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하현. 2025. 11. 4. 05:42

 

그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높이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의 일을 찬송하였느니라

욥 36:24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시 145:8-9

 

 

말이란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다. 말 속에 그 사람의 길이 있다. 예전에는 ‘빈말’을 귀히 여기며 살았다. 서로의 관계를 위해 ‘빈말이라도’, 속에 없으나 이를 말로 숨기는 게 좋은 사이의 필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말은 많고 길어야 했다. 서로 쓸데없는 말로 시시덕거리는 시간도 많았다. 그러나 그렇게 쌓인 인간관계는 모래탑 같아서 어떤 일로 별 거 아니게 허물어졌다. 말은 또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필수적인 요소라, 없으면 떨어져 있는 것과 같고 많으면 실수가 따른다. 상대적으로 멀어지는 게 사람 사이인데 이제 그만해야지, 하는데도 계속 붙이시는 사람이 있다.

 

한 영혼을 사랑한다는 일, 우리가 ‘사랑의 언어’로 서로를 위하고 대할 수 있는 게 아름답다. 그와 같은 말에는 먼저 지긋한 눈길이 간다. 항상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거리로도 지속된다. 이는 막힘이 없지만 굳이 새로 뚫어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다. 나는 여기 엘리후의 말을 지속적으로 들으며 말의 본심과 빈말의 한계를 생각하게 된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의 말들 속에서도 그릇되나 바르고, 옳은 말이지만 공허한 느낌도 들었다. 말이란 속빈강정이나 공갈빵처럼 그 속을 알 수 없으나 느낄 수는 있다.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할 때 나는 점점 빈말을 삼가면서 직설적이거나 단절의 침묵으로 흐른다. 더욱이 가깝고 좋아했던 사이에 대해 우리가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한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는 말의 헛됨을 못 견디겠다. 공연한 말들이라 하면 실컷 논하여도 가닿지 않는 말과 와닿지 않는 말로 돌아서면 헛될 뿐이다. 실상은 그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 말은 안내멘트에 따른 친절하고 자상한 말 그 이상도 이하도 남는 게 없다. 성경은 늘 말에 대해 주의를 더하신다.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전 5:6).” 그리하여 사도는 외치길,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하여 우리말에도 ‘침묵이 금’이라 하는 것은 아니한 만 못한 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점점 더 말의 오염은 치명적인데 이를 분출하려는 욕구는 강해졌다. 저마다 욱, 하는 심정으로 댓글을 달거나 악평을 한다. 아예 개인방송으로 이 또한 미디어라 주장하며 허튼소리를 쏟아낸다. 말로 하라는 말은 그 위력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말에 찔려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이들도 늘어간다.

 

엘리후의 네 번째 말이 이어지고 있다. 앞서는 욥이 한 말을 반박하듯 공격하였다. 오늘은 고난에 대하여 자신의 철학을 담고 있다. 자신이 아는 하나님의 뜻인 듯 진술한다. “나를 잠깐 용납하라 내가 그대에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36:2).” 하나님은 전능하시나 아무도 멸시치 않으신다고 한다(5-7).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임을 알리며,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고 밝힌다(8-10).

 

비록 의인이라도 죄를 범할 수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그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하나님의 정계를 받을 수도 있다는 주장은 성경적이다. “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 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7, 9-10).” 이것은 앞서 세 친구의 변론에서는 들을 수 없는 관점이었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은 그저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관점으로만 논하였다. 그렇게 욥을 단정하고 정죄하였다.

 

오늘 엘리후는 욥의 순전함에 대하여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의인도 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것과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가 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10).” 하면서 하나님의 징계가 근본적으로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한 것임을 안다. 하나님은 징계 중에도 회개의 기회를 부여하신다고 말함으로 욥의 회개를 촉구한다.

