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욥 34:36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시 143:8
우리는 저마다 그 속에 앙금을 가지고 산다. 우리 속에 남아 일생을 괴롭게 하는 어떤, 가난에 대한 찌든 마음이거나 누구로 인한 서운함이거나 억울함, 노여움, 증오 등이 모두 포함된다. 하여 누군가는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이 분노이고, 화가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고 한다. 화는 그 속에 못마땅하고 언짢은 감정의 총화다. 이것으로 우리 영혼은 상하여, 상한 영혼으로는 주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 곁에서 더러 듣는 소리가 어릴 적 아주 까마득한 옛이야기인데도 여전히 어떤 감정은 노여움으로 그를 지배한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주의 사랑을 바르게 인정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해서 누구는 목회를 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친밀하게 부르지 못한다. 누구는 입만 열면 어릴 적 어느 사건을 두고두고 또 이야기 한다. 나는 아흔이 넘은 장모와 매일 예배를 드리면서 저의 속의 이와 같은 앙금을 놓고 씨름하는 것 같다. 무슨 말 끝에 다시 나오는 ‘그 이야기’는 한(恨)이다. 한이란 우리 속에 슬픔이 응어리진 슬픔 덩어리다.
이에,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어떤 이는 이른 나이에 암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의 운명(殞命)을 50여 일 앞두고 글방 가까이 병원으로 오게 하셨다. 나는 먼 길을 다닐 수 없어 그간 전화로나 문자로만 위로하던 것인데, 바로 5분 거리에까지 데려다놓고 저를 직접 만나게 하셨다. 그때는 나 역시 목사고시를 두 번째 떨어지고 상심하여, 역시 내 길이 아닌가? 하고 시험에 들어 있었다. 그렇게 찾아간 것이 저의 가는 길 50여 일 동안 매일 이루어지게 하셨고, 우리로 에베소서와 빌립보서를 같이 나누며 그의 속의 앙화(殃禍)를 풀어내게 하셨다.
그 내용을 열거할 수는 없지만… 그때 같이 나누었던 말씀이 우리가 창세전에 택정함을 받은 주의 자녀라는 사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이것으로 우리가 사는 이유와 목적이 정리되었다.
그러나 저마다 그 속에 있는 응어리로 인해 안고 있는 서러움이 문제였는데, 이는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8-19).” 하고 이어지는 바울의 설교에서 우리의 강퍅한 마음을 무너뜨리셨다. 곧 그가 안고 있던 어떤 죄의식, 그것 때문에 자신이 죽을병에 걸렸다고 자책하며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다. 나는 그의 사연을 들으며 어쩌면 별 것 아닐 수 있는, 누구라도 그런 정도의 후회와 자책은 있을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이 저의 영혼의 막힌 담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보다 한량이 없으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를 풀기까지 그처럼 운명의 시간도 연장하시는 거였다. 아무리 몹쓸 죄라 하여도 그 죄의 길이나 깊이나 높이나 너비보다 더욱 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인정하면서… 진정한 회개의 눈물을 흘렀고 감사의 찬송이 나왔다. 그는 평안히 운명하였고 나는 그의 임종예배까지 인도할 수 있는 영광을 얻고서야 죽기까지 목사가 되는 것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듯 오늘 엘리후의 욥에 대한 질타가 그 도를 넘어 저주가 같음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저의 어떤 방어기제가 저로 하여금 그토록 강한 어조로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36).” 하는 것일까? 흔히 누구 일에나 어떤 일에 유난히 동화되어 더 화를 내거나 끔찍하게 여기는 것은 그도 같은 성질의 ‘어떤 일’을 안고 살아서이다. 우리 안에 두 마음이 있어서 한쪽은 극도로 싫어하면서 한쪽으로는 극도로 갈망하는 끝의 성질이 있다.
기껏 은혜로 살다 어느 순간에 어떤 일이 매개가 되어 전혀 다른 자아를 끌어내는 것을 종종 본다. 하나님은 나로 이를 풀어내기까지 내버려두셨다. 곧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것이 우리 속에 박혀 있는 응어리다. 주 앞에 늘 울고불고 애원하면서도 놓기 싫어하는… 극도로 증오하면서도 극도로 사랑하는 것으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는 말씀은 은유다(롬 1:21-23).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을 다해 교회에 봉사하고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 정도로 희생하고 선을 행하며 살았으나 아무 유익이 안 되었던 것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하나님의 사랑으로가 아니면 모든 게 다 허사여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 버려야 한다. 깨야 하고, 깨져야 한다. 누구 때문이든지, 자신 때문이든지….
