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하현. 2025. 10. 22. 06:24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욥 23:2-3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시 132:7

 

 

매일 동네를 한 바퀴씩 산책을 하는데, 생이 영혼을 지배할 때 사는 일에서 악다구니한다. 아파트 곁길로 나와 초등학교 앞을 지나면서 허름한 동네는 재건축을 바라는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낡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도 나무들은 자라고 사람들의 손길이 닿은 초목들은 단정하다. 그런 가운데 담벼락에는 서로의 진영에 따라 주장하는 바가 다른 내용이 사람들을 선동한다. 재건축 위원회도 둘 셋으로 갈려 각각의 모임과 총회내용을 알린다.

 

그 사이에서도 아이들의 하교 길은 왁자지껄해져 한바탕 소동이 인다. 어디 태권도 차가 두어 대 각각 대기하다 아이들을 태우고, 저학년 아이들 엄마들은 하나둘 아이들이 나오자 활짝 웃으며 가방과 신주머니를 대신 받아든다. 가끔씩 아이들 학교 길에 걸리면 한동안 나는 넋을 놓고 서 있다가 온다.

 

한 블록건너 재래시장 쪽으로 길을 잡으면 사는 게 죄다 고되다. 좌판에 이것저것 내놓은 물건들부터 사람들의 왁자한 소리도 뒤편의 학교 앞과는 다른 풍경이다. 상태가 좋은 날은 시장 안쪽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가게 구경을 하기도 한다. 수입구제품 시장부터 과일가게, 생선가게, 떡집, 기름집, 고깃집, 야채, 잡화, 옷가게… 가게마다 가격표를 붙인 손 글씨들이 뒤뚱거리듯 물건들 앞에 매겨져 있고, 오가던 사람들의 흥정이 들려오기도 한다.

 

그렇게 시장 안쪽으로 해서 한 바퀴 돌듯이 다시 도로변으로 나오면, 횡단보도마다 요즘은 부쩍 홍보하는 전단지와 함께 물티슈, 건빵, 사탕 등을 건넨다. 새로 개업한 병원들과 이단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그렇게 돌면 차고 있는 시계가 7, 8천보 정도 뜬다. 늘 들러 카페라떼를 한 잔 사서 아내와 둘이 나눠 먹으며 돌아온다.

 

한 시간 남짓 매일 이처럼 순례의 길을 걷는다. 걸으면서 어제는 엘리바스의 말을 되새겼다가 오늘은 욥의 말을 되새기고, 곁에서 아내는 딸애의 결혼이야기가 현실이 되면서 부쩍 말이 많아졌다. 현실이 되면 사랑도 지겨울 때가 있다, 아직은 낭만적으로만 사랑을 해라. 엊그제 주일 저녁에 교회로 나오기 전, 딸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말이 목에 걸렸는지 며칠째 되새길 때면 마음이 울컥해지기도 한다. 사는 게 더러는 힘에 겨울 때도 있어서 각자 저마다의 육신을 이끌고 사느라 다들 참 고생이 많다. 하루에 만 보를 채우는 일이 나에게는 극히 힘든 일이라, 그래도 비가 오지 않으면 거의 매일 나의 일과는 일정하여 엇비슷한 사람들과 그 모습이 같은 듯도 하다.

 

오늘은 말씀을 읽고, 가만히 되새기다 글쓰기로 나의 일상이 먼저 나왔다. 아마도 그것은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2-3).” 하는 욥의 탄식에 목에 걸린 듯 그 심정을 헤아리다 그리 된 것 같다.

 

저의 심정을 알 것 같다고 하기에는 그 탄식이 너무 무겁고, 그럼에도 같은 동질감을 느끼는 것은 요즘 들어 부쩍 진통주사를 맞으러 병원에를 자주 간다. 어제도 교회로 나와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다 여기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걷다보니 괜찮은 듯하여 돌아와서 간단하게 고구마 하나를 먹고 진통제를 먹었다.

 

오늘은 욥의 탄식 때문인가? 자꾸 곁길로 빠지듯 내 이야기로 가져오게 된다.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하는 절규와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하는 간절함이 그러하여 마음이 무거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늘 경추 5번, 목 주위로 통증을 느낀다. 자판을 치는 오른 팔 어깨가 무겁게 찌른다. 양 무릎과 허리는 늘 그러하다.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하고 나 역시 묻게 된다. 여기서 욥의 심정은 절절하여서,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8-9).” 하는 심정이 눈물겨워 나도 울컥 한다.

 

더러는 나의 하루가 그러한가 싶다가도 아흔 살의 장모의 하루도 그러하겠거니… 쌀쌀해진 길거리에 좌판을 벌이고 앉아 나물을 다듬는 노인의 주름 짙은 손등도 그러하다. 악다구니 치며 상품을 알리는 사람들의 목청도 그러하고, 길거리에서 이것저것 홍보물을 나눠주며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한나절을 보내는 사람의 손길도 그러하다. 우리가 사는 일이란 모두가 그와 같은데,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10).” 나는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오늘을 사명으로 살고 있는지?

