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
욥 37:23-24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 146:1
성경은 선포다. 엘리후의 변론도 그 입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다. 시편을 같이 나란히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성경은 우리의 동의를 구하거나 제안하시는 게 아니다. 권하여 설득하려는 것도 아니다. 선포되는 것으로 이에 순종하지 않으면 내 안의 여러 주장들이 일어난다. 자기 입장을 핑계하고 변명하느라 들을 귀를 막아버린다. 오늘 본문은 36장 22절부터 이어지며, 오늘 13절까지 한 단락을 이룬다.
엘리후의 최종 변론이라 할 수 있는 내용이다. 욥을 향해 하나님을 향한 회개의 기회를 멸시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 앞서 36장 11절에서 21절까지는 온 우주에 드러난 하나님의 권능과 행사를 논하였다. 우리가 근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의 세계로, 22-26절에서 하나님의 그 권능과 교훈의 위대함과 초월성을 선언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행사를 함부로 간섭하거나 비관할 수 없다. 오직 찬양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러한 엘리후의 선언은 그가 모든 고난의 원인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맞닿아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부정하기 어렵다. 우린 항상 고난으로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고 그의 섭리에 관심을 기울인다.
모처럼 친구도 통화에서 ‘다니엘기도회’가 시작되었고, 내년 3월까지 제자반 성경공부 마지막 적용부분에 참여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허리가 아파서 매일 병원에 다니고 주사를 맞는데도 효과가 없다는 둥 사느라 그에 따른 고충도 이야기하였다. 오후께는 아이를 오라고 해서 국밥을 사주었다. 돌아오는 주일에 지방 어디에서 열리는 아마추어 빙산대회를 나가는데 아무래도 그 전에 한 번 보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리하였다. 주일예배까지 어기면서 그래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다고 어찌 할 수 없는 노릇이라, 한 아이는 하필 내년 봄께 결혼을 하는데 주일 날 예배 시간으로 예식 시간이 잡혔다. 안 믿는 가족과 상대 또한 그러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데…. 내 안의 어떤 속상함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앞서 36장 27절에서 오늘 37장 13절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의 권능과 주의 행사의 절대성을 논증하기 위해 하나님의 신비한 기상 상태를 주관하시는 예를 열거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엘리후가 그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진리의 눈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묵상하며 탁월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곧 인생은 ‘하나님의 행사’에 관여할 수 없다. 앞서 하나님의 행사는 우리의 이해와 상식을 초월하심으로 그의 위대함과 놀라운 신비의 세계를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각자 자신의 노력이 이러저러할 때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도우심과 어떤 역사를 기대하지만 뜻하지 않은 상황이나 여건에 의해 우리는 자신에게 부여되는 고난으로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잘못이다.
엘리후의 이러한 관점은 틀리지 않다. 욥이 아무런 죄가 없이 고난을 당하고 있다 해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런 점에서 욥의 탄식과 원망은 잘못이다. 하나님은 그 권능에 따라 무엇을 짓이겨 새로 무엇을 만들거나 부술 수도 있으시다. 곧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1).” 하는 바울 사도의 설교는 논조도 그런 의미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가치와 섭리에 대해서 누가 감히 이를 논하여 평할 수 있겠나? 설령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일이라 해도, 인생은 하나님의 행사를 비판할 권리가 없다. 다만 수긍하고 순응함으로 아멘, 할 뿐이다.
투덜거리며 일정을 말하고 힘들다며 하소연하는 친구에게 나는 그저 장하다, 장하다, 하고 지지하였다. 반대로 자기주장으로 굳이 꼭 교회를, 주일을 그렇게 다니면서 지켜야 하는가? 하는 누구에게는 뭐라 한들 들을 리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더러는 생각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감수해야 하는 일들이 의외로 언짢다. 의도했던 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는 속상함을 감수해야 한다. 이를 못 이겨 선을 긋고 더는 관여하지 않게 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하여 예수님도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눅 9:5, 10:11).”
미련을 두고 씨름할 수 있는 게 있고 더는 관여하지 않음으로 놓아두는 것이 일일 때도 있다. 모두를 사랑하거나 위할 수는 없다. 오늘 말씀으로 인생은 오직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절대 순복하는 것만을 요구함을 알게 된다. 더러는 이해가 안 돼, 어찌 내게 이런 일이? 하고 원망과 좌절 앞에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항변하여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은 뜻을 바꾸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아뢰고 또 기도하는 것은 어느 순간 기도는 나의 뜻이 바뀌고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게 한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없으나 주의 뜻을 인정함으로 알게 된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하고 되물었다(사 29:16). 그러므로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하고 역설적으로 증언한다(45:9).
우리의 존재는 그와 같아서,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4-6).”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와 그 이치를 알 때, 곧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함으로 오늘의 모든 의문과 반문이 사라진다. 왜 내게 이런 고통을 더하시는 것일까? 주의 일을 더하실 때 왜 나로 하여금 이와 같은 고통을 겪게 하시는 것일까? 하는 여러 의문점이 들고 일어나지만, 우리로 인정하기까지…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1-12).”