동생은 목회를 하면서도 문득 저 어릴 적 어느 기억을 두고, 부모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는 식의 감정이 여전하여 스스로를 무장하고 산다. 흔히 남의 사연은 유치한 듯하나 그것은 운동화 속의 작은 돌멩이 하나 같아서 괜찮은 듯하다 어느 순간에 몹시 아프다. 마치 어릴 때 수술을 하고 뻗정다리로 3개월을 살아야 했는데, 수술한 곳보다 발목 끝 깁스 안쪽 종아리 있는 곳이 너무 아픈 것이다. 그것 때문에 보채고 너무 아파서 울었는데 의사는 수술한 곳도 아니고 해서 아플 리 없다며 일주일 가까이 진통제만 주었다. 희한한 것은 진통제로도 소용이 없다. 결국 깁스를 한 뼘 길이까지 뜯어냈는데, 공기알만한 석회 알갱이가 뭉개져 굳어있었다. 그것에 짓눌려 어린것이 그렇게 아프다고 울면서 호소했으나 부모는 물론 수술한 의사도 그럴 리 없다며 외면했으니….
그 별것 아닌 것 같은, 작고 보잘것없는 우리 안의 응어리는 그렇듯 평생을 우리 영혼에 박혀 거품을 물게 한다. 그 거품을 게워내고 또 게워내듯 우리는 기도하며 애원하고 주 앞에서도 서럽기만 하였다. 그러다 훗날 그것이 진주가 되어 우리로 찬송이 되게 하셨으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리하여 장애 아이를 두고 부부는 날마다 퇴근 후면 성전에 올라서 운다. 게워내듯 울고 울다 어느 순간 저들 부부 집사 내외는 교회의 기둥이 되었다. 누구는 사모가 되어 일생을 목회 현장에서 인자한 어머니의 역할을 잘 감당했는데, 실은 자신의 모친이 임종하기 직전까지 그 머리맡에서 묻고 또 물었던 말이… 엄만 왜 한 번도 날 따듯하게 안아주지 않았어? 날 왜 사랑하지 않았어? 날 왜 그렇게 미워했어? 하고 서럽게 되묻다 떠나보냈다. 이를 말하면서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그녀는 서러움으로 꺼이꺼이 울었다. 이렇듯 다들 그 속에 박힌 어떤 알갱이 하나가 계속 그 영혼의 예민한 속살을 후비고 찔러 슬픔으로 게워내듯 기도한다.
이것으로도 복이라면 복이랄까? 그리하여 주를 앎으로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 앞에 승복하면서 천국이 열리는 것이어서, 누가 임종 하루 전에 환한 얼굴로 저 천상을 바라보며 감격하였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실까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내 일생에 이렇듯 침묵하시고 외면하신 걸까요? 나는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천국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요? 사는 날 동안 지옥 같았는데, 죽어서도 지옥이면 어쩌지요? 우리 안의 작은 돌멩이 하나 같은 작은 응어리가 그처럼 우리 일생을 게워내고 또 게워내듯 살게 하는 것이어서,
“주께서 침묵하신다고 누가 그를 정죄하며 그가 얼굴을 가리신다면 누가 그를 뵈올 수 있으랴 그는 민족에게나 인류에게나 동일하시니 이는 경건하지 못한 자가 권세를 잡아 백성을 옭아매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9-30).”
잔혹할 정도로 욥을 비난하고 있는 엘리후의 말 속에 답이 있다. ‘경건하지 못한 자가 권세를 잡아 하나님의 백성을 옭아매지 못하게 하려 하시려고’ 즉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바울의 설교도 이와 같은 의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권리를 빼앗기지 않으신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7).”
하여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려고 저마다 그 긴 시간을 정말이지 하찮고 보잘것없는 감정에 시달리며 꺼들려서, 미친 년 머리채 잡혀 끌려가듯 하지 않으려고 하심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피로 값 주고 사신 이유였다. 그런즉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하심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어느 사모는 일생을 더 인자하고 자상한 어머니와 같은 심정으로 성도들을 사랑하였다. 그렇게 선천적 장애 아이를 둔 부부 집사는 교회의 핵심 일꾼이 되어 산다. 그렇게 누구는 임종 50여일을 나로 하여금 주 앞에 순복하게 하였다.
