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아시나이다

하현. 2025. 10. 29. 05:32

 

이는 하나님이 내 활시위를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하게 하심으로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

욥 30:1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시 139:1

 

 

주께서 나를 다 아신다는 전제로 내 속에서 할 수 있는 생각이 있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말들도 속으로는 주 앞에서 다 할 수 있다. 오늘 욥의 독백이 오히려 위로가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어지는 다윗의 심정도 그와 같은 토로가 나의 마음을 대신하는 듯하다. 주 앞에서의 모든 것, 나의 속사정을 기꺼이 아룀으로 비록 오늘이, “이는 하나님이 내 활시위를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하게 하심으로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11).” 더는 누구도 나를 향해 긴장하지 않으면서 나 역시 팽팽하게 긴장하였던 활줄의 피곤에서 놓여났다.

 

어디가 아프다는 일, 그것을 짊어지고 사는 일이란 전적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일인 것 같다. 아흔 살 장모가 며칠 째 잠을 못 이루고는 휑한 모습으로 고통을 호소할 때 우리는 수면제를 운운하며 그 보이는 단편적인 것에만 신경을 썼다. 알고 보니 ‘마약성 진통제’가 떨어져서 그랬던 것을, 어제는 잘 주무셨는가? 하고 보니 모처럼 단잠을 잤다는 것과 저녁에 진통제를 먹고 잤다는 게 일치하였다. 그러니 곁에서 살피고 나름은 잘 모신다고는 하나,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를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19-21).”

 

하는 욥의 진정한 고통에 두려움과 함께 경외감도 든다. 이틀이 멀다하고 너무 자주 진통주사를 맞는 것 같아서 어제는 점심을 먹고 약을 먹었다. 늘 덜어놓고 틈을 두고 먹던 것을 한꺼번에 먹어서 그런가, 속이 울렁거리면서 통증은 더하는 것 같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같은 동선을 따라 오후께 교회로 왔다가 다시 돌아가 주사치료를 했다. 목과 어깨 무릎에 모두 아홉 대를 맞은 모양이다.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기다림과 또한 처치를 앞두고 대기하는 동안의 그 순간들이 내게는 더 고역이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갈까, 하다 교회로 왔다. 언제부턴가는 조용하여 적막하기까지 한 교회가 평안하다. 일찍 누웠다가 일찍 새벽에 일어났다.

 

삶을 연명해가는 일에서 자신의 육신과 안위를 돌보는 게 큰 사역이다. 그럴 때면 오늘 욥의 진술이 공감이 간다. “나를 바람 위에 들어 불려가게 하시며 무서운 힘으로 나를 던져 버리시나이다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돌려보내시리이다(22-23).” 이 모든 여정과 그 결국은 주의 것이다. 하여 오늘 다윗의 기도가 위로가 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 139:1-4).

 

주가 다 아신다는 것, 이를 붙드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은 때가 있다. 어제도 그 와중에 대기하는 순서가 길어지면서 핸드폰으로 설교원고 초안을 펼치고 단락을 나누고 각 요지와 대지의 중심 문장을 적었다. 와글거리는 소리를 닫는 효과가 있고, 집중하여 긴장하여 속이 불편한 마음을 달랠 수 있다. 외람되지만 나의 묵상글쓰기와 설교원고 작성은 이런 효과를 준다. 그러는 동안 아내가 수업을 일찍 끝내고, 다섯 시 다 돼 병원으로 왔다. 옆에 앉아 뭐라 묻지도 않은 말을 하는 아내의 말들도 효과가 있다. 나의 한심하고 소심함으로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고 오늘을 감당하는 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9-10).

 

하는 주의 손길이 나의 일상의 소소한 현장에서 느껴진다. 주가 아시오니, 욥은 단지 고난당하기 전의 축복과 영광의 시간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그전에 괜찮았던, 행복했던 과거와 대조되는 오늘의 현실은 비천하고, 조롱의 상대가 되어 더욱 비참하여 탄식을 하게 되지만… 탄식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고 인정하는 일이란 믿는 자들만의 특권이 된다. 이와 같은 고통이 단순하게 이 땅의 논리로 저주라면 고통은 무조건 악할 뿐인데… 그 가운데서 마주하고 바라는 주의 손길이 더 뜨겁고 값지다.

 

같잖은 시므이가 쫓아오며 아들 압살롬의 역모로 도망가는 길에 다윗을 조롱하고 저주할 때,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삼하 16:7).” 다윗의 무사들이 나아가 저를 처단하려 할 때도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9).” 그때에 다윗은 그 지경에도 하나님을 인정함으로,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10).”

 

나는 이런 내용을 가만히 떠올릴 때면 신앙의 정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같은 상황에서도 보는 관점이 다르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정도가 다르다. 고통과 고난을 저주라고 한다면, 좋은 일과 성공하는 삶으로만 축복이라고 한다면,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이와 같은 지혜는 주를 경외하는 마음에서 가능하였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곧 모든 일의 과정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적정으로 이루어진다. 이를 인정함으로 오늘의 비천한 현실도, 그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도, 사람들은 멸시도, 비참한 현실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욥의 토로가 오늘의 나로 그와 같은 현실에서도 주를 바라게 한다. 곧 하나님을 인정할 때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이제는 그들이 나를 노래로 조롱하며 내가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으며 그들이 나를 미워하여 멀리 하고 서슴지 않고 내 얼굴에 침을 뱉는도다(욥 30:9-10).”

