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하현. 2025. 10. 31. 05:09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욥 32:7-9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시 141:5

 

 

그동안 참관자로 있던 엘리후가 입을 열었다. 저는 욥의 독백(1-3장)에서부터 친구들과의 3차에 거친 변론(4-27장), 그리고 욥의 찬송(28장)과 욥의 후기 독백(29-31장)에 이어 오늘 등장하여 37장까지 마치 새로운 논객으로 변론한다. 오늘은 간단한 그의 소개와 변론에 나서게 되는 입장이 나타난다. 엘리후의 등장은 갑작스럽다. 그가 어떻게 욥과 친구들 사이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성경은 욥의 소식을 듣고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함께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는 서로가 논쟁할 때 엘리후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따라서 엘리후가 어떻게 욥과 그의 친구들 사이에 있었는지 모른다.

 

추측해 보면 욥과 혈연관계로 가까이에 항상 있었던 사람으로 여겨진다. 엘리후가 욥의 재앙을 처음부터 보고 듣고 곁을 지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엘리후가 어떻게 욥과 친구들 사이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성경이 굳이 조명해주지 않으신다. 다만 그렇지 않을까 싶다. 중요한 것은 엘리후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오늘 본문이 밝히듯이 엘리후는 욥과 친구들의 긴 논쟁을 다 보고 듣고 있었다(4-27장). 그러한 논쟁이 아무런 결론도 맺지 못하고 끝났다. 친구들은 친구들대로 할 말을 잃었다. 욥은 욥대로 자기주장만 되풀이하다 종결되었다. 이제 더 이상 논쟁이 이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친구들이 욥과의 논쟁에 실패한 것처럼 더는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이 불공평한 분으로 결론지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시다는 명제를 뒤집는 것으로 용납될 수 없는 문제다. 그러므로 곁에서 마치 참관자로만 있던 엘리후는 욥과 친구들의 변론이 종결되자 급기야 자신이 하나님을 옹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개입하게 된 것이다.

 

이를 밝히려는 듯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32:7-9).” 하고 자신이라도 나서야 할 것 같은 정당한 명분으로 저들 대화에 참여하게 된 것임을 밝힌다. 직전에 욥은 자신의 의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로인하여 세 친구들의 변론이 벽에 부딪히듯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엘리후가 듣다못해 그 대화에 끼어든 것처럼 시작하고 있다.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1).” 그렇게 엘리후가 화가 나서(?)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3).” 대화에 참여하게 된 것을 밝힌다.

 

저가 왜 화가 났는지 네 번이나 언급한다(2-5). 그가 분노한 이유는 우선 욥이 자기의 의를 지나치게 주장하다보니 하나님을 불공평한 분인 것처럼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또 친구들 역시 그러한 욥의 주장과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못하면서 욥을 정죄하기만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잘못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에 화가 났다. 그렇게 자기가 개입하게 된 것을 알리며 엘리후는 자신의 변론에 경청해 줄 것을 부탁한다(6-10). 여기서 엘리후가 밝힌 것처럼 자신의 나이가 가장 연소함으로 듣기만 했다고 한다. 그것은 연로한 사람에게 지혜가 있다는 전통을 존중하여 욥과 그 친구들의 변론을 듣기만 했던 것으로 설명된다. 곧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고단당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누구든지 죄인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1절을 보면 이제까지 번갈아가며 욥을 공격하던 세 친구들이 말을 그쳤다. 그쳤다는 것은 그만두었다, 실패했다는 뜻으로 그 의미가 전달된다. 곧 욥의 친구들이 욥의 말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었거나, 침묵함으로 논쟁에서 자신들이 패한 것을 인정하는 것이거나… 더 이상 말할 필요를 잃었거나 한 것을 의미한다.

