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
욥 33:12-14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시 142:7
더러는 옳은 말이 더 아프다. 보편적인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로 각각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신다. 이를 알고 아브라함의 종은 기도하였다.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창 24:12).” 하나님은 이삭에게 개인적으로 찾아와 이르시길,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26:24).”
또한 앞서 사라의 몸종 하갈이 쫓겨났을 때도 직접 찾아오시고,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고 물으셨다(16:8). 이어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21:17).” 하고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시간이 흘러 모세를 찾으실 때도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 하고 두려워하는 모세에게 자신을 밝히셨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15).” 하여 오늘에 이르러는,
뭇 나라의 고관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임이여
그는 높임을 받으시리로다
(시 47:9).
그리하여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마 22:32).” 하고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곧 오늘 이 시간, 나로 나의 하나님으로 만나주시고 말씀하신다. 앞서 저들은 죽은 자들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있어, 내 곁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각각 그 산 자의 하나님을 증거 한다. 곧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과 같다(막 12:26).
이를 바울은 ‘그리스도의 편지’ 또는 ‘그리스도의 향기’라 하여 오늘 우리의 ‘살아있는 신앙’을 돌아보게 하였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2:15, 3:3).” 그러므로 살아서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사명으로 오늘을 사는 이유가 된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후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앞서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나쁘게 살면 저주를 받는다’는 식의 경험과 전해져오는 지혜의 전승을 따라 말하였던 엘리바스와 소발과 빌닷 세 친구의 권면보다 더 막연하게 들린다. 옳은 말인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누구라도 그리 완전할 수 없으면서 마치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습성과 같다. 스스로도 그와 같은 처지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약하고 연약할 뿐이면서 남의 잘못과 실수에 대해서는 ‘옳은 말’만 골라하는 경향이 있다.
앞에 32장에서 느닷없이 ‘엘리후’란 인물이 등장하였고, 이어서 37장까지 저의 말을 다루게 된다. 저의 네 차례 연속되는 말과 말을 두고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하나님을 말하려는 듯 장황하다. 먼저 자신의 변론을 경청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내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33:1).” 다소 위압적이다. 마치 요즘 ‘내란재판정’에서 대통령이었던 이가 자기변호를 빙자하여 증인으로 나오는 이들에게 말하는 듯하다. “내가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말하는구나 내 마음의 정직함이 곧 내 말이며 내 입술이 아는 바가 진실을 말하느니라(2-3).”
그러면서 밝히길 자신이 그러하니 욥에게도 듣다 할 말이 있으면 변론하라고까지 한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그대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4-5).”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대등하다는 것을 말함으로 자신의 말이 공평한 것임을 과신한다. “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내 위엄으로는 그대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는 그대를 누르지 못하느니라(6-7).”
우선은 저의 말에 일리가 있다. 대화란 주고받으며 서로를 존중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실상은 은연중에 서로는 각기 우위를 점하려고 한다. 혼자 말을 길게 하거나 마치 정답처럼 말하거나 그러한 확신 때문인지 상대의 말에는 존중을 더하지 못한다. 듣기보다 말하기를 더 하려는 사람은 대체로 그렇다. 자신이 아는 것으로 상대를 누르려 하지 단지 한 견해로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종종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말이나 행동에서 가르침이 크다. 일찍이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있는 그대로 말씀을 듣고 구하고 묵상함으로 살면 좋을 텐데 저마다의 해석에 해설을 더하고, 심지어는 주석을 달고 여러 견해를 더함으로 우린 자주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것으로 기준을 삼으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상식을 초월한다. 모두의 이해와 수긍을 구하는 게 아니다. ‘너’에게 말하는 ‘나’의 말로 족한 선포이다. 하나님은 오늘 엘리후를 통해 이를 듣게 하신다. 욥의 변론을 비롯하여 그 친구들의 말에서도 우리 안의 저들 하나하나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선언이다. 흔히 ‘상식적으로’ 접근하였을 때 성경은 왜곡되거나 다수의 견해로 함몰된다. 나는 엘리후의 자기 소개 후 첫 변론이랄 수 있는 오늘 본문에서 문득, 보편적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소유격 ‘의’를 두어 개개의 ‘너와 나’로 오늘 우리 각자의 하나님으로 그 관계를 설정하셨다. 어릴 때는 마치 세상이 온통 한 가지뿐인 듯하나 자라면서 우리는 그것이 모두 각각의 세계인 것을 알게 된다. 이를 예수님의 말씀에서 바울의 주장으로 다시 읽으면,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여기서의 그 대상 어린 아이는 같으나 다르고, 다름으로 개별적이라, 말씀을 묵상하는 일이란 ‘나의 하나님’을 마주하는 일이다.
