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욥 35:13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 144:4, 15
저마다의 판단과 기준이 있고 그와 같은 고집으로 산다. 뭐라 한들 들을 리 없고 듣고자 하지 않는다. 엘리후의 변론이 이어지고 있다. 33장부터 오늘로 3차에 이른다. 우리의 의를 상대적으로 놓고 그 가치를 논하고 있다. 이는 자기 의를 주장하며 회개하지 않은 듯하여 욥을 비판하기 위함이다. 하여 “그대는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그대는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2).” 하고 한 번 더 상기시키켜,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5).” 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려고 한다.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6-7).” 하는 것으로 엘리후의 관점이 어떠한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오해가 심각한 것을 알게 된다. 먼저는 우리의 죄에 대하여,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하는데 이는 이삭과 야곱이 태중에 있을 때의 말씀으로 그릇된 관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3).” 하심인데,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 17:34-35).” 하는 원리를 알지 못함이다. 곧 우리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따로 구별하여 세우신 자들이다. 하여,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곧 오늘 날 외치는 ‘모두가 하나’라는 원리로는 감당이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하여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갈 6:12).” 할 때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 그리하여,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고후 1:13-14).” 하여 바울은 그토록 강하게 붙들고 놓지 않았던 것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이것 외에 더는 무엇도 귀하게 여겨 나의 관심을 분산하지 않으려고 한다.
곧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이러한 말씀으로 관점으로 비춰 엘리후의 주장과 그의 변론이 얼마나 가치가 없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이를 성경에 나타내신 것은 의외로 많은 이가 엘리후의 관점과 가치로 사회를 구성하고 서로들 하나 되어 살기를 바란다. 어제도 그런 내용의 대화가 있었고, 나는 마음이 어려워서 다시 교회로 나왔다가 통화를 더 하지 못했다. 결국 저는 교회를 안 다닌지 꽤 됐는데, 자신이 아프고부터 2층인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교회 구조라 불안해서 그 뒤로 멈추게 된 것이다. 줌이나 방송으로도 예배가 가능한데, 하고 물으니 그 생각까지는 못했다는 것이고… 교회에서 심방을 온다고 하실 때도 그런저런 구차한 사연으로 사양하였다.
교회를 다니는 일, 어느 종교 하나를 가지는 일 정도로 여겨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같이 어울리는 누가 내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 신앙 이야기만 하려하고 옛날처럼 일상적인 대화가 없어 어렵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런가? 하고 웃으며 듣기에는 어떤 설명이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는데 더는 억지로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앞서 바울과 같이 예전의 모든 관계와 관심을 배설물 같이 여김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지키기 위함인데,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나는 그렇게 해서 좋은 친구들, 같이 어울리던 사람들, 내가 사랑하던 관계들을 모두 버렸다. 어떤 이에 대하여는 전화번호를 차단을 해두기까지 하였는데, 이를 어찌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제일 의지하며 따르고 좋아하던 선생과 친구로 저들은 어느 순간부터 다신론주의자가 되었다. ‘모두가 하나’로 ‘하나의 신’으로 하나님을 여겨 이 땅의 토속신앙까지도 거기에 깃든 얼을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같이 놓았다. 그러면서 반박의 여지가 없었고 재론의 가치가 없는 시각으로 나의 관심을 편협하고 이기적인 관점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여느 친구들 모임은 말할 것도 없고… 그야말로 서로가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 다른 게 되었다.
저 친구의 전화 요지도 그런 내용이었다. 건강이 안 좋아지자, 자기 연민으로 교회를 등지게 되었고 그 틈으로 옛정을 타고 곁의 천주교 친구들이 성당을 권하며 그들의 포용력으로 품으려 하였다. 하여 뭐라 한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러는 선택해야 한다. 마치 이를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은 듯 너그러운 시선으로 날카롭게 지적하는 이가 있지만 그것으로 흔들릴 수 없다. 그런 나는 편협하고 옹졸하고 이기적이고 광신적인 신앙의 소유자가 되었다.
우리의 상대적인 가치관으로의 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 앞에서 같이 견줄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다. 칼빈의 주장과 같이 우리의 절대적인 죄에 대하여 어찌 설명을 해야 할까? 마치 서로를 개선의 기회가 있는 것처럼 계도하고 계몽하여 바뀔 수 있는, 혹은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면서 하나될 수 있는 것처럼 세상은 진리를 호도한다. 이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 14:2-3).
