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다녔느니라

하현. 2025. 10. 28. 05:38

 

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 그 때에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었고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다녔느니라

욥 29:2-3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시 138:8

 

 

욥의 회고어린 기도가 먹먹하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눈에 그려지는 것 같다. 그런 그에 대하여 친구들의 권선징악의 논리로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하고 비판하던 말들이 야속하기도 하였겠다. 그러해서 오늘 이와 같이 주 앞에 아뢰며 옛날을 회상하는 것도 같다. 저의 첫 마디는 “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 하면서 “그 때에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었고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다녔느니라(2-3).”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인정한다. 이를 또 마침 다윗의 기도와 회상에서 듣는 시편으로도 듣는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시 138:8).

 

오늘의 일이 먼 옛날을 회상하게 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엊그제 일과 다르지 않다. 고작 그래봐야 ‘이전 달’의 일이다. 그때에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날’을 저는 그리워하는데, 상대적으로 오늘의 고통 중에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하기가 어렵다. 곧 ‘지난날들’을 뜻하며, 세월의 흐름 자체를 의미하기보다 현재의 비참한 상황과 비교했을 때 영화로웠던 과거를 가리킨다.

 

그날은 ‘하나님의 날이다.’ 자신의 과거가 행복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으로 저는 그렇게 확신한다. 나 역시 이를 크게 공감하는 것은 전에 같았을 텐데, ‘나의 지난들’을 떠올리면 모든 게 은혜였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때 그 억울하고 분하였던 일부터, 지독하게 가난하고 잔인하게 외로웠던 날들도 이제 와 생각하면 그것으로 감사를 배웠다고 하겠다. 나의 노여움으로 찬송이 되게 하신다는 주의 말씀을 이루셨다. 형편없었던 나의 생활을 인정하면 인정할수록 그런 내게 오늘의 이 영광과 평안은 복되고 과분하다. 어느 것 하나 아니 그런 게 없다. 오늘 욥은 ‘보호하시던’으로 표현하고, ‘주의 도우심을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이 표현하였다.

 

이를 시편으로 읽어보면,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141:3, 77:4).

 

지키고 안위하시는 하나님을 뜻하며, 당신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살핌과 지켜주심을 욥도 그렇듯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욥은 자신의 과거가 영화로웠고 그것이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한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렇듯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은 하나로 연결되어 행복과 불행이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었음을 인정함으로 감사가 되어 나타난다. 그렇듯 내가 살아온 것에 비해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더 크고, 넓고, 높고, 깊었다. 이를 측량할 수 없으나,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하고 기도하는 바울 사도의 기도가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게 역사함을 느낀다. 이는 욥의 표현 같이 “그 때에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었고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다녔느니라(3).” 곧 ‘하나님의 빛’ 등불과 광명은 모두 2절의 ‘보호하심’과 연결된다. 우리 성도의 축복은 각각이 다르나 동일하다. 하나님의 축복과 돌보심이 우리의 간증이 된다. 이를 시인도 등불로 표현하여 생명과 번영으로 나타내고, 말씀으로 연결한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8:28, 119:105).

 

이를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로 나타낸다. 곧 오늘 여기에, 지금 나에게 임하심이니, 마치 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것과 같아서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1:23, 22:5).”

 

오늘 본문에서의 회상의 언어로 욥은 자신의 인생행로를 늘 하나님이 조명해 주시고 인도해 주신 것을 확신한다. 이는 마치 우리 모두가 주를 바라고 마주하고 있을 때 나오는 고백과 같다. 내 곁의 누구라도 주를 가까이 하고 사모하는 이들은 이와 같은 고백에 아멘, 하고 동의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등지고 또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에는 애매하여서 이 말이 선뜻 와 닿지가 않아 괴롭기도 하다. 그 영혼이 이와 같은 고백을 들을 때 괴로워하면 이 또한 소망이 있으나 그조차 미비하여 그러든가 말든가, 밋밋하면 그게 문제다.

