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그들은 잠깐 동안 높아졌다가 천대를 받을 것이며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되리라
욥 24:23-24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하나님의 작정’을 우린 알 수 없다. 모르면 모를수록 두려움이 크다. 욥은 이에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23:8-9).” 하고 하나님을 찾을 때 찾을 수 없는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런 가운데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3:15).” 하는 놀라운 고백을 했던 것처럼, 두려우나 두렵기만 하지 않은 것은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
이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는 믿음에서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23:16-17).” 비록 사방을 가눌 수 없어 때로는 두려울 때도 있지만 앞날에 대한 두려움을 표명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굳건하였다. 욥은 결국 하나님의 방관이 하나님의 작정하심의 하나이고, 그런 가운데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출처가 악으로 인한 것이라 하는 친구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자신의 결백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삶에 있어 알 수 없는 고난에 대한 의문과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탄식하지만 그러한 현실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실현되고 있음을 인정한다.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24:1)” 하는 의문으로 말하면서도, ‘시기를 정하지 않으신 데 대한 의문’이 의심이 아니라, 이를 알 수 없는 우리의 한계를 탄식하는 것이다. 여기서 ‘시기’는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언제 시행될까? 하는 것이다. 곧 그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악의 끝은 알고 있어서, “어두운 곳을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의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으로 그가 불려가리라(15:30).”
즉 악인은 악을 떠나지 못한다. 죄와 죄악은 다르다.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알 수 없는 지경이고, 죄악은 그에 따른 우리의 연약함의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바울이 탄식하였던 것도 결국은 이러한 죄의 결과를 두고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11).” 이는 율법 곧 말씀으로 비춰서 나의 죄 된 모습의 실체를 알 수 있음이다. 그렇다고 말씀이 악한가? 하고 되물으며,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13).” 곧 우리가 알아야 우리 자신의 죄악 됨을 인정하는 데서 주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15).” 하여 이를 통탄이 여겨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6-17).” 하여 오늘도 이처럼 말씀 앞에 앉는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주 앞에 나를 인정하게 된다.
이처럼 오늘 욥도 악인을 위해 준비해 둔 형벌의 날이 있어, “하나님은 그의 죄악을 그의 자손들을 위하여 쌓아 두시며 그에게 갚으실 것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1:19).” 이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작정은 선명하게 알 수 없지만 오늘 욥은 엘리바스와 그 친구들에게 답하면서, 악인에게 곧장 심판이 임하지 않는 사실로 인해 자신도 의문이란 생각을 털어놓는다. 즉 악인들이 더욱 기세등등하게 활보하고 다니는 것이 이상하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신실하게 생활하는 자들이 낙심하여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 또한 상대적으로 이상하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이 편파적이고 비일관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선 우리는 상식적으로 이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는 누구는 내가 곁에서 봐도 열심이었다. 교회 청년들을 맡아 지도하면서 가령 식사를 한 끼 대접할 때도 흔히 식당에 같이 가면 될 텐데, 집으로 초대해서 손수 차리고 치우고 하느라 주일 저녁을 다 보내기도 했다. 그것은 청년들 가운데 지방에서 올라와 혼자 생활하거나 외국에서 오래 있다 온 청년들도 있어서 신경 써서 일부러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또는 부부 집사들끼리 모임이 있는데 이들은 꼭 자신들 차례가 되면 여느 식당에서 한 끼 같이 하는 정도로 올바른 교제라 생각하지 않는다. 해서 이들 부부는 다들 꺼려하나 자신들 집으로 초대해서 집 밥으로 대접하고 같이 소모임을 갖고는 했다. 이것이 저들로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임이라 여겼다.
또 누구는 교회에서 보조하던 중국에 선교사 가족이 있는데 저들이 공안에 의해 쫓겨난 일이 있다. 부랴부랴 한국으로 왔으나 당장 기거할 곳이 없자 자신들 빈방을 내주고 며칠 같이 생활을 했다. 심지어 어린 자녀가 셋이라 선교사에게 자신들이 타는 SUV 중형차를 명의변경 해주었다. 저들이 지방 어디 소도시의 먼 친척 집 근처로 가게 되면서는 자신과 그 주변의 협력으로 비록 집에서 잘 안 쓰는 가전제품과 옷이며 숟가락까지 알뜰하게 챙겨 한 트럭에 실려서 같이 보냈다.