하는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나는 한 가지, 나의 의지로 인연을 이어가려는 것을 끊었다. 좋은 사이, 좋은 관계란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이어서 좋을 때나 좋은 사이로는 주의 길을 함께 할 수 없었다. 내가 누굴 의지하려 할 때면 항상 그러한 경험이 따랐다. 특히 사람을 의지하면 그 관계가 틀어지고, 어떤 일에 집중하여 그것을 밑천으로 삼으려 하면 그 일은 어그러졌다. 심지어는 나의 건강도 그러해서 이런 일의 작정이 하나님의 손길로 막으시거나 어르신다는 것을 알았다. 하여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 4:35).”
하여 가장 가까웠던 친구들부터 주가 끊으셨고, 어떤 불편함으로 더는 같은 곳을 바라보지 못할 때 멀어지게도 하셨다. 이는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9-20).” 그럼에도 주를 우선하지 못하는 이들로 나로 하여금 차선책으로 미루게 하는 것들로부터 하나님은 끊어내셨다. 때로는 이 일이 서러워 그리울 때도 있지만 그것으로 주를 더 바라게 하신다.
고로
“네가 많은 계략으로 말미암아 피곤하게 되었도다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초하룻날에 예고하는 자들에게 일어나 네게 임할 그 일에서 너를 구원하게 하여 보라(사 47:13).”
다들 저마다의 기준과 어떤 가치를 가지고 나름 산다고 사는 세상에서 그 속에 다 보이는데도 억지를 부리는 이들 앞에서 나는 부끄러워진다. 저게 나이지 않은가? 마치 자기들 주장을 하며 뭔가 대의를 품고 일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그 허물을 감추고 거짓을 감추려고 다들 선을 부르짖을 뿐이다. 모두가 그러하여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기 어려울 때 우린 오히려 자연의 광활한 역사 앞에서 신령하신 이의 손길과 그 존재하심을 깨닫는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일은 기적이 아니면 그 자체로 거짓일 뿐일 뿐이다. 은혜가 아니면 그것으로 위선과 허상일 따름이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찬송시로 쓴 스웨덴의 칼 보버크 목사는 자신의 조국 스웨덴의 울창한 삼림에서 그 아름다운 호수와 푸른 초원을 바라보며, 어느 여름날 소나기 후에 너무나도 깨끗하고 신선한 경치를 보며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신 솜씨를 감격하여 이 시를 지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숲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주 하나님 독생자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보내주셨네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주 내 모든 죄를 대속하셨네
내 주 예수 세상에 다시 올 때 저 천국으로 날 인도하리
나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며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라
-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우리는 이 땅의 신비로도 감당이 안 되는데, 우주 공간에 있는 수많은 별들에 대해서는 어찌 헤아리기 어렵다. 현대 천문학자들이 파악한 것만도 천억 개라 하는데, 그 범위를 숫자로 나열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은하계는 측량도 할 수 없어 그 직경은 십만 광년이라고 하고, 전직경은 수 십 억 광년이라고 한다. 한 광년은 1초에 30만 1011킬로미터로 진행하는 빛이 꼭 1년을 걸려서 갈 수 있는 거리이므로 이를 환산하면 대략 10조 1011킬로미터나 된다나? 그런데 10억 광년이라던 것을 도무지 숫자로 표현할 수 없어서 그 광범위한 세계는 가늠할 수조차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셨고 다스리시며 오늘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게 하심으로 이 우주의 질서는 유지되고 있다.
또 이 땅 위에 서식하는 동식물은 약 만여 종의 물고기가 바다나 하천에서 헤엄치고, 공중에서는 8,600여 종의 온갖 새들이 숲속을 날아다니며 셀 수도 없는 식물들이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어느 조림사도 이렇게 이상적으로 꾸며놓을 수 없으며, 어느 정원사가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 수 없으며, 어느 예술가도 이런 훌륭하게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모든 우주만물과 자연의 질서를 뜻대로 구상하여 만들고 배치하여 운영하실 따름이다.
이를 오늘 엘리후는 새삼 강조함으로, “하나님은 놀라운 음성을 내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입김이 얼음을 얼게 하고 물의 너비를 줄어들게 하느니라… 하나님이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로 번쩍거리게 하시는 것을 그대가 아느냐(욥 37:5, 10, 15).” 하고 역설하는 것이다. 이에 시인도 찬양하기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시 19:1-4).
고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롬 11:33, 고전 1:25).” 이를 오늘 엘리후를 통하여 선포하게 하심은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37:14, 24).”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선포되는 진리이다. 하여 오늘도 시편으로 뜻을 모아 찬송하게 하심은,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 146:1-2).
오늘 이 날의 환경과 여건이 어떠하든지, 주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으로 가장 선한 길로 나의 이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심인데,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3-4).
나로 의지하고자 하는 것들에 대하여 바로 알게 하심은,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8-9).
오늘의 이런저런 형편과 사정 속에서,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10).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0) | 2025.11.07 |
|---|---|
|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0) | 2025.11.06 |
|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0) | 2025.11.04 |
|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0) | 2025.11.03 |
|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0) | 2025.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