 일에서도 그리하여 여러 장치를 세우는 것이다. 보증을 세우고 담보를 잡기도 한다. 계약을 맺어서 법적 틀에 가두기도 한다. 하물며 하나님에 대해서는 우리의 믿음이 어떠하겠나? 욥도 자신이 생각해도 그렇고, 친구들이 볼 때도 놀랄 정도로 급작스런 몰락과 고통이라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할지 조급하다. “나의 원망이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이냐 내 마음이 어찌 조급하지 아니하겠느냐(4).”

 

눈으로 보이는 친구들에게도 그러한데 하나님께는 어찌 이를 증명할 수 있을까? 지금 자신의 인생 중에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것 같은 순간이 있다. 자신에게 어쩌다 이런 재앙이 임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사실도 있다. 자신은 나름 순결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다. 악을 떠난 삶을 살려고 하였다. 그렇게 시인은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들 일을 두고,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 73:1-3).

 

보면 아주 가끔은 그리하여 불공평하신 것 같고, 억울하기도 한 것이어서 때로는 마음이 어려워질 때도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나님을 믿고 주를 바라며 살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며 전에 누가 그리 의구심을 가지고 말하였다. 나름은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사는데, 그리 살았던 날의 보상이 오히려 궁핍과 어처구니없는 어려움으로 시련을 겪는 일이어서… 가까운 이는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보면서 ‘그래서 교회 다니지 않는다!’고 하면서 별로 부럽지가 않다는 둥 비웃기도 하였던 모양이다.

 

나야 이제 가까운 이들은 물론 친구도 떠나고 오직 주를 바랄 뿐인데, 의로운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였는데 오히려 재앙이 도래하기도 하는 것이어서…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30:26).” 하는 욥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이러한 상황은 누구라도 이해하기 어렵다. 더욱이 어느 때보다 ‘상식과 실용’이 강조되는 세상을 살면서, 상식적으로나 실용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바랄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성경은,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느 9:2).”

 

우리가 믿음을 지키며 사는 일이란 이처럼 더러는 단절을 각오해야 한다. 실제 믿음이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하여 아브라함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1-2).” 하는 말씀만 붙들고 일어섰던 길이다. 그러니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그러므로 우리의 확신이란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1-12).” 하는 바울의 증언과 같이 우리 믿는 자들은 저마다 그러하지 아니한가? 그러니 더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다 알 수 없는 게 당연하여서,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0-11).”

 

바로 알 수 없는 영역 위에서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9-10).” 지금은 다 알 수 없어 말씀으로 묵상하여 부분적으로 알고 바라나 그때가 오면 알 것이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오직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라 해도 이를 들고 말씀 앞에 서는 일이라,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2-3).”

 

고로 내가 오늘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하고 세상의 이치 또한 고작 이 정도뿐이라 해도,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잠 13:22).” 하여 주가 이루시는 일에서 나는 다만 주를 신뢰하게 된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이가 그 무엇으로 이 모든 날에 복에 복을 더하시는 줄을 안다. 곧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28:18).” 주가 이루신다. 나의 삶은 그러하였고 그러는 동안 주가 동행하셨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2-3).”

 

그런 정도의 사람이기는 하나 그러므로 이를 인정하면서 주 앞에 이처럼 날마다 엎드리는 일, 그러할 때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8-11).” 가장 필요하고 선한 것으로 주시리니,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롬 11:25).”

 

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롬 11:33-34).”

 

고로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오늘 욥은 이를 안타까워하였고 친구들에게 이와 같은 우리의 한계와 하나님의 무궁하심을 알리면서,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안전하며 평안하고 그의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의 골수는 윤택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죽으므로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도다(욥 21:23-25).” 겉으로는 불공평한 세상 같아서 누구는 평생을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로 살다가고, 누구는 일생동안 자색옷을 입고 넘치는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사는 듯하여 복되다하겠으나, 욥의 깨달음은 “이 둘이 매 한 가지로 흙 속에 눕고 그들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26).”

 

그리하여 이것으로 끝이라면 억울할지도 모르겠으나 이를 두고 누가 감히 판단하고 스스로 잘 안다고 하겠는가? “누가 능히 그의 면전에서 그의 길을 알려 주며 누가 그의 소행을 보응하랴…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헛되이 위로하려느냐 너희 대답은 거짓일 뿐이니라(31, 34).” 하는 욥의 항변 속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의뢰함이 있다.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13).” 그런 가운데도 말하기를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14).”

 

우리의 어리석음을 밝히면서,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 73:16-17).

 

그러므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묵상하면서,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130:1).

 

더러는 생이 너무 어렵고 힘에 겨워 나의 깊음을 어찌 다 아뢸까, 하는 마음으로,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2).

 

주께 바라는 것이었으니,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5).

 

이는 얼마나 간절한지,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6-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