곧 우린 누구도 자발적인 의로 의인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없다. 예전에 내가 좋아하고 같이 어울리던, 포용적이고 다채로우며 서로 이로운 것이 아름다운 신앙으로 여겼는데 그것은 신기루일 뿐임을 이제는 안다. 우린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사랑할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실 때의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이다. 하여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7).”
하나님의 자녀들로 세상에 속해 살아가는 영혼들에 대하여,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관심이 어디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하여 바울은 강한 어조로 밝히는 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곧 우리는 세상과의 단절을 각오해야 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하심도 ‘롯의 처를 생각하라!’ 하심도 같은 의미로써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 그렇듯 세상을 사랑하여 교회를 등지고, 모두가 한 신(神)으로 여겨 하나님을 여느 신들, 우상화하는 그 자체로 우리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이러한 성경의 관점을 흔들어서 희석시켜서는 안 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하여 명심할 것은 모두가 주 앞에서 의롭지 못한 죄인이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한데 우리로 흔들리게 하는 것은 두루두루 포용하고,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서로가 하나되려 하는 것이었으니,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큰 일을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71:19).
어제 한 친구와의 통화에서 내가 마음 아팠던 것은 저들의 비통한 삶의 여건이 다른 이보다 더 취약한 심경으로 그 신앙을 ‘위로와 격려’의 자리로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앞서 어떤 친구의 경우 여느 종교에 비해 천주교가 포괄적이고 포용적으로 자신을 편하게 해주고, 실제 생활에서 여러 도움과 위로와 격려로 가족처럼 대하는 게 너무 좋다면서 그리로 갔다. 누구는 보다 진취적인 기상과 포부를 안고 어느 선교회 소속이 되어 ‘같은 성경’이라 주장하지만 진리가 다른 용사가 되어 전 세계를 누비듯 비즈니스선교사로 활동 중이다. 내가 사랑하던 선생은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텍스트 사업을 하게 된 것도 저의 다신론적인 신앙으로 인함이다. 하여 저이는 누구보다 오늘의 나를 편협하고 안타까운 신앙으로 여긴다.
그러니 나는 종종 저들의 그런 관점으로의 반론에 뭐라 일일이 대응할 수가 없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나로서도 뭐라 말하다 보면 저의 시선으로는 그야말로 편협하고 옹졸할 뿐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여 소극적인 태도인 줄 알면서도 어느 정도 상대하다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친구들 단체 채팅방을 나오는 것도, 심지어 어떤 이에 대하여는 아예 그의 전화를 차단으로 설정해놓는 것도… 내가 일일이 대응하여 상대할 수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누구는 이내 주의 긍휼하심을 깨닫고 누구는 끝끝내 자기 갈 길로 가는 것에 대하여 나는 그 차이를 어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오늘까지 세 번 연속으로 엘리후가 주장하는 데 있어 일체 욥이 침묵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뭐라 대응할 가치가 없는, 뭐라 한들 소용이 없는… 절벽 끝에 서는 듯한 상대 앞에서는 그저 아찔하여 두려울 뿐이다. 어제 거론된 저들 친구들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이 나의 판단을 흐려놓기도 한다. 어느 특수학교 복지관에서 알게 된 관계로 남다른 동질감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 마음부터 약해지고 안쓰러움으로 뭐라 할 말도 못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성경은 단호하시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그렇게 딱 끊고 말아야 하는데, 늘 저 친구 일에서는 다시 보지 말아야지 했다가 이처럼 다시 연결되고 연결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배은망덕하다 할 정도로 고마운 사람이나 그의 가는 길이 달라서 아예 인연을 끊은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다 문득 그리움이 일기는 하나 그러다 말면 그만인데, 이 친구에 대해서는 어쩌다 다시 연결되면 꼭 이런 사달이 나 있어서 마음은 쓰이고 그렇듯 다시 공들여서 신앙으로 접목시키고 나면 다시 틀어지기 일쑤다. 이를 반복하다 더는 그만하자 했던 것인데 다시 이처럼 연결하심이 주의 뜻인가? 나는 어제 오후 내내 마음이 어려워 눈물도 핑, 돌았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
하신 말씀 앞에 엎드리며,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
(시 144:1).
주가 행하실 것임으로,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2).
하여 오늘까지 나로 여기에 두심일 텐데,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4).
오늘 엘리후의 관점과 다른 신앙고백으로,
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산들에 접촉하사 연기를 내게 하소서
…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5, 9).
할 때에,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15).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0) | 2025.11.05 |
|---|---|
|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0) | 2025.11.04 |
|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0) | 2025.11.02 |
|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0) | 2025.11.01 |
|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0) | 2025.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