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을 할 수 없느니라
욥 31:6, 23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
시 140:6
우리가 주 앞에서 바로 살려고 하는 것은 이 땅에서의 결실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게 아니다. 주를 경외함으로 두려워할 줄 알고 주의 살아계심을 염두에 두고, 그날이 오면 주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그리워하며 예비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욥의 마지막 변론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변호의 말을 집약한다. 저는 스스로에게 일러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하고 말한다.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1).” 곧 ‘언약’은 맹세로 이를 어기면 ‘제물로 바쳐진 동물이 둘로 쪼개어진 것과 같은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다소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있다.
우리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말씀을 언약의 말씀이라 한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신 4:23).” 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31).” 하심으로 스스로의 언약을 중히 여기셨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시 25:10, 14, 44:17).
성경의 여러 곳에서 주의 언약을 강조한다. 이는 상호간의 굳은 피의 맹세를 뜻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엄숙한 계약에 사용되었다. 언약을 수행하는 데 있어 이를 지키거나 어길 때의 축복과 저주는 분명하다. 이는 ‘하나님의 주도적이고 일방적인 약속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서원’의 의미를 가진다. 이를 우리가 잊거나 어길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이행하신다.
가령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세례를 받으며 서원을 했다. 그때는 성령의 역사가 당시 우리 또래들의 심령을 사로잡고 있었다. 어디 나환자촌의 교회로 예닐곱 명이 같이 설교노트를 작성하여 돌려보기도 했고, 같이 모여 기도회도 하였다. 외곽에 있던 터라 학생회 지도 전도사는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에 와서 하루 이틀 교회에서 머물고 주일을 지켰다. 그때면 우리들도 같이 모였고 금요철야예배에도 참석하곤 했다. 우리가 같이 세례를 받을 때, 나는 나 같은 것을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에 감명하여 울었다. 한 해 전 1학년 때 자살을 꿈꾸며 반 년 가까이 수면제를 모았다가 발각되어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적이 있었다.
당시 또래들은 대부분 입양된 아이들로 그 부모 중 한쪽이나 양쪽이 한센병을 앓았다 음성 판정으로 그곳에서 살았고, 강제로도 임신을 할 수 없게 하였었다. 그러다보니 먼 친척이나 어디 보육원 출신이거나 해서… 서로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렇게 우리는 남다른 유대감이 있어서도 그랬던 것 같다. 저마다 그때 서원을 했다. 그 가운데 둘은 목사와 선교사가 됐다. 세 명 중 한 명은 사모가 되었다. 아주 뒤늦게 나 역시 목사가 되었다. 나야말로 그때 그 서원을 버리고 대학에 들어가면서 죽어도 목사는 안 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살았던 것이 마흔을 넘겨 강제소환당한 셈이니….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다.
오늘 욥은 자신이 세운 언약이 ‘눈으로 보는 것을 조심하려는 것’으로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하고,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 중 하나인 성적인 문제로 집약한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속마음까지 철저히 정결하게 살기로 서원한 것을 뜻한다. 눈은 마음의 생각과 연결되어 있다. “만일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거나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랐거나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면(7)” 하는 것은 모두 눈이 우선하여 판단해야 한다. 곧 욥은 인생에 있어 모든 유혹을 물리치겠다는 언약을 ‘눈과의 언약’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할 때,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하는데, ‘어찌’는 뒤에서도 계속되는 수사 의문의 골자로 이에 대해 당연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처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곧잘 섬기던 바알의 배우자 ‘아낫 여신’을 암시한다고도 한다. 단순히 여자를 생각하는 음욕을 떠나 더 나아가 우상 숭배의 길로 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물론 우리의 원초적인 성적 대상으로의 ‘처녀’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를 ‘주목하랴’ 하는 것은 그럴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지 않겠다 하는 결의가 담겨진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으로 서원할 때 단순히 무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이상의 정직하고 성결한 삶을 굳게 약속하는 것이다. 엘리바스는 세 번째 변론에서, 욥이 하나님을 세상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여긴다고 책망한 적 있다.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우두머리 별이 얼마나 높은가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22:12-13).” 그러면서 엘리바스는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들의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머니라(18).” 하고 강변하였다.
사실 욥은 하나님이 초월적인 분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행위를 감찰하시는 분이라고 믿고 있다. 욥은 고난에 직면하기까지는 선악간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하고도 현실적인 보응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 엄청난 고난의 상황이 되자 욥은 ‘자신과 같은 의인’도 고난을 당하고, 악행하는 자들이 오히려 번성하는 모순된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오늘 욥은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처지와 딜레마에 대해 솔직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곧 자신의 결백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은 우리 성도의 기본적인 자세이기도 하다.