 

“이는 하나님이 내 활시위를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하게 하심으로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욥 30:11).”

 

나는 이에 따른 느슨함과 넉넉한 마음으로의 주를 인정하는 삶을 살고 싶다. 고통이 일이라, 늘 나 하나 건사하며 사는 일에 고단함을 느낄 때도 있어서 산책을 하거나 어제처럼 병원에 있을 때 아내는 곁에서 거의 수발을 들며 오히려 감사한다. 나처럼 힘들지 않아서 감사하고, 옆에서 거들 수 있어서 감사하고, 아직은 건강하여서 감사하고… 물론 이제 자신도 여기저기 통증이 신호를 보내지만 그것으로도 나와 비교할 때 자신은 덜한 것 같아서 감사하다. 그리 노래를 하듯 팽팽했던 활 시위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 같을 때는 내가 더 감사하다. 그리고 이렇게 어제보다는 살만하여서 새벽에 다시 말씀 앞에 앉히심이 은혜이다.

 

사는 것은 현실이고 신앙은 관념인 듯한데 이 둘이 바뀌어야 한다. 삶이 이상이고 신앙이 현실이다. 우리가 꿈꾸는 오늘과 내일은 미지수다. 그런 중에 현실은 당면하는 과제다. 이를 푸는 것은 신앙으로다. 믿음은 항상 실제다. 막연한 요구나 바람이 아니다.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마 22:13).” 언제 곧 우리 앞에서 펼쳐지게 될 현실을 우리는 오늘에서도 보고 느낄 수 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25:30).”

 

곧 오늘 본문의 핵심은 ‘주가 다 아시나니’ 우리는 그러하여 다윗과 욥과 같이 오늘을 내일의 것으로, 곧 있을 가까운 훗날의 것으로도 가져다 앞서 감사로 승리할 수 있다. 이런 지경에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8).” 세상은 그리로 달려가나,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

 

행여 우리가 그러할까 하여 오늘의 고난과 역경의 순기능은 주를 바라게 하는 연단의 의미다. 그리하여,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4:19).” 그러니 우리로 이를 예방하게 하시려고,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하여, 나의 간절한 기도는 내가 너무 아프고 힘들 때이다. 가증스러워서 나는 평소 좀 나을 때면 내 아집과 판단으로 남을 헐뜯기 일쑤고 어떤 일에 부정적인 태도로 방어기제를 삼기 일쑤다. 그러다 더는 미루기 힘들어서 고통을 호소하며 주 앞에 엎드려 늘어진 활시위 같이 주 앞에 토로하듯 독백한다.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 고생의 날을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욥 30:21-25).” 주가 들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는 하나님이 내 활시위를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하게 하심으로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11).” 하여, “내 수금은 통곡이 되었고 내 피리는 애곡이 되었구나(31). 할 때에 주가 나를 긍휼히 여기실까 하여,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삼하 16:12-13).”

 

주어진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러든가 말든가 내가 어찌 해보려고 행여 주 앞에 악을 행할까 하여… 더욱 더 주를 인정함으로 순복한다. 그러므로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이를 나는 나의 상황과 통증과 고질적인 두려움으로 배운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사랑하는 데 있어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주를 사랑하고자 한다. 하면 혹시 나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긍휼하심 같이… 나의 모든 지난날들이 그러했음을 인정하고, 나보다 더 큰 은혜로 살았던 사람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1-32).”

 

고로 사는 게 지혜다. 살면서 주를 더욱 바라고 의지함이 지혜의 삶이다. 부친은 약해진 전립선으로 거의 잠을 못 주무시고 결국은 수면제를 의지해야 그나마 좀 잠이 든다. 모친은 늘 자신의 연약한 육신을 이끌고 주를 더욱 강하게 붙든다. 우리 삶은 아이러니하다. 신앙도 같아서 그 육신에 그 정신으로 무얼 스스로 감당하며 살겠다고 아등바등하지만 사는 게 다들 고역이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화나지, 되는 일은 없지 항상 쪼들리는 생활에 나이가 들면서 몸도 말썽이고 세상은 요지경이며 내 곁의 사람들도 나를 무시하기 일쑤이나… 나는 역설적이게도 이와 같은 느슨함이 주는, 더는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언제 끊어질지 몰라 불안을 살았던 날들에서 놓여난 것으로도 오히려 지금의 빈궁함과 육신의 호소와 가까웠던 이들의 외면이 고맙기도 하다. 장애를 가지고 더 씩씩하고 밝고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제,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 22:7-8).

 

하는 말과 시선이 오히려 고맙다. 그리하여 저들의 외면이 나로 자유롭게 한다. 이처럼 주의 성전에서 주 앞에만 나의 속을 들추어 아뢸 수 있음으로도 감사하다. 하여 나의 한 가지 소원,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부디 이와 같은 마음이 나의 전심이 되어 주를 바랄 수 있었으면, 하여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65:4).

 

이는,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138:2).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 2:4, 7).” 고통을 바로 알면 고통 중에 참 신앙의 고백이 나온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39:7-11).

 

이는 결코 원망이 아니라 감사다. 다행이다. 복이다. 그러므로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5-16).

 

그리하여 오늘도 오늘에 맡기신 삶을 가지고 사는 것이니, 더러는 삶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지 신앙은 항상 그 현실을 딛고 서게 하는 힘이다. 의지다. 주를 바라는 마음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17, 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