 

어쨌든 그렇게 되어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1-3).” 하고 그의 개입의 개연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마치 욥이 자신의 죄에도 불구하고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자기가 의인이라 고집하므로 더 이상 욥을 설득할 수 없어서 논쟁이 종결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이 욥과의 논쟁에서 더 이상 말을 않은 것은 욥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무조건 의인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욥의 ‘고난의 원인’을 잘못 이해한 상태에서 욥과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거듭하여 현세적 인과응보로 욥이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접근하였다. 그에게 죄가 있기 때문에 고난이 왔다고 여긴 것이다. 욥은 자신의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정직하고 순전한 삶을 살았음을 드러내었다. 그래서 자신의 고난의 원인이 죄에 있다는 친구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자기의 의로움을 거듭 주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듯 우린 어려움이 닥치면 물론 되돌아보아 회개할 것과 감사할 것을 알고 주를 찾아야 한다. 이를 두고 ‘죄의 결과’로 단정지을 수 없고, 특히 그 당사자를 정죄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본인으로서도 그 상황을 통해 평소의 자신과 다른 모습으로 주 앞에 서야 한다. 누가 지난 월요일에 허리디스크수술을 하고 병원에 누워 회복이라고 했다. 어쩐지 얼마 전부터 자주 생각이 나고 마음이 밟혀서 새삼스럽게 잘 지내는가, 하고 연락을 먼저 하고는 답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날 때부터 기형적인 몸으로 장애를 가졌고, 여러 보육원을 전전긍긍하다 성인이 되어 자립하고 혼자 살고 있었다.

 

이 친구와의 만남은 늘 극적이었다. 어릴 때 찾아간 어디 장애특수학교 보육원에서 알게 되어 거의 매주 토요일에 찾아가 꽤 오랜 시간 가깝게 지냈다. 내가 대학을 가고 결혼을 하고도 한동안 그곳을 다녔으니까 얼추 10년은 더 될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사라졌던 그와 다시 만난 것은 우연한 때 연락이 닿았다. 그곳에서 생활하던 두 친구가 같이 찾아왔는데 나는 목사가 되었고, 한 친구는 그 학교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고, 이 친구는 혼자 생활하며 금속세공기술자가 되어 있었다. 그런저런 대화를 하다 이상하다 싶었는데 어디 이단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현재 그 교주였던 이는 성폭행으로 복역 중이고, 그 친구는 이후 얼마 동안 성경공부를 하듯 매주 토요일마다 찾아오다 그 교회의 실체를 인정하고 현재는 집 가까운 교회로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저런 사연과 어떤 문제가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인연이 닿았고, 뭐라 한동안 그 문제를 놓고 씨름하다 또 소원해지고는 했다. 그렇게 또 서너 해가 지나 이번에도 다시 연락이 닿은 것이다. 나는 어릴 때 나의 어려움을 이겨내게 한 원동력을 꼽으라면 하나는 나환자촌 교회에서의 남다른 중학교 생활(?)로 그곳 또래들과 어울렸던 일과 다음은 우연처럼 교회 학생회 봉사로 갔던 이 특수학교 아이들을 만나면서 뭐라 표현하기 힘든 유대감? 동질감? 등을 느끼면서 고등학교 생활을 하고 대학에서 성인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뭘 대단히 봉사했다는 게 아니라, 그냥 다녔고 만났고 알지 못하면서도 느낌이 남달랐다.

 

여하튼 인생의 고난은 모두들 각양각색이겠으나 이들의 생애 앞에서는 누구라도 함부로 자신의 고난과 역경을 운운할 수 없다. 상대적으로 저들은 불가항력적으로 일반 사회로부터 격리되거나 따로 수용되어 분리된 삶을 살아야 했으니까… 나는 나의 어떤 힘듦이나 고통을 안고 씨름하다가도 저들의 문제 앞에 서면 뭐라 할 말을 잃곤 했다. 그래서 오히려 위안을 얻고 위로를 받기도 했다면 말이 좀 엇나가는 것일까? 내 인생에서 가장 예민하고 불확실하던 청소년 시절을 하나님은 이처럼 특별한 만남과 관계와 생활로 버팀목이 되게 하셨는지, 울타리가 되게 하셨는지….

 

어제는 오후께 통화를 하고 그저 좀 나아졌는지, 통증은 어떤지만 묻고 듣다가 끊어야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기도를 못해준 것도 생각나고, 요즘 교회 생활은 어떤지, 신앙은 잘 지켜 살았는지 등 정작 물었어야 할 말을 하지 못한 것 같아서 마음이 좀 어려웠다. 다음 주까지는 더 입원을 해야 하고 이어서 요양병원으로 옮겨서 재활치료까지 할 생각이라고 하니…. 그때마다 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내가 했던 말이 ‘우리의 조건’이랄까? 불행? 슬픔? 고통? 이러한 환경이 어떤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목적에 따른 것임을 자주 언급하곤 했다.

