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하현. 2025. 10. 21. 06:03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욥 22:21-22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1

 

 

얼핏 들으면 다 맞는 말 같다. 뭐라 반박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하고 연장자 엘리바스가 권면한다.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하고 욥을 향해 외친다(21-22). 그러나 자세히 들으면 그 의미가 다른 시각인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29).” 하는 말 속에 오류가 있다. 사람들이 낮추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낮추신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논리 속에서 오류를 나타낸다. “죄 없는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30).”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말함인데 조건처럼 겸손과 깨끗함을 요구하고 그러할 때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이 있을 것이라 한다. 이에 비해 오늘 시편의 찬송을 묵상하면 그 의미가 다르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1).

 

이로써 주의 절대적인 긍휼과 은총으로 그 품에 안기는 어린아이로 묘사한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2).

 

곧 엘리바스의 주장처럼 내가 겸손하고 손이 깨끗하여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오늘 본문은 27장까지 세 번째의 변론이 또 돌아간다. 앞서 14장까지 1차 논쟁이 있었고, 15-21장까지 2차 논쟁이 있었다면 다시 또 3차로 오늘 22장부터 27장까지 도돌이표처럼 다시 시작한다.

 

먼저는 엘리바스이다. 오늘은 전반부터 의도적으로 욥의 악행을 추정하여 각각의 사례를 제시한다. 욥의 고난이 그와 같은 악행의 결과임을 강조한다. 거의 비난에 가깝다. 앞서 하나님의 절대성을 강조함하면서(1-3) 욥이 인과응보에 의해 현실적으로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곧 욥이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한 데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엘리바스의 요지는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로 어떤 유익을 얻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어떤 소득을 얻는 것도 아니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공평하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유익을 위해 인간을 벌하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 한다.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하고 묻는 데서 엘리바스가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함을 단적으로 느끼게 된다(4). 곧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와 배치되는 진리로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사 48:9).” 곧 우리의 모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 그 이름의 영광을 결코 헛되이 두지 않으신다.

 

하여 솔로몬을 세우실 때도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3).” 즉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자리에 오르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심을 솔로몬도 알았고 그 말씀을 따라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 하오니” 하며 순종하였다(왕상 5:5).

 

상대적으로 위대하였던 다윗에게 이르시길,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대상 22:8).” 하고 저의 마음과 그 수고를 막으시기도 했다. 곧 솔로몬에게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지라 그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어 그 나라 왕위를 이스라엘 위에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니(대상 22:10).”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다윗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전쟁을 많이 한 사람이라 피를 많이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28:3).”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달리 행하였었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나라들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겔 20:14).”

 

하시며 이 모든 일의 주체와 주관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말 1:11).” 이를 성경은 분명히 알게 하신다. 이에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6)” 우리가 오늘도 주의 길을 가는 데 있어 따라오는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서도 주를 알리신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7).”

 

이 모든 게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심인데, 이보다 더 값지고 소중하고 확실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3).” 우리가 훗날 주 앞에 섰을 때 주가 인정하시며 귀히 여겨주심도 바로 주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며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두고 이루신다. 이에 오늘 엘리바스로서는 욥의 고난이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란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오히려 기복적인 신앙에서 욥의 범죄로 인하여 저의 부유하였던 삶과 그 신분이 낮아졌음을 강조한다. 즉 욥이 가난한 자로부터 재물을 착취하고, 굶주린 자와 나그네를 외면하였고, 부정한 방법으로 토지를 획득하였고, 고아와 과부 등 힘 없는 사람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이는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오늘 당하는 욥의 고난의 결과가 그러해야 정당하는 엘리바스의 논리에 따른 것이다.

 

성경은 얼핏 보면 우린 그와 같은 논리로 기복적인 신앙에 빠질 수 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5-16).”

 

마치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무슨 유익이 되어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의 유익이 되고 그에 따른 자부심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는 것처럼 읽힌다. 그런 관점으로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주장으로 이 복음을 기복적으로 접근하게도 한다. 그러나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일 텐데,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곧 이와 같이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데서 우리는 기복신앙을 떨쳐내야 한다.

 

오히려 우리가 이와 같이 진리를 알 때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고로 복음의 전제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께로 향한 것이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게 아니다. 하여 오늘도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하여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서 우리의 참된 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데서 바울이 전하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말씀으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4).” 하는 말씀과 오늘 엘리바스의 관점이 어디서 어떻게 다른지 선별할 수 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데 있어 우리의 신앙을 이 땅의 승패로 가름하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좋은 일이 있어 축하할 때면 주께 받은 복으로 기뻐하며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려고 하지만 남다른 어려움과 실패를 당했을 때면 무슨 죄 때문에 벌을 받는가? 하는 지극히 이차원적인 접근으로 자신은 물론 타인을 어지럽게 하기도 한다. 이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나님이 그리하심을 강조한다.

 

하여,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우리가 선을 행함도 주의 이름을 나타내고자함이고 설령 고통과 어려움을 당할 때도 이로 인하여 주의 뜻이 온전하여지기를 바라는 것이 마땅하였다. 그렇게 해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1-2).”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게 주의 이름을 나타냄으로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인데,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이와 같이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6, 14).” 고로 우리의 존재 이유는 자명하다. 엘리바스의 관점으로는 이와 같은 복음의 깊이를 알 수 없다. 인과응보니 기복적인 신앙으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 수 없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시 11:4).

 

이에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감찰하심인데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 곧 우리의 오늘 이 땅에서의 삶의 전제는 전적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반으로 한다. 이 땅에서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이나 생사화복(生死禍福)이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대해 이 땅의 일로 그치거나 그것을 전제로 하나님의 사랑을 측량하고 가늠해서는 안 된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단 2:22).”

 

오늘의 어려움 가운데 주가 더하시고자 하는 은혜가 무엇인지, 오늘의 기쁘고 즐거운 일이 더해질 때 이로써 우리가 찬송해야 할 은혜가 어떤 것인지,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우리가 그리함은 이 너머 주의 안식과 평안이 있는 저 천국을 사모함이니,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5-8).”

 

고로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9).” 이는 주와 함께 누릴 영원한 나라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요즘은 현저하게 육신의 질병이 괴롭게 하고 마음도 어려워서 어떤 두려움과 우울감이 나를 짓누르기도 하는데, 그런 가운데 주를 바람이란… 주가 나로 이 모든 여정에서 주의 나라에서 주의 백성으로 온전하게 살게 하시고자 함인 것을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 3:10-11).” 내 안에서 울려나는 엘리바스의 질타와 어떤 의구심과 두려움을 접어두고,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에 오늘도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고,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하여,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1).

 

이는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주께 의지하며, 오직 주만 바람으로,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2).

 

이와 같은 평안함으로 오늘도,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