“너희 안일한 여인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사 32:9).” 각각의 우리는 한 하나님을 섬기지만 각자의 하나님으로만 마주한다. 누구에게는 ‘친밀하고 부드러운 아버지’로, 누구에게는 ‘엄하고 무서운 아버지’로 느껴질 수 있다. 이는 서로 다른 하나님 아버지여서가 아니라 각자의 기질과 성품과 삶의 환경까지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는 ‘안일한 여인’으로든지, ‘염려 없는 딸’로든지 주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말이다.
이는 서로 다른 것 같으나 또한 같은 것으로,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행 2:14).” 그러할 때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4).” 즉 우리의 지식으로나 이해로가 아니고, 상식으로나 다수의 의견으로도 아니고 오직 ‘성령으로 말하게 하심과 듣기’로만 가능해진다.
가령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대화할 때 어려움을 느낀 것은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요 4:9).” 먼저는 관습과 일반적인 인식으로 대화의 거리를 두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 하고 예수님은 ‘너에게 나’로 말씀하시고 요구하심을 알리신다.
그러자 여자는 또 그릇을 핑계로 자신의 상황을 가지고 회피한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전혀 다른 생수가 그녀 앞에 있음을 알리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1, 13-14).” 여자가 이를 갈구하자, 예수님은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 하고 다소 엉뚱한 말씀으로 되받으셨다.
예수님은 물을 달라 하셨고, 여자는 서로 상종하지 않는 일반적인 관계로 이를 경계하였다. 여자는 물을 줄 그릇과 뜰 우물의 깊이를 핑계로 거리를 두려고 하였고, 예수님은 목마르지 않을 생수가 있음으로 응수하셨다. 여자도 이를 원하자, 평생을 의지하며 살았을 ‘남편들’을 불러오라고 하신 것이다. 곧 예수님은 여인의 목마름을 아시고,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8).” 하시자 여자는 또 보편적으로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 하고 이해하였다. 나름의 상식으로 답하여 다들 그리 알고 있는 보편적인 진리로 말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20).”
이에 예수님은 물을 원하신 것은 참 된 예배를 원하신 것으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3-24).” 하여 그 시간도 지금, 바로 이때,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일인 것을 알리신다. 오늘 이 성경의 말씀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곧 이 때라, 나의 이야기로 나를 찾아오시는 말씀이다. 여자는 자신이 아는 진리로 답하지만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25).” 그러나 예수님은 인자하심으로 응답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26).”
이러한 내용을 여자가 동네 사람들에게 전하였고,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29-30).” 그 자리로 온 자들은 모두 들었다. 그것이 개별적으로 마주하는 첫 지금, 곧 이때라!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42).” 하는 저들의 들을 귀가 귀하다. 이를 아시고 예수님은 일러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37-38).”
그러니 점점 더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묻는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지나치게’ 어느 하나가 되려 하나 아니라, 주를 경외함으로 이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해야 한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하여 오늘 엘리후의 당연한 듯 보편적인 진리를 들으면서,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욥 33:12-14).” 하는 말에서는 감동이 적었다.
앞에 세 친구들의 일방적인 훈계와 오늘 이 엘리후의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진리 앞에서 문득 떠오르는 말씀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하심인데, 곧 우리는 저마다 각각의 하나님은 다른 듯하나 그 하나님은 한 분으로 같으시다. 다른 것은 우리의 각기 다른 믿음의 분량뿐이다. 다만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이렇듯 오늘도 나로 이른 새벽 말씀 앞에 앉히셨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친구와 통화하고 문자하고, 그의 처지를 놓고 주께 기도하였다. 지방 어디에서 살면서 분식집으로 근근이 이어오던 살림을 접고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 친구의 문자를 받고 위해서도 기도하였다. 그러는 동안 나는 이번 주에 두 번은 외과와 한 번은 내과를 가서 치료와 검진을 받았다. 주초와 주중에 간 통증의학과에서는 목과 어깨와 무릎에 도합 열여섯 곳에 이르는 주사를 맞았고, 내과에서는 위염을 비롯하여 각종 원인으로 인한 한보따리 복용해야 하는 약을 탔다. 그러는 동안 나는 개별적으로 ‘나의 하나님’을 찾았고,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구하였다. 같은 기도이나 서로 다른 맥락으로 하나의 간구가 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3-35).” 우리는 이와 같이 알 수 없는 앎으로 주를 구한다. 그렇게 해서 오늘은 어느 날 굴속에서 구하였을 다윗의 기도로, 이 아침 나의 굴속에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 곧 기도).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시 142:1-2).
주 앞에 나를 아뢰고 그 사정을 구할 수 있는 것으로 복이어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5-6).
그리하여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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