결국은,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우리가 같이 이 말씀을 붙들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그가 떠나고 며칠 후 그의 신랑 되는 이가 찾아왔었다. 아내를 먼저 보내고 나로 함께 하게 하신 마지막 ‘50여일의 아침’마다 나누었던 말씀을 자신도 듣고 싶다는 거였다. 신기하지? 나는 그때 마침 세 번째 목사고시를 준비하고 있었고, 저는 금요일마다 퇴근하고 두 시간이 걸려서 찾아와서 두어 시간 말씀을 나누고 두 시간이나 걸리는 길을 돌아갔다. 나는 그때 이 모든 일이 저절로,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찾아간 것도, 오라한 것도 아니면서 또한 그때마다 말씀은 저절로 말씀이 되어 전하여졌다.
지금 누가 나더러 하라 하면 내가 할 수 있겠나? 성령의 인도하심이란 오늘 이 엘리후의 어처구니없는 말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다. 엘리후가 말하였다.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4).” 이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교만하기 이를 데 없는, 잔인하고 무도할 정도로 가치 없다. 그러한 슬픔의 시간이 게거품처럼 우리로 게워내고 개워내어 기도가 되게 하고, 어느 순간 그와 같은 시간으로 우리의 믿음이 진주가 된다.
우리 안의 이와 같은 썩을 죄성 때문에 예수님은 이르시길,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우리가 살면서 사는 동안에 신앙이란, 이와 같이 죄성을 게워내는 일로,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19:29).”
버리지 못한 모든 것으로 우리는 오늘도 박힌 돌 같이 아프다. 깁스 한 뼘 종아리에서 뜯어낸 작은 손톱만한 석회덩어리를 나는 한동안 구슬처럼 가지고 다녔다. 담당했던 의사는 무안했던지 기념품이라며 어린 내 손에 쥐어주며, 이 덕분에 수술했던 곳이 아픈 줄도 몰랐겠다? 하고 되묻는데 얼마나 짓궂고 얄밉던지! 우리의 상한 영혼은 그것으로 죽을 것처럼 슬프고 고통스러워 게거품 물듯 울고 또 울며 게워내는 만큼 그 기도의 무게로 주의 긍휼하심을 알게 된다. 알고 나면 감사뿐이라, 나는 괜한 소리도 이제 피식 웃음으로 난다.
아내와 늘 점심께 산책 겸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운동이라고 하는데 나의 보복으로 7천보 정도로, 저기 시장 입구나 사거니 횡단보도 앞에서 별의 별 사람들이 더러는 물티슈며 건빵, 사탕을 건네면서 전도를 하거나 어디 홍보전단을 건넨다. 그러면서 이제는 자연스럽게 ‘어르신 여기요!’ 하고 이제 아는 체 하며 누구는 심지어 ‘날이 많이 쌀쌀해졌지요?’ 하고 말을 걸며 건넨다. 우리가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닌데 마치 그 건네는 말이 친밀하게 느껴진다. 어느 병원 홍보로 물티슈를 주는 이는 늘 매고 다니는 가방에다 서너 개를 슬쩍 더 꽂아주기도 한다. 뭐지? 하고 아내에게 물으면 아내는 짓궂게도 쩔뚝이 노인네라 다 알아봐서 그래! 하고 놀린다.
그런 말, 그런 시선이 더는 아무렇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게 여겨지는 것으로 오늘 묵상의 엘리후 말이 마음 상하게도 하다가 깊이를 더하는 것 같다. 저의 돼먹잖은 말 속에서도 진리는 살아있다.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12).” 그러므로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인로 인하여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시려고 오늘 우리 안에 맞춤한 응어리 한 알갱이씩은 놓아두셨다. 이는 징계이나 사랑이다.
스스로 매듭을 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 매듭은 풀리는 게 아니라 녹이는 것이다. 우리의 눈물의 기도로 게워내고 게워냈던 슬픔의 애통함으로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그렇게 우리 심령은 가난하여져 주만 바란다. 천국이 가깝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3).” 하여서,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 19:12).
오늘도 주 앞에 엎드리며,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143:8).
하고,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1).
주께 기도함이다.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
(6-7).
그래서 오늘도 새벽을 깨우리니,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하고,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할 때에,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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