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다 행하셨도다

하현. 2025. 10. 25. 05:44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욥 26:6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시 135:4-6

 

 

빌닷의 말에 욥이 답한다. 서로가 세 번째 나누는 논쟁이다. 욥은 먼저 그의 변론의 무익함을 비판한다. “네가 힘 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 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 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2-3).” 세상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을 열거함으로 증명한다. “죽은 자의 영들이 물 밑에서 떨며 물에서 사는 것들도 그러하도다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4-5).”

 

여기서 욥은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지능력의 한계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 시편도 같은 의미의 내용으로 주를 찬송한다.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안개를 땅 끝에서 일으키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도다

(시 135:6-7).

 

이를 다시 욥의 표현 중에 하나로 가져와서 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6-8).” 욥은 빌닷이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에 반론하듯 그 오묘한 하나님의 지혜의 일부분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오히려 자신에게 더 깊은 혼란의 고통만을 가중시켰음을 부각한다.

 

욥은 여기서 네 개의 반어적 문장과 두 개의 질문을 통해 빌닷의 말들이 고난에 처한 자에게 어떤 위로도 도움도 되지 못하였으며, 지혜와 지식도 부족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에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14).” 하는 말로 빌닷의 말의 허무함을 정리한다. 그러는 동안 새삼 욥의 깊은 성찰과 높은 표현력에 놀라게 된다.

 

이는 솔로몬의 한탄으로도 읽을 수 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 4:1).” 즉 우리는 그 어떤 말로도 고통당하는 것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주께 고하여 기도하기를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상한 영혼으로 주 앞에 나아온 자에게 위로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한나가 아이가 없어 슬피 기도할 때 엘리 제사장의 눈이나 외람된 말이 민망할 정도이다.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삼상 1:12-14).”

 

그러니 스스로 안다고 여겨 뭐라 위로하거나 권면하려 드는 일은 조심스럽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살전 5:15).” 곧 우리는 저의 슬픔과 고통을 뭐라 위로 하려 하기보다 이를 가만히 곁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며, 바라보고 자신을 돌아보아 ‘항상 선을 따르려는 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고후 2:8).”

 

이게 어렵다. 뭐라 거들고 참견하고 아는 체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다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으면 함부로 판단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서로 위로하는 일이란 매우 신중한 시선으로의 기다림이 우선이고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 앞에 내어드림이 중요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7-18).”

 

궁극적으로 우리는 지금의 문제 해결이 필수인 게 아니라, 이 문제를 통해 더 나은 하나님의 세계, 우리의 본향을 바라는 일이다. 실제 이를 알리고 권하거나 묵묵히 상대의 말을 듣고 있기란 결코 쉽지 않다. 아흔이 넘은 장모와 같이 생활하면서 저의 반복되는 말과 맥락 없는 인식의 전개를 옆에서 듣기란 고역이다. 그래도 장모는 나를 목사로 여겨 제지하고 뭐라 말씀드리면 좀 듣기라도 하는데, 아내의 말에는 끝까지 궁싯거리며 자기 할 말을 다 하는 것이라서 아내는 속에서 열불이 난다.

 

내 입장에서는 그래서 산책을 하기 시작했고 같이 걸으며 그런저런 말을 듣거나 뭐라 그 화살이 내게 꽂히는 것을 감수한다. 아내 입장에서는 나로 운동시키기 위한 것이라 하지만, 나는 없는 돈을 아껴서 돌아오는 길에 꼭 카파라떼를 한 잔 사서 조금 나눠 먹고 오는 즐거움이 있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그런 가운데서 친정엄마에 대한 답답함과 서운함을 털어 내다보면 마음이 좀 풀리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내게 뭐라 투덜거리기 일쑤다. 나는 그때도 입을 다물고 있을 뿐 달리 긴 말로 뭐라 할 게 없다.

 

말이란 하는 것보다 듣거나 생략하는 부분으로 더 깊은 말이 된다. 욥의 친구들이 돌아가며 여러 말을 하는 데 있어 그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당사자인 욥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공격적이고 비난과 힐문의 말들이 더 많다. 하여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후 4:2).”

