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욥 25:5-6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4:1
욥과 그 친구들의 세 번째 말들이 오간다. 엘리바스에 이어 빌닷의 말이 짧고 극명하게 종결된다. 세 친구는 지혜의 말을 전승에 근거하여 현세적으로 설명되었다. 인과응보라는 일차원적인 시각으로 고난은 곧 죄의 결과로 주장된다. 저들의 논쟁은 세 차례에 걸쳐서 돌다가 끝이 난다.
오늘 빌닷은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주장한다.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2, 4).” 먼저는 ‘하나님은 권능 곧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주권은 ‘지배하다’, ‘다스리다’란 뜻이다. 하나님의 통치권과 권능을 의미한다. 위엄은 ‘놀람’, ‘두려움’으로 그 뜻이 집약된다. 곧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에 대해 모든 피조물은 두려워하며 복종하는 것이 당연함을 묘사한 것이라 하겠다.
그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하였는데, ‘높은 곳’은 하나님이 거주하는 장소로 하늘을 가리킨다. 이는 욥이 표현한 것으로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의 전능자께서 주시는 기업이 무엇이겠느냐(16:19, 31:2).” 이 높은 곳은 동시에 ‘천상의 존재들’이 거주하는 곳을 의미한다.
그곳에서 ‘화평을 베푸셨다’고 하는데, 이 말에 대해서는 창조의 시초에 세워진 질서로 일반은총을 생각하게 된다. 곧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 2:5-6).” 할 때부터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7).” 하여 비로소 아담이 생겨나고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8).”
하여,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하시던 때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9-30).” 이렇듯 자연의 순리와 순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곧 천체의 모든 질서가 확립된 것이다.
앞서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대항하여 일어난 천상의 세력들이 있었고 이를 진압하셨다. 이를 욥은 증언하길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깨뜨리시며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시나니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26:12-14).”
시편에서도,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시 82:1).
이사야 선지자의 증언으로도,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사 14:12-14).” 할 때에,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 같이 모이게 되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라(24:21-22).”
이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있었던 일로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엡 3:10).” 오늘을 살면서 우리로서도 우리가 상대하는 것이 단순히 오늘 날의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2).”
이들은 ‘높은 곳’에서 쫓겨난 것들로 공중에 권세 잡았으니, 그들의 최후는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계 12:10, 18:1).”
여기서 오늘 빌닷은 천상의 존재들마저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하물며 이 땅의 존재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어지럽힐 수 있겠느냐? 하고 강변하는 것이다. 이는 특히 이 땅에서 불의가 창궐하는 것에 대해 욥의 탄식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같다(24:1-17). 그러니 하나님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하고 묻는다. 그의 군대는 하나님의 만군으로,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단 7:10).” 하는 것 같이 하늘의 수많은 영들과 천군 천사들을 가리킨다. 더 넓게는 모든 피조물들을 포함한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 곧 하나님의 모든 군대는 그의 명령에 순종한다. 그의 평화적 통치에 봉사한다. 그들의 수효를 인간이 계수할 수 없다. “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계 9:16).” 곧
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시 68:17).
빌닷은 이 천군 천사들이 곧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의 표징임을 알면 하찮은 인간이야 하나님과 변론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 광명의 비췸을 입지 않은 자가 누구냐?’ 하고 물음으로 ‘광명’을 ‘태양 빛’으로 이해하여 태양 빛에 비추이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하나님의 빛이 누구를 능가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으로 그의 빛이 그 어떤 빛보다 밝지 아니한가? 하는 의미다. 이 빛은 초자연적 은혜의 빛으로,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시 106:2-5).
하는 시편의 찬송으로도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겠냐?’ 하는 감탄과 자조적인 물음이 당연하다. “내가 보니 그 허리 위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내가 보니 그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7-28).” 곧 이와 같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주장하고 스스로 의롭다 할 수 있겠나?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앞에서, 빌닷은 욥의 변론 일체를 ‘하나님 앞에서’ 아예 무가치하다고 단정짓고 있는 것이다. 그렇듯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여’ 자신이 의를 나타낼 수 있겠나? 우리의 도덕적 의는 세상 법정에서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정도로 그친다. 앞서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할 때 ‘가령’을 붙여 가정하였고, 예를 든 것이다.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9:15, 20).”