 

이를 볼 때 인간의 죄의 실상과 고난의 목적을 엘리후는 알고 있다. 하나님의 징계와 그의 탁월하신 지혜를 인정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2).” 하고 자신의 말이 길어지는 데 따른 환기와 주목을 이끌어낸다. 비록 엘리후의 말들로 저가 하나님에 대해 온전하게 알지는 못한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고 하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곧 하나님을 변호하려는 엘리후의 의도만큼은 인정하게 된다.

 

바울은 권하길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듣고자 아니할 때 이를 거부하는 저의 귀에 말씀으로 말하기란 서로가 피곤한 일이다. 누가 내게 너무 신앙적인 이야기만 한다며 타박을 했다. 그저 우리가 사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것인데, 나는 저의 말에 이제는 동의할 수 없었다. 가령 똑같은 일상의 말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성도들의 대화이다. 어떤 일을 말하는 데 있어 그 일의 사정은 결국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도우심을 찬양한다.

 

그렇듯 이어지는 말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흐른다. 누구와의 대화는 즐겁고 누구와의 대화는 무료하다. 이는 말의 주도권을 가지고 못 가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말 속의 주체 그 지목하는 대상이 주를 찬양하는 것일 때… 일련의 사태나 상황을 장황하게 얘기하면서도 서로는 아멘, 할 수 있다. 같은 내용이라도 누구의 말 속에는 그러하여 자기 억울함이나 탄식이 전부이면 지루해진다. 나도 어느 순간부터 이처럼 말의 즐거움이 달라졌는지는 모르겠다. 요즘 누구와 대화하면서 새삼 말과 말 사이의 서로 다른 관점으로 힘들거나 즐거움을 느낀다.

 

결국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그 외, ‘다른 말들’ 곧 우리의 주변적인 관심이나 수다 같은 것으로는 얻을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 이는 예전에는 알 수 없던 말의 정도이다. 누구를 헐뜯거나 일상의 소소한 일인데도 조소와 음담과 패설로 낄낄거리던 말들의 허비도 있었다. 그렇게 술자리를 맴돌았었고, 사람과 사람 사이가 다 그렇듯 가벼움으로 홀가분할 줄 알았다. 그러나 말 속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다른 말들, 교만에 빠지게 하는 말이 너무 많다. 말하다 자기 말에 도취되어 확신이 더해지면서 우리는 자주 자기 말에 속는다. 말의 위력은 말로 표현되고부터 거짓도 사실처럼 된다. 말이 만드는 허상은 망상보다 견고하다.

 

엘리후는 오늘 “진실로 내 말은 거짓이 아니라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가 그대와 함께 있느니라(4).” 하면서 자신의 말에 겸손하지 못하면서 지나치게 확신하는 것을 느낀다. 즉 엘리후는 자신이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자신을 완전한 지식의 소유자로 알고, 이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식’으로 단정지으면서 저의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느끼게 한다. “내가 먼 데서 지식을 얻고 나를 지으신 이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3).”

 

말은 이처럼 스스로를 지독한 오해의 함정에 가둔다. 엘리후가 아무리 하나님으로부터 지식을 받았다고 해도 자신을 가리켜 완전한 지식의 소유자라 하는 그 자체로 교만과 오만의 극치를 보게 한다. 흔히 말(言)밥을 먹고 사는 정치인들의 경우가 처음부터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닐 텐데, 말에 말이 더해지면서 이는 마치 두터운 외투 같고 심지어는 무거운 갑옷 같아서 자신을 방어하는 듯하나 자신의 운신도 폭을 죽인다. 제 말에 자신이 푹푹 꺼진다. 어느 사이 가라앉는 사람의 특징은 제 말의 무게에 짓눌려서 그렇다.

 

여기 엘리후가 ‘하나님으로부터 지식을 받았다’ 하면서 그 지식을 완전한 것이라 할 때 이미 변질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누가 자신을 완전한 지식의 소유자로 인식한다면 그는 사람의 자리로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 한다. 이는 마치 타락한 천사의 결과와 같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1:6-7).”