 

우리는 누구라도 서로 앞에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같이 자신의 경륜과 경험을 토대로 훈계하려 들거나 수아 사람 빌닷과 같이 상투적으로 전해져오는 지혜의 전승을 따라 마치 자신이 깨달은 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훈계하려 든다. 또는 나아마 사람 소발과 같이 돼도 않는 자신의 판단과 기준으로 주먹구구식으로 좋은 말만 늘어놓듯 해대는 것도 폭력이 된다는 것을 모른다. 듣기는 말하기보다 귀하고, 곁을 지키며 가만히 있는 것은 한결같은 마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누구의 어떤 문제에 대해 당사자는 그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게 급선무일 테지만 우리의 시선은 그것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가 닿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이처럼 말씀 앞에 나를 앉히는 일도 그러하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알려고…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하심을 되새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살후 3:18).” 서로가 가족으로든지 혹은 같은 교회의 지체로든지 믿는 자로서의 주의 길을 가는 순례자로서든지… 우리 사이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러할 때 저의 일이 내 일이 되고, 어떤 문제가 그 너머에 감추신 축복의 통로인 것을 알게 된다. 가령 누가 자신의 문제를 구구절절 적어보냈다. 되풀이해서 읽다가 나는 순간 적절하신 말씀이 떠오르면 그것을 적어서 보내며 위로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는 기도할게, 하는 말로 함축되는 것이다. 달리 무엇으로 어떤 말을 한들.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렘 5:24).”

 

달리 그 다음 문제는 주가 아시고 행하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동생의 필리핀 15년 사역은 1년 6개월 구형에 집행유예 3년, 40시간 교육에 앞으로 5년 간 청소년 관련 일 금지로 정리가 되었다. 마지막 재판을 마치고 나와 전화로 그 사실을 덤덤히 알리는데 마음은 안타깝고, 속상하여 주님! 하고 주 앞에 볼멘소리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잘 견뎠고 수고했다. 우리의 일은 주가 아시나니… 그와 같은 사슬에 풀려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하는 말이 전부였다. 한 아이의 엉뚱한 거짓말과 악의적인 표현이 그 엄마의 마음에 악한 영으로 부어져서 ‘동생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돌리게 된 셈이니까. 그렇게 필리핀 사역을 접고 고국에서 제 2막 전개를 기대하였다.

 

어려서부터 그런 일을 여러 번 겪으면서 자랐는데도 잘 적응이 안 된다. 빚더미에서 뒤늦게 신학을 시작하고, 궁여지책으로 어려운 처지에 앉은 교회에 부임하여 몇 년을 사역하다 어떤 중상모략에 쫓겨나고, 그 일이 계기로 나환자촌에 있는 정착촌교회로 부임하게 되는 부친은 그곳에서 3, 4년 넘게 애쓰고 수고하였는데 또 무슨 일로 내쫓기듯 하여 인천으로 와서 개척을 하였다. 그렇게 십 수 년 수고하여 백여 명의 성도들과 하나처럼 교회를 건축하다 빚더미에 모두 떠나고 부친은 무일푼으로 건물을 넘기듯 쫓겨나서 새로 또 개척을 하고… 어릴 때는 그 내막을 잘 몰랐고, 성장해서는 누가 건축공금을 횡령하고 어쩌고 하는 사연을 알았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주의 강권하심을 이젠 안다.

 

자주 감격하고 놀라워하는 것은 그와 같은 혹독한 목회의 길에서 우리 사남매가 모두 사역자로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더욱 나는 형제들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 죽어도 목사는 안 한다면서 마흔이 넘기까지 내 갈 길로 도망 다녔던 게 사실이라, 그런 가운데서도 어디까지라도 쫓아오시는 하나님의 한결같음에 두 손 들고 보니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없었다. 욥의 고백처럼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생이었고 오늘의 내 것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 할 수 있어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그리하여 오늘에서 우리는 주 앞에 감사하는 것은, 비록 저 아이엄마에게 말도 안 되는 금액 4천에 가까운 합의금을 줘야 했고 고스란히 이는 빚이 되었지만….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남들은 어찌 생각하는지, 세상은 이 일을 어찌 말하는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음을 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주를 믿는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더러는 말도 안 되는 상황 같아서 쓰러지고 넘어져서 좌절하기 쉬우나, 그때마다 또한 새 힘 주시니….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시 135:1-3).

 

욥의 진술과 같이 우리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욥 26:6).” 당장 모든 게 끝장난 것처럼 불안이 엄습하고 어려움이 찾아온다 해도,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5-6).

 

그리하여 오늘도 주의 길을 가는 동안,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 대대에 이르리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

(13-14).

 

이에,

 

이스라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아론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레위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예루살렘에 계시는 여호와는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할렐루야

(19-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