그뿐 아니라,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내 눈이 보기 때문이니이다…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10:15, 13:18, 33:12).” 하는 내용으로 볼 때 욥은 자신을 스스로 의롭게 정의롭다 하는 내용이 아닌데, 빌닷은 욥의 주장을 듣다 공격을 위한 공격을 하기 위해, 사람은 의롭다고 칭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이 권리가 하나님께만 속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하였다고 본 것이다.
말이 그 어떤 폭력보다 폭력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말의 품격도 사뭇 시대에 따라 가벼워진지 오래고, 요즘은 줄임말이 터무니없어 그 자체로 경망스럽기 일쑤다. 그뿐 아니라 초성만 따서 적는 식의 자기표현도 단순히 의도를 떠나 말의 깊이를 상실하게 한다. 특히 요즘 국정감사에서 오가는 말과 말의 수준을 보면 뭐라 이 시대의 말의 품격을 논하기가 민망스럽다. 말은 그 절제와 함의가 생명인데,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히 8:1-2).”
성경을 말씀이라 하여, 우리가 이 말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하신 것을 명심하여,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 하심은 곧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즉 말은 생각을 담고 마음의 표현이라, 오가는 말 속에 그 사람의 생각과 생활과 마음이 그대로 전달된다. 가령 어제도 여느 날과 같이 산책을 하다 전화를 받았다. 아주 오랜만에 온 오래 된 친구의 전화였다. 여전히 바삐 살고 있었고, 서로는 그간 소원했던 사이 가정이나 가족들의 일과 자신의 일에 대해 한참을 말이 오갔다. 평소처럼 시장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였으니 거의 어제의 산책은 그와의 말들로 채워졌다. 그러는 사이 아내는 앞서 가서 시장에 들러 야채도 사고, 만두도 사서 옆을 나란히 걸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주 만나며 왕래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말과 말로 전달되는 근황과 그 사정을 상상하고 듣는 정도로 전부였다.
말이란 이처럼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넘어서는 높고 원대한 세계를 품고 있다. 그 한 사람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지는 게 말의 세계다. 오늘 빌닷의 말에서 짧고 간결하나 다소 무의미할 정도로 지당한 말이어서 아쉬움이 남기도 하다. 엘리바스와 소발과 빌닷의 말이 틀린 게 없고 그 이치와 관점이 그르지 않아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그 주권을 인정하는데 미진할 뿐이다. 그만큼 상투적이고 요식적인 말들이었다. 하긴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19-20).”
그러다 보니 더러는 옳은 말이 지겹고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들 줄임말이나 것도 모자라 초성이나 이모티콘으로 말을 대신하려드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어쩌면 오늘 이 빌닷의 말과 같이 긴 말이 필요 없을지도… 스스로 인간을 벌레로나 규정하면서,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욥 25:5-6).”
이는 욥의 말을 되돌려주는 함의다.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무덤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구더기에게 너는 내 어머니, 내 자매라 할지라도 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7:5, 17:14-15).” 하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생기’를 빼면 저들 짐승이나 미물과 다를 게 무엇이겠나? 그만큼 인생을 벌레에 비유한 욥의 고통 중에서, 빌닷은 ‘악인이 흥하고 의인이 고통 받는 이유를 묻고 있는 욥에게’ 짧지만 굵게 말을 더한 것이다. 그러니 참 말이 더러는 무겁고 무섭다.
우리 인생의 깊은 밤에 더는 길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을 때에,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4:1-2).
오늘도 천성을 향해 가는 기독도의 발길로 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가장 복된 것은 주를 송축함이었으니, 인생이라는 밤에 저마다의 골방 곧 주의 성소에서 손을 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란,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우리 안의 노여움은 거두고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기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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