 

이는 내가 목사가 되고서야 뒤늦게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아주 어릴 때부터 나의 부친은 항상 기회 있을 때마다, ‘특별히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설명하곤 했다. 때론 듣기 싫고, 인정하기 싫고, 반감까지 생겨나던 그와 같은 설명이 이제는 모두 인정이 된다. 오늘 여기 고난을 당하는 욥이나 그 세 친구들 그리고 등장하게 되는 엘리후에 이르기까지,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의 입장으로는 섣불리 뭐라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이해’에 대하여 나는 더 신중해진다. 때로는 어떤 말보다 침묵과 묵상으로 있는 듯 없는 듯 가만히 있는 것으로 족할 때가 있다.

 

우리 주께서도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그럼에도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6).” 그리하여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 곧 오늘의 나로 살 수 있는 이 신앙과 감사로는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2).” 이 가운데 복되고 아름다운 순종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함부로 나서 입을 열 것이 아님은,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 14:3).” 감히 우리가 이 땅의 기준으로 ‘더’와 ‘덜’의 차이를 차별로 놓고 판단하기 십상인데,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5).” 우린 다만 각각의 각자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 그럴 때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6).”

 

곧 오늘 이 질병이나 역경이 건강이나 성공과 다르지 않다. 하면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약 4:11).” 곧 우리가 빠지기 쉬운 오류 가운데 가장 흔한 함정이 남의 고난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이다. 함부로 판단하여 정죄하는 것이다. 흔히 ‘그럴 줄 알았어!’ 혹은 ‘그래야 하는 거 아냐?’ 하는 따위의 어떤 당위적인 논리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릴 때 어처구니없게 나병이 들어 소록도로 끌려가고, 갖은 고생을 겪으며 양성에서 음성 판정을 받은 후 막무가내로 선정해준 구역에서 살아야 하는 정착촌에서의 평생 불구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과 저들의 하나님 사랑을 기이히 여겼다. 그리고 이어지는 우연한 만남으로의 보육원이면서 특수학교에서 고아 아닌 고아들로 살아야 했던 장애의 또래들 삶을 지켜보면서… 내가 다 알 수 없는 고통의 무게 너머 어디에서 하나님이 이뤄가시는 놀라운 구원 사역을 그때는 잘 모르면서도 실전에서 같이 보고 느끼며 자랐다. 나는 더러 나의 생애 전체가 기이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그러는 동안 배우게 된 것 중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 25:11).” 하는 것으로 그전에 얼마나 허튼소리와 그릇된 속단과 판단으로 나 자신을 비롯하여 남의 생을 비판하며 살았었는지 모른다! 그럴 때 우리 주님은,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이와 같은 침묵의 깊이를 무슨 수로 다 열어볼 수 있을까? 그러므로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딤후 2:14).”

 

하여서 말이란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것으로 서로가 망친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딛 3:8-9).” 서로의 말에는 족함이 없고 다툼만 인다. 대부분은 듣는 것만으로도 족한 말들이 더 많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오늘 본문에서 다른 건 차치하고 엘리후가 화가 났다는 데서 나는 다만 의아하고 불안하다. 우린 저마다 급해서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잠 18:13).” 하여 특히 요즘 유튜브가 여러 사람 망친다는 생각을 종종한다. 보면 대체로 어떤 확신으로 말하는 이들의 근거가 어느 박사, 목사, 어느 유명한 아무개의 유튜브를 통해 듣고 아는 것이 대부분이라… 종종 누가 내게 성경 어디를 이야기하다 어디 링크를 하나 보낼 때면 허탈해진다. 마치 하다못해 춘향전이나 홍길동전이니, 누구의 위인전이나 작품 하나 제대로 읽지 않고 그저 들은 말로 전부 다 아는 것처럼 위태롭다. 더욱이 성경에 대한 확신으로 그럴 때면 아찔하기까지 하다. 오늘 엘리후에 대한 첫인상 같다.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잠 29:20, 전 7:9).”

 

하여 오늘도 시편으로 기도하여,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시 141:1-2).

 

하여서,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3).

 

나는 말의 힘을 알고 이를 더 조심할 것은,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5).

 

주의 입이 되어 내게 들려주시는 말에 귀 기울이게 하시고, 나로 주의 뜻으로 온전히 살며 전하게 하시기를.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8-9).

 

부디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나만은 온전히 면하게 하소서

(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