 

‘오늘도’ 하는 표현은 ‘지금도’ 또는 ‘항상’을 뜻하는 표현으로, 욥은 친구들과 여러 날 계속되는 대화 속에서 길을 걷는 나의 시선처럼 ‘심지어 지금까지도’ 하는 표현이다. 늘 같은 날 같으나 다른 풍경이고, 같은 사람이 같은 일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서로의 ‘오늘도’ 자연스럽다. 사는 일이란 ‘혹독하여서 원망스러운 듯하나’ 다들 또 여기저기 힘든 육신을 이끌고, 저마다의 사연은 가슴에 묻어둔 채 손님을 끌기 위해 소리치거나 손에 건네며 ‘지금도’ 그렇게 산다. 인생을 ‘혹독하다’ 할 때, 히브리어의 뜻은 ‘맛이 쓴’, ‘독한’ 등의 뜻이다. 이는 다 하나님께 반항하며 생겨난 일로 모두의 ‘오늘도’ 다르지 않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그러는 동안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17).” 이것이 죄로 쫓겨난 생에 남겨진 과업이라, 히브리어의 ‘독한’, ‘쓴’이란 뜻으로 알 수 있다. 결국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하다.’ 우리가 받는 재앙은 히브리어로 ‘나의 손’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내가 산책을 하면서 늘 보는 저마다의 나의 손이 그렇듯 바삐 산다고 사는 것일 텐데, 의역하여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임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이라 한다. 즉 ‘나의 신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곧 오늘 우리의 삶이란 ‘나의 형벌은 나의 결함보다 훨씬 무겁다.’ 욥의 말은 과장인 듯 사실이다. 이렇게 앉아 말씀을 묵상하고 글로 쓰면서 나는 하루의 상태를 점검하듯 몸을 뒤틀기도 한다. 의자에 앉은 몸이 유독 무거운 날도 있고, 손을 드는 일조차 힘들어서 글을 쓰기 어려워서 어깨가 호소하는 날도 있다. 이에 오늘 욥처럼 하나님께 나는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우리는 저마다 하나님 앞에서 탄식보다 무거운 외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누구는 곧 가게를 넘겨야 할 판이고, 누군 다시 우울증이 도져서 힘들다. 그럴 때 우리의 외마디는,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3).”

 

하는 오늘 욥의 심정이 아닐까? 사랑이 지겨울 때도 있는 것처럼 현실은 모든 게 왁자지껄한 시장 한 가운데 같다. 그리하여 주의 나라를 더욱 사모하는 것일 텐데, 나의 주된 관심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 사정을 해결 받으려는 것이다. 욥은 자신의 결백함을 하나님 앞에서 확신하였다.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임을 믿기 때문이다. 나의 선행으로나 믿음으로는 감히 그 앞에 설 수 없으나 하나님의 의와 긍휼하심으로,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

(시 89:14-15).

 

하여,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11-12).” 하고 주 앞에서 주의 인자하심에 호소한다. 그러므로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13-14).”

 

나는 산책을 하며 걷는 동안 이 생각 저 생각 온갖 생각이 드나드는 것을 눈으로 보는 여러 세상의 풍경으로 이해한다. 그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고로 오늘은 광야이면서 동시에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방의 것들을 정복해야 하면서도 고단한 한 날의 오늘도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오늘도’ 우리 생의 한 날은 나를 낮추심이니, 그때에…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시 143:10-12).

 

곧 오늘의 이 모든 과정으로 ‘오늘도’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그러므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3, 4).” 오늘 우리가 겪는 시련은 세상이 겪는 삶의 엉겅퀴와는 다르다. 성도의 신앙을 담금질하고 정제하는 시간으로 오늘 우리의 시간은 연마의 시간들이고, 그리하여 베드로는 말히길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

 

하여,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곧 우리에게 저마다의 ‘오늘도’ 그러하여서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이를 두고 시인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시 119:71-72).

 

그러므로 오늘도 이처럼 말씀 앞에 앉히며 새벽을 깨우는 것이었으니,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그렇게 더 ‘오늘도’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가 계신 처소를 사모함이었다. 그러하여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4).” 결국 오늘을 사는 동안에 우리 믿는 자들은 같은 ‘오늘도’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를 그리워하며,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주의 인자하심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사

내게 주의 율례들을 가르치소서

(시 119:123-124).

 

오늘은 독감예방접종을 해야 하는데 진통제를 맞아도 되는 것인지, 오늘도 견딜만할 것인지, 나는 이처럼 묵상글을 쓰면서도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사는 일이 고단할 뿐이어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 6:26-27).” 사는 게 곧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로 안도하게 되면서 나는 이 말씀이 귀하게 다가온다.

 

하여,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러하다면 단지 사는 데 따른 생의 악다구니 소리에 영혼의 귀가 닫히지 않기를. 육의 양식을 귀하게 여기는 것 이상으로 우리 영혼의 양식을 귀히 알고 이를 부지런히 따라 살 때,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하여 오늘도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그와 같이 나의 하루도 주의 날을 소망하며,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말씀으로 말씀 앞에 앉혀,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

(시 132:7-9).

 

할 때에,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13-14).

 

그러므로 주가 이루실 것이라,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위하여

등을 준비하였도다

(1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