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하현. 2025. 10. 27. 05:35

 

진주와 벽옥으로도 비길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산호보다 귀하구나…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욥 28:18, 28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1

 

 

악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죄는 하나님의 가려서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한다. 죄악은 병목이고 죄는 단절이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 죄의 문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해결되었으나 악은 여전히 우리의 안팎에 존재함으로 하나님과의 사이를 갈라놓는다. 그러므로 욥은 지혜를 논하여 주를 경외함이라 하였고 악을 물리치는 것을 명철이라 한다. 이는 귀하여 그 어떤 보석보다 값지다.

 

본문은 친구들과의 변론을 별도로 지혜를 찾고 구하여 정의한다. 친구들과 세 번째 반론과 재반박을 거친 후 지혜의 문제를 정리하는 것이다. 그의 세 친구들은 거듭 지혜의 성격과 기원을 논쟁거리로 삼았다. 그 지혜 전승에 근거하여 욥에게 지혜를 가르치겠다고 나섰다. 이에 오늘 본문은 정작 저들에게는 지혜가 없다는 사실을 밝힌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통찰에 근거하여 자신이 친구들에 비하여 지혜가 탁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욥과 그 친구들 모두 뚜렷하게 한계를 드러냈을 뿐이다.

 

지혜의 근원을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진리의 한 부분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곧 만물은 각기 다른 존재의 근원을 가지면서 결국 한 근원을 두고 있다. 이처럼 무의미하게 계속 논하는 것을 일단 멈춤으로 지혜의 근원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있음을, 명철은 이를 가로막는 악을 멀리하는 데 있음을 말한다. 세상 모든 보화보다 뛰어난 지혜의 가치에 대하여 말하고, 그것이 ‘땅 속의 보화’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으로 진술된다(1-11). 그러나 지혜는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는 초월적인 것을 밝히고(12-14), 세상의 그 어떤 보화와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15-19). 결국 본문은 전승과 통찰, 경험으로는 지혜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린다.

 

이에 첫 마디부터가 철학적이다. “은이 나는 곳이 있고 금을 제련하는 곳이 있으며 철은 흙에서 캐내고 동은 돌에서 녹여 얻느니라(1-2).” 어쩌면 이 지당한 사실이 지혜의 출발이 된다. 은은 나는 곳이 있다. 성경에서 은과 금의 출처를 ‘다시스’와 관련하여 언급한 바, “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꾸미되 기술공과 은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옷을 입었나니 이는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이거니와” 이를 설명한 이유는,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이방이 능히 당하지 못하느니라(렘 10:9, 10).”

 

곧 세상에서 은과 금이 귀한 것을 상징하나 그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을 알되 온전히 바로 알기를 바라는 것이 지혜이다. 그럼에도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하여,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그러므로 어느 훗날 그 누구도 몰랐다고 할 수 없게 하신다. 오늘에도 정작 하나님을 몰라서 멀리하고 거부하여 의식적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삼라만상의 주인이심과 우리의 존재는 그가 창조하신 자연에 비해서도 하찮은 존재임을 깨닫는다. 누가 독도에서 몇 번째 공연을 하고, 할 때마다 저는 어떤 영험함을 느낀다고 하였다. 영험하다는 것은 신기하고 징험한, 신령함을 뜻한다. 고작 그 외딴 섬에서도 그와 같은 경험을 하면서 정작 이를 지으신 하나님을 모를 리 없다.

 

일찍이 광석은 은금을 기준으로 하여 ‘연단하는 금은 나는 곳이 있다’ 하는데, 연단하는 것은 추출하여 걸러내고, 순수한 금으로 정제하는 것이다. 이에 말라기 선지자는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말 3:3).” 곧 우리의 고백도 같아서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하나님이 저들은 연단하심을 보고, 오늘의 정세와 정치를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더욱 더 확신하게 되는 것과 같다.

 

당시 금은 매우 희귀하여 오빌과 세바에서 수입하였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도 비유하기를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사 13:12).” 하며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였다. 철은 흙에서 취하고, 흙은 땅속이나 땅의 표면을 가리킨다. 철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하늘이 내린 광석’으로 일컬어질 만큼 가장 알려진 광물이었다. 가나안 땅의 돌이 철이라고 표현될 만큼 풍부하였다.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신 8:9).”

 

이렇듯 광물의 채굴하는 기술도 사람이 얻은 바 그 지혜에서 나온다. 이를 욥은 강조하면서 모든 만물은 그 종류대로 제각기 독특한 성질을 지니고 구분된다는 사실을 밝힌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셨다고 하신다. 하늘과 땅과 바다를 지으셨고 각각의 곳에 살 생물들도 지으셨다. 흙을 빚어 인간을 지으셨고, 인간이 다른 것은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심으로 이 모두를 다스리게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이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그런데 이를 마치 세상에서 얻어 세상이 주는 것으로 알고 세상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더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1:22, 24-25).” 곧 오늘 우리 사회는 물론 사람의 모든 존재여부가 그러하여서 ‘내버려두심’으로 우리들끼리 서로 욕이 되게 한다.