 

교회는 다니고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런 말에는 관심이 없고 별로 와 닿지 않는 소리일 뿐일 때, 그 속에 시샘이 나서 화가 또 그리움이 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그 영혼은 위태롭다. 심지어는 듣기 싫어서 다른 화제로 돌리거나 아예 그런 상대를 멀리하고 산다면 더더욱 더 확실하다. 이는 스스로의 영혼을 자가 진단할 수 있는 키트다. 혼자서 혹시나 하고 코로나 검사 키트를 하고 양성이 나오면, 병원을 찾아 더 확실하게 검사하고 처방을 받듯이 우리 영혼의 일도 이와 같다.

 

상대적으로 점점 더 그런 친구들도 있다. 전화는 물론 만남이 불편하고 어려워지는 사람들이다. 만나봐야 ‘그런 소리에 그런 화두’로 오갈 내용이 빤하여서 별로다. 가끔 전화를 할 때 안부를 묻고 저의 사연을 듣는데 들으면서 벌써 듣기가 싫어지는 그런 말들… 내가 주의 은혜를 말하고 일련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고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지 말해주고 싶은데 듣지를 않으려고 할 때… 그때 느껴진다. 우리가 같은 땅을 딛고 선 게 아니구나!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 못하구나! 하는 안타까움과 속상함 같은 어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에 힘입어 어려움을 직면했을 때, 환난 중에도 좌절하거나 넘어지지 않는다. 올바른 길로 안전하게 행할 수 있다. 결국 욥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상기한다. 아울러 ‘행복했던 과거, 하나님과 가까이 거하였던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염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욥은 오늘 친구들의 조롱 가운데서도 이전의 즐거움을 회상한다(1-25). 비참한 현실로 탄식도 한다(30:1-15).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절규도 하고 그래서 영육간의 고통으로 탄식하는 것이다(16-31). 그러면서 주 앞에서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한다(31:1-40). 이와 같은 욥의 후기 독백으로 오늘은 이전의 축복과 영광에 대한 진술이다. 그 때로 돌아가기를 갈망한다. 하나님이 축복하셨던 번영의 날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때에 자신은,

 

“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15-17).”

 

이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이었음을 진술한다. 사실 자신은 널리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사실도 회고하였다. “귀가 들은즉 나를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증언하였나니 이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였느니라(11-13).” 과거 자신은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의를 지켰던 사실도 있다. “내가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14).”

 

이를 생각할 때 자신의 앞날에 소망이 있음을 확신하던 때를 기억한다.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숨을 거두며 나의 날은 모래알 같이 많으리라 하였느니라(18).” 그때는 무리를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무리는 내 말을 듣고 희망을 걸었으며 내가 가르칠 때에 잠잠하였노라 내가 말한 후에는 그들이 말을 거듭하지 못하였나니 나의 말이 그들에게 스며들었음이라(21-22).”

 

오늘이 과거의 행복했던 때와 완전히 대조되는 현실임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탄식과 원망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알린다. 그러한 행복이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하나님이 그리 인정하심으로 얻었던 축복의 결과임을 강조한다. 이로써 친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이 죄악으로 인하여 고난당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즉 오늘의 고난이 무조건 죄의 결과로 오는 것은 아니다. 누가 딸이 병들었을 때 그게 다 자기 죄 때문이라며 한탄하던 일이 있었다. 그리 생각함으로 한탄하기보다 주를 더욱 바라시고, 의지하시라 권면하였던 기억이 난다.

 

어려움 앞에서 누구라도 이와 같을 수 있다. 그때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 3:5-6).” 자신을 돌아보고 주를 바람으로 더욱 더 주를 사랑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분명히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20:24).” 하는 것이 지혜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16:9).” 이와 같이 집약된 길라잡이 말씀이 우리에게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은혜의 시대를 살면서 우린 오히려 허약한 체질의 영혼으로 산다.

 

이를 위하여 기도를 배울 때,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27:1-2).