당연히 ‘불의한 자에게는 환난이’ 오고, ‘행악하는 자에게는 재앙이’ 따라야 한다. 불의와 행악은 세상을 주도하는 권세 잡은 자들의 특징으로 우리 사회에서도 드러나는 족족 저들은 끝까지 부인하다가 확실한 증거나 증인이 나오면 그때서야 마지못해 변명하거나 인정한다. 어제도 ‘내란재판을 중계하는 영상’을 보면서 저들의 주장과 가치와 그 입장을 듣는 것으로 놀라웠다. 같은 사안을 두고 저렇게도 접근하여 법리다툼을 하고 법정공방을 벌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 어느 훗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의 각각 자기변명과 주장을 상상하였다.
오늘 시편에서 다윗은,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140:12-13).
결국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대변인이 되어계심을 요한은 알려주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우리도 욥과 같이 탄식하며 하나님을 향한 절규할 때가 있다. 이때 주의 긍휼하심을 구하게 되는데 ‘그리스도의 변호’가 아니면 감당이 안 된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하고 미연에 그와 같은 마음을 주의하게 하셨다. 하여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29).” 하실 정도로 강경하게 말씀하셨다. 이는 우리가 그만큼 연약하고 부족하여 스스로의 말에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고 우리의 서원도 허투루 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34-36).”
그러므로 어릴 적 나의 서원이 단순하게 그때 그 분위기와 상황 때문에 이뤄진 것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그때는 알 수 없는 뜨거운 회개와 감사가 있었고 이는 성령의 주도하심으로 나로 하여금 이미 예정하신 주의 섭리 가운데서의 일이다. 그러나 결국 세상을 사랑하였으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하여 오늘 욥의 첫 마디,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하는 부분이 스스로의 가장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을 냉철하게 인정하고 있다. 모든 게 눈을 보고 마음으로 느끼면서 생각이 좌우하여 판단하고 행동하게 되는 게 아니겠나? 결국 세상을 사랑함도 이와 같아서 이를 제어하는 시선은 말씀으로 눈을 고정하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읽고, 묵상하고, 사는 일이 곧 하루하루 포개져 어느 날 주 앞에 서게 될 것인데,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이를 두려워할 줄 알고, 자신의 약함과 죄악 됨을 인정하는 데서 주 앞에 온전할 수 있다. 회개 없는 은혜는 없다. 은혜의 무게는 회개의 강도와 같다. 내가 이처럼 주의 말씀 앞에 앉는 것을 하루 일과 중 우선으로 놓는 것은 아주 단순하지만 ‘이것이라도 할 수 있을 때 하자’는 생각에서다. 정말이지 내가 받은 은혜에 비해 나는 하는 일이 너무 없어서 말이다.
누구는 올해도 어디 선교를 가네, 목회를 어찌 하네, 무슨 선행으로 전도를 하고,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참 한심하고 부끄러워서 말이다. 하는 것도 없지만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왜 나 같은 자를 이처럼 사랑하심으로 그렇듯 끝내 돌이켜 서원을 감당하게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종종 든다. 특히 요즘은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도 지겨워서 아흔 살을 살고 있는 장모를 볼 때마다 나의 남은 30년을 생각하면 아찔할 지경이다. 어제도 같이 아파트 단지 내 카페에서 손위처남과 아내가 창신동 이야기를 나누는데, 휠체어에 앉아 거동도 어려운 이가 자신도 같이 가서 어딜 수리하고 무얼 청소하겠다며 나서는데 그것이 경이로울 정도였다. 부모님은 물론 아내도 그렇고, 이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어디가 아프거나 병이 들어 하루를 건사하는 일이 벅찬데도….
엊그제 목과 어깨에 맞은 주사가 뭉쳐서 밤새 뒤척이다 끙, 하고 돌아눕다 깼다. 오늘은 건강검진 예약일로 피검사니 초음파니 위내시경이니 하는 것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도 일찍 깨서 말씀 앞에 앉았다. 나는 늘 사는 게 일이라, 힘겨워하다가도 나보다 더한 이들을 볼 때면… 그래서도 이번에 욥기서는 다른 때보다 공감이 크다. “만일 내가 허위와 함께 동행하고 내 발이 속임수에 빨랐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5-6).” 할 정도로 저는 당대에 의인으로 나름 선을 다하며 살았는데, 이와 같은 고난으로 주 앞에 절규하는 것이다. 그러는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삶을 살았으니, 은혜가 아니고는 대책이 없다.
하여 기도하기를,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19:37).
부디 남은 생이라도 그러했으면… 더는 상념에 젖지도 말고, 허황된 생각으로 ‘다른 것’에 시선을 두지 말고, 오직 주만 바라기를.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4:8, 5:7).
이어서 다윗의 기도로 읊조리면,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
…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포악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들은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시 140:1, 4).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눈으로 보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죄성을 가진 자로서 나는 주께 구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
(6).
그러하면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 할 때에 나의 온전함은 주를 바람에 있을 뿐, 아무 것도 내어드릴 게 없어 송구할 따름이지만,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12-13).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0) | 2025.11.01 |
|---|---|
|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0) | 2025.10.31 |
| 나를 아시나이다 (0) | 2025.10.29 |
|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다녔느니라 (0) | 2025.10.28 |
|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0) | 2025.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