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하현. 2025. 11. 6. 05:17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욥 38:1-3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시 147:1-3

 

 

누구나 저마다의 고통으로 자신을 우선에 둔다. 디스크 수술을 하고 병상에 누워 삶을 돌아볼 때 한탄과 고통으로 외로움뿐이다. 잠시 쉬면서 삶을 돌아볼 여력이 없다. 이러다 영영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등의 걱정과 염려가 앞질러가서 짓누른다. 본래 기형적인 장애의 몸이라 수술도 어려웠고 회복도 길어진다. 살아온 날이 대부분 고통 중에서라 그의 불안이 더 가중되는 모양이다. 누가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고 동조하고 지지하기만을 호소한다. 남의 사정이나 주변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게 자신을 위한 일이어서 지금의 자신으로는 더더욱 남을 위한 기도가 불가능하다. 하긴 늘 자신의 문제가 우선이었다.

 

누구는 산후우울증으로 힘들어하다 기도와 신앙의 힘으로 열심을 다해 살았다. 뒤늦게 박사가 되어 교수를 꿈꾸었는데,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사춘기인지 어떤 정신적 문제인지 알 수 없으나 난독증으로 힘들어한다. 그러는 모습에 자신도 괴로운데 정교수를 포기하고 12월부터는 어느 종합병원 약국으로 들어가게 되자, 갱년기 우울증과 아이 문제와 자신의 현실로 인해 다시 시름에 빠졌다.

 

우리 곁에 더 힘들어하여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이 많다, 하는 소리에 저마다는 외면한다. 앞서 아무개에게는 그래도 감사한 게 얼마동안을 쉬면서 요양한다 해도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지 않는가? 이참에 일을 놓고 남은 생을 주를 바라며 산다 해도 삶에서는 지장이 없지 않나? 누구는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야 하고, 갖은 빚에 갚아야 할 채무가 잔뜩 쌓여, 고통 중에 막일이라도 해야 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아는가? 이렇다 하여 어려움으로 교회를 등지고 예배를 빠진지 벌써 수년인데도 신앙의 갈등을 못 느낀다면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되물어도 저의 관심은 자신뿐이다.

 

이에 하나님이 오늘 말씀하신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38:1-3).” 삶이 흔들리고 마음이 어수선한가? 허리를 묶고 단단히 들어라! 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다. 여호와는 야웨, 아도나이 곧 하나님에 대한 칭호이다. 욥과 친구들의 변론에서 빈번히 사용되었던 ‘엘’, ‘솨다이’ 대신에 ‘스스로 자존하시는 존재’이심을 뜻하는 이 용어, 여호와라 하심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직접적인 출현과 구원의 능력, 그의 거룩하심과 영원불변하심을 내포하는 이름으로 말씀하시는데 있어, ‘폭풍우 가운데’에서이다.

 

폭풍우 곧 ‘회오리 바람’은 이미 엘리후가 하나님의 위엄과 관련하여 언급하였다. “폭풍우는 그 밀실에서 나오고 추위는 북풍을 타고 오느니라(37:9).”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이와 같은 기상 현상을 동원하신 것을 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들이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니라 모세가 백성의 말을 여호와께 아뢰었으므로(출 19:9).” 또한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삿 5:4-5).”

 

이는 의도하신 바,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들이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니라” 듣게 하고 믿게 하려 하심이다. 하여,

 

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도다

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셨도다

그가 흑암을 그의 숨는 곳으로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그 앞에 광채로 말미암아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고

지존하신 이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을 내리시도다

그의 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그들을 깨뜨리셨도다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그가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나를 붙잡아 주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시 18:8-16).

 

이는 우리로 하나님의 강림을 압도될까 하여 자연을 동원하심으로 우선은 알리심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통해 주어지는 계시가 확실히 구체적으로 전달되기를 의도하신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욥에게 말씀하여” 저를 불러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의 것이나 지목하여 불렀나니, 욥이 그렇다. 오늘 우리 자신이 그렇다. 곁에 있는 빌닷과 소발과 엘리후와 엘리바스도 들리겠으나 듣고 있는 저들 중에 ‘욥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응답이다.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31:35).”

 

욥은 앞서 다른 누구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고하고 하나님의 대답을 구하였다.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곁의 누구, 어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일이다. 우리의 문제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된 뜻이 성취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동시에 지금까지의 논쟁을 모두의 문제가 아니라 욥의 문제로 지목하여 부르심이다.

 

우리가 주 앞에 온전히 선다는 일, 남들이 어떻다고 하는 게 아니라, 또한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일을 두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이야기로 오늘 여기에 주목하게 하신다. 하여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38:1).” 오늘 ‘그 때에’, ‘여호와’는,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이르시는 것이다.

 

이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게 얼마나 무지한가? 하는 것을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하고 오늘 본문은 물으신다(2).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호 4:1).” 그러면서 마치 우린 다, 잘, 아는 것처럼 자신의 신앙을 자신하며 산다. 심지어는 내가 어떻게 주를 믿었는데? 하는 식으로 그 속에 항변이 인다. 그러나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하고 하나님은 일갈하신다. 오늘 시편에서도,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147:10-11).

 

하고 우리의 착각이나 오해나 지독한 자가당착을 수정하게 한다. 이를 위하여 오늘도,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18).

 

오늘도 말씀을 보내시는데, 저마다는 자신의 소리에 도취되어 자기 목소리를 내느라 들을 귀가 없다. 자신이 소리 지르느라 들리지가 않는다.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은 들을 수 없다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고 떠들어댄다. 우리는 누구라도 다급하여,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삼상 28:15).” 죽은 사무엘이라도 불러내는 지경에도 주를 찾지 못한다.

 

나는 지난 번 건강검진에서 헬레코박터균이 양성으로 나와서 일주일간 약을 먹어야 하는데 항생제만 세 종류가 들어 있었다. 제균치료가 중요하다며 속이 불편하고 울렁거려도 꾹, 참고 다 드시라고 하는데… 평소 가벼운 진통제만 연속으로 먹어도 속이 안 좋은 사람이라 이 일을 어쩌나? 하고 누구에게 물었더니 자기 하소연만 잔득하였다. 하긴 그 속이 말이 아니겠다, 싶어서 듣다보니 저의 일이 마음에 걸려 주를 찾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7-8).”

 

우리가 주께 부르짖음은 기도하면서 낙망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응답이 더디거나 내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포기할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11:8-9).” 하는 것으로 주가 약속하신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10).”

 

하여,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시 91:14-15).

 

이것으로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안다. 앎으로 아뢴다. 아룀으로 오직 참고 기다린다. 주는 때를 따라 돕는 이시다. 그러므로 오늘의 사정이 저마다 어떠한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에스더의 신앙으로 ‘죽으면 죽으라’ 하는 심정이 필요하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신앙으로 ‘그리 아니하실지도’ 하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저마다 우린 여러 일들이 실타래 엉키듯 헝클어져 있어 제풀에 죽을 것만 같다. 그러할 때 우리로 새 힘을 얻게 하는 것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신기하고 기막히게 서로 닮은 꼴은 말씀을 보내시는데 저들