이렇듯 저들은 욥과 같이 평소에 ‘그런 생각으로’ 의를 행하고 살았다. 그렇게 교회를 섬기며 신앙을 실천하며 산다고 살았는데… 신랑 집사는 자꾸 직장에서 말썽이 생겨 이직이 잦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늘 열심을 다해 공부도 하고 생활도 하여 학위도 따고 나름의 목표와 꿈이 있었다. 저들의 지론은 하나님을 바로 믿는다는 일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좋은 결과로 남에게 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다 어떤 어려움이 찾아오면 의아했다. 갑자기 천재소리 듣는 아이가 난독(難讀)에 시달리기를 벌써 1년이 넘었다. 그러는 사이 자신은 일터도 잃고, 계획하던 교수 자리도 어렵게 되고, 몸은 어디가 자꾸 아프고….
우울증이 찾아온다며 기도를 부탁한 게 얼마 전이다. 오늘 욥의 이야기에서 저들 부부의 신앙과 생활을 같이 돌아보게 된 것도 그런 이유다. 욥은 현재로서는 이해할 길이 없는 <하나님의 작정>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에는 그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즉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은 보응의 원칙으로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따라 적용된다는 것을 오늘 저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강포한 자들을 끌어내시나니 일어나는 자는 있어도 살아남을 확신은 없으리라(24:22).” 앞서 간음하는 자, 살인하는 자, 어둠을 다니는 자들 곧 범죄하는 자들에 대해 열거하고,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강포한 자들을 끌어내시나니’ 저들의 실체가 어떠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다. 오늘 사회의 일련의 사건과 수사 결과를 보다보면 아, 저렇게까지 증거가 나오자 그간 왜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했는지…모든 사람의 거짓말의 실체를 알고 놀라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욥의 탄식이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해서가 아니다. 단순히 친구들의 지탄과 비난에 변명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가 언젠가는, 반드시, 완전하게, 설명되고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욥은 왜 하나님께서 당장 공의를 실현하시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오늘 여러 뉴스를 보면서도 그런 의문을 지울 수 없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이 계획하고 계신 뜻이 있음을 다시 또 확인하게 된다. 이에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우리 안에 어떤 의문이 생기고 안 풀리는 이해와 상식을 두고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을 하나님은 일부러 알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그러므로 누구는 주를 의심하나, 오늘도 이처럼 말씀으로 묵상하여 주 앞에 더 깊은 시간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이를 위하여,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하시는 데 우선은 하나님의 뜻이 계시다. 왜 범죄자들이 그러한가 하고 저들의 특징을 살피면 그것으로 결국 하나님이 저들의 실체를 밝히고자 하심이고, 이로써 드러나는 실체로 온갖 감언이설로 저들을 두둔하거나 자신들의 죄를 은폐하였던 이들로 항복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신 19:14).” 하심은 곧 우리가 믿음대로 생각할 수 있는 범위가 따로 있기도 하다.
하여 바울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렇게 지혜자는 권고하기를,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지나치게’라 함은 스스로 옳다 여기는 정도로 자신이 생각하는 것으로 어떤 기준 곧 ‘네 이웃의 경계표’를 좌다, 우다, 하며 감 놔라 배 놔라 하기 일쑤인데 그러는 게 지나치다. 그것으로 자신을 바로 하면 좋을 텐데, 자기 눈의 들보는 아랑곳하지 않는 법이라,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우리의 답은 하나님을 경외함이다.
하나님만 믿음으로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알 때,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 12:15, 20).” 우리가 추구하고 사는 현실의 선과 의가 얼마나 파편적이고 편파적이기까지 한지를… 이처럼 말씀을 깊이 알고자 할 때 주가 열어보이심으로 현재의 우리로서는 한정되었다. 그러므로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잠 1:19).”
결국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까지도 어떤 이익을 탐하는 마음으로이면 이는 참 불경스럽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엡 5:3).”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드려지는 삶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2).” 하여 우리도 이와 같이,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5-17).”
하여 우리는 오직 주만 바라보고,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오늘 시편은 우리로 성전으로 향하는 순례자로 각지에 흩어져 살고,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을 통해 하나로 묶여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의 연합과 우애를 아름답게 표현하는데,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2).
우리는 모두 기름부음 받은 자들로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적 공동체 전원으로 동일한 축복에 참여하는 사실을 일깨운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8-12).”
이와 같이 서로 다른 것 같으나 하나로, 헐몬 곧 시온으로 비록 겉으로는 낮고 보잘것없게 보이나 특별히 성별(聖別)하신 곳으로, 다른 어떤 곳보다 귀하고 복되다 하심은 ‘거기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는 복으로 내려져 명령된다. 즉 시온에서 우리의 화합의 축복된 열매를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곳을 모든 축복과 모든 생명의 중심지로 정하셨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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