 

이를 보면서 우리는 더욱 더 주를 바라게 되는 것이라,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6).” 이와 같은 진리로 무장하게 된다. 이것으로 지혜라 하는데,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잠 8:11).” 이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1:7).” 오늘 욥의 주장은 이를 근거로 한다.

 

이러한 광물의 희소성 때문에 그 가치를 높이 두어 요즘 특히 금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고 하는데, 그리하여 이를 얻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죽을 것처럼 취하여 산다고 사는 것이 지혜이겠나? 그것은 허무할 뿐,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게 거품처럼 꺼지는 게 인생인데…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기 위해 아등바등 죽기 살기로 기를 쓰고 소유하려는 그 자체가 어리석을 따름이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학식도 모두 죽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관심 있던 어느 배우의 자살로 가끔씩 이와 같은 허무함을 실감한다. 그의 작품은 남았다며 산 자들은 유희하는데 이는 또 산 자의 사치일 뿐이다.

 

이처럼 사람은 허탄한 것을 얻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산다고 사는 일인데, 영원한 가치는 우리의 죽음과 그 너머까지의 것을 다스리시고 소유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함이다. 예수님은 이를 알지 못하는 우리를 일컬어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마 13:14).” 들어도 보아도 알지 못하게 막힌 담이 죄악으로 인함이다. 이에 진정한 보화를 위한 영적인 고역과 노동은 이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내어주신 바 되는 예수를 온전히 아는 것일 텐데,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19:21).” 그러나 결국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실상은 아닐까?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좋은 직장을 얻기까지, 또는 좋은 배우자를 만날 때까지 그처럼 신앙으로 믿음 안에서 잘 지켜오는 줄 알았던 날들이 하루 아침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을 본다. 글방에서 교회로 같이 시작했던 아이들이 대부분 그러했고 내 곁의 여러 명이 그리하여 교회를 떠났다. 

 

이와 같아서 오늘도 우리의 근심과 염려의 이유가 재물로 인한 것임을 한탄해야 한다. 이에 바울은 역동적으로 말씀을 전하길,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곧 세상이 점점 더 물질에 연연하고 사는 데 따른 이유와 목적이 이것을 소유하려는 데 있다는 것으로 비통하다.

 

그래서 욥은 오늘 진정한 보화는 땅에서 찾을 수 없고(13),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15-19)에 대하여,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심지어 멸망과 사망도 그것이 있는 줄을 소문으로만 들었다고 한다(21-22). 곧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영원한 영광’을 가져다 줄 능력이 우리 육의 눈에 감추어져 있다. 즉 아무리 뛰어난 첨단 장비로도 이를 찾을 길 없어, 세속적인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온갖 종교와 철학이 하나 된다 해도 전정한 보화는 하나님의 방법과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이를 하나님이 감추어 두셨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 알자, 힘써 하나님을 알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하여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오늘도 이처럼 말씀으로 주 앞에 앉아 주를 바로 알고자함은 오늘도 이 하루를 더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함이고,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는 바울의 역설적인 질문 앞에서 그 답을 얻는다(18-19).

 

욥과 그 친구들의 지리멸렬한 논쟁 속에서 우리가 밝히 알게 되는 것은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 28:28).” 하는 오늘 말씀의 근본이다. 다른 그 무엇, 세상의 은과 금과 각종 보화들보다 귀하고 더 값진 것은 지혜로서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그러므로 누구는 우리를 되레 미련하다고 하겠으나,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니라(잠 14:8).”

 

이처럼 말씀을 읽고 주가 주시는 지혜로 그 깊이와 너비를 다 알지 못하겠으나 그럼에도 말씀을 따라 간다. 찾아보고 연관 지어 나의 오늘에 적용함으로 묵상한다. 이를 글로 쓰는 것은 이것으로 하루를 살면서 틈나면 읽고 되새겨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고로 우리가 예수를 알되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47).” 하여 나는 나의 느낌이나 생각으로가 아니라, 이를 글로 쓰고 다시 되새김으로 읽어서 욥과 그의 친구들과 같은 속성이 나도 같은 줄을 알았다.

 

곧 성경의 모든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 그때의 이야기로 그치는 게 아니어서 오늘도 같은 일은 반복되고 그 사람이 이 사람이고, 그때 일이 오늘의 일들로 사건이 하나인 것을 생각한다. 고로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 1:3-4).” 죄의 연속성 같이 사람은 하나여서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이를 성경은 알기를 원함으로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4-15).”

 

저마다 아는 것으로 족한 게 아니라, 이를 삶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것으로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하여 오늘도 우리는 이처럼 말씀으로 알고자 새벽을 깨운다. 이 시간을 획득하기 위해서 나는 의식적으로 8, 9시 전에는 잠들려고 한다. 이 시간, 이 고요한 적막 가운데서 쓰린 눈을 슴벅거리며 말씀을 읽고 턱을 괴고 앉았을 때 주의 영이 나를 어르고 알리시는 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하여 오늘도 욥의 진술을 눈여겨보다 성경의 뜻을 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39-41).”

 

하여 오늘도,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1).

 

바벨론과 같은 세상을 사는 동안은 그러하여서,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4).

 

그러나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를 돌려보내어 지난 날처럼 되게 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3:11).” 하신 것을 묵상하면서,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138: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