 

그러므로 엘리후의 말들은 옳은 듯 그르고 그른 듯 옳다 해도 무가치하다. 사탄이 아무리 탁월한 능력으로 세상을 호령한다 해도 그의 결과는 정해져 있다. 가령 어느 연예인이나 유명인을 보면서 왠지 불안하다 싶으면 영락없이 허무하게 끝난다. 자신의 말들로 사기꾼이 되거나 말(言)장사가 되어, 말로 먹고 사는 일이란 항상 실수와 타락을 등에 지고 사는 것과 같다. 하여,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1-3).”

 

결국은 사랑으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데 있어 더러는 잔인하여서 끊고 맺음이 분명해야 한다. 곧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 가장 연연하기 쉽고 끊어낼 수 없는 관계이나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37-38).”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마음이 어렵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아닌 건 아닌 것으로, 틀린 것을 다른 것이라 하고, 아닌 것을 서로 존중하라 하면 그 진리는 무너지기 십상이다.

 

죽고 못 살 것처럼 굴다가도 어느 순간 사람과 사람 사이, 별 거 없다. 가끔 생각하는 게 누가 그래서 교회를 떠났다. 저는 예수를 안 믿는 남편과 두 아이가 지옥에 가고 자기 혼자 천국에 가면 그게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냐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십 수 년쯤 뒤에 어쩌다 연락이 닿아 그의 소식을 들었다. 이혼을 했고, 두 아이는 장성하여 하나는 아버지를 따라갔고 하나는 유학을 가고, 자신은 친정엄마랑 살며 다시 교회를 다닌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가 아니면 우리의 사랑이란 게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엘리후는 오늘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면서 욥을 멸시한다. 멸시는 교만한 마음으로 자신의 우월의식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이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8).” 하시는 말씀 속에서 엘리후와 같은 내 안의 자만과 편견이 드러난다. 상대적으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9-10).”

 

더러는 욕을 듣고 괜한 말로 마음이 먼저 상할 때도 있지만, 아닌 건 아닌 것으로 분명히 가름해야 한다. 어제 누구와 통화하면서 나는 단호하게 말하길 더 이상 우리가 서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없다면 그 어떤 즐거운 말인들 유익할 게 있겠나? 누가 나의 말들 때문에, 너무 교회 이야기나 신앙 이야기로만 해서 강요하는 듯하여 싫다고 했다는데… 우리가 그럼 예전처럼 ‘일상적인 언어’로 농담이나 하고 사는 이야기나 주절거리면서 푸념하고 시름하다 술 한 잔 기울이면서 서로의 말에 위로를 얻자는 것인지? 그러느라 서로의 관점이 다르면 말과 말은 공허할 뿐이다. 가령 누가 내게 주식 이야기나 골프 이야기를 신나게 한들? 나는 전혀 흥미를 느낄 수 없다.

 

그렇듯 내가 성경 이야기를 하고 요즘 우리 교회의 이런저런 이야기나 살면서 주가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를 이야기 할 때 저가 재미를 느끼겠나? 그래서 점점 더 멀어지는 사이는 그렇게 두는 게 낫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억지로 뭘 더할 수 없다. 예전에는 같은 것으로 낄낄거릴 수 있는 사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디서 갈라진 선로는 그 위를 달리는 기차의 종착지도 다른 법이다. 여기까지 같이 달려왔을지 모르나 한 길 위에 한 곳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면… 점점 멀어지다 더는 서로를 마주할 수 없다 해도 자연스럽다.

 

서로의 가는 길이 다를 때,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시 145:1-2).

 

이를 예전에 나의 안 믿는 친구들 앞에서 노래한들? 이제는 서로 다른 이를 송축하는 사이에 어찌 더 화합하고 봉합한들? 우리가 서로 화합하느니,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3).

 

이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8-9).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14, 18).

 

그리하여,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지로다

(19-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