 

하는 것이 우리의 공통된 응답이다. 우리가 어려움 중에서 주를 바랄 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선명해진다. 마치 어둠이 깊을 때 작은 불빛도 환히 비치는 것 같이,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헐벗은 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사 49:9-10).” 곧 우리의 날들이 그러하였다.

 

돌아보면 내가 온통 안 믿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각자의 길에서 사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세상을 더 사랑할 때도 하나님은 그러한 나라 해도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 하심을 이루시듯 보기 좋게 건져주셨다. 물론 그땐 그게 원망스러워 거의 죽고 싶은 생각으로 나날이 시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이제는 그때 그 모든 불행도 슬픔도 괴로움도 감사를 배우는 과정이었음을 인정한다. 가령 초등학교 졸업식 날로 기억하는 81년 2월 10일 10시에 여수 애양원 수술대에 있었고, 친구들은 ‘국민학교’ 졸업식을 하고 있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때부터 나는 6개월 가까이 나환자촌의 병원과 그 인근에서 생활을 했고, 생애 처음으로 기이하고 무서운 형태의 불구와 이상한 사람들을 보며 살았다. 온 몸에 깁스를 하고도 휠체어로 이동을 할 수 있을 때 처음 ‘애양원 교회’를 가던 날, 어린 나는 기이한 사람들의 기인한 삶에 놀랐는지, 두려웠는지, 신기했는지… 그때 가까워진 소경 장로님과 지내던 시간은 늘 나의 신앙 안에서도 인상적이다. 대체 누가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바로 직전에 내가 졸업했을 초등학교 근처 2층 옥상에서 살면서 2층에서 개척교회를 하던 부친으로 인한 가난과 그 지독하게 불편했던 시절로 원망하던 어린 시절이었다. 5학년 전학 때부터 학교의 거절로 한바탕 소동이 있었고, 6학년에 올라가서는 뜬금없이 학기 시작하고 4월에 여자 반에 남자애 넷이 들어가서 수업을 해야 했던, 그 엉터리 같은 시간은 거짓말처럼 어린 나를 우울하게 하였던 것 같다. 그때 또 가까이 지내던 교회 형의 자살은 나로 하여금 어린 게 뭘 안다고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나래를 펼치며, 나의 개떡 같은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지냈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듬해 2월에 나환자촌에서 생전에 볼까말까 할 기이한 사람들을 보면서 생활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그렇게 수술 후 돌아왔을 때, 이 또한 거짓말 같이 나의 부친은 2층 개척교회를 사임하고 의정부 저 안쪽에 있는 나환자촌의 교회로 초빙되어 가셨다. 그곳에서의 3년반 시간은 앞전의 여수 애양원에서의 훈련(?)과 이어져서 마치 누가 꾸민 일 같은 인생으로 펼쳐졌다. 또래들이 많던 그 교회에서 성령의 세례를 받았고, 같이 어울려 자발적으로 성경공부(설교노트를 교환하는)도 하였고, 처음으로 한 여학생을 좋아하면서 글쓰기와 책 읽기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그런 가운데서도 서로의 비난과 오해를 보았으며 그로 인하여 결국은 아버지가 그 교회를 떠나기까지 나의 '첫 사랑'은 나로 문학을 사랑하게 하였고, 한 사람을 온전히 그 사람 전부로 사랑할 수 있게 하였고, 강제 이별 후 다시 찾아온 지독한 외로움을 겪게도 하였다.     

 

그러니 모든 게 연출이라면 이보다 더 엉터리 같은, 아니 이와 같이 치밀하고 독특하고 은혜로운 인생이 어디 또 있을 수 있을까? 나의 날들은 모든 게 그러하여서, 누구라도 그럴 테지만 저마다의 남다른 경험 한둘을 통해 하나님이 나하고만 연결된 어떤 빛의 통로 같은, 가늘고 선명한… 희미하였는데 뚜렷한 주의 은혜를 오늘이 욥과 같이 독백처럼 진술하여 간증할 수 있다. 고로,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73:23)

 

하는 고백이 내 것이지 아니한가?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138:1-2).

 

하는 오늘 다윗의 시편도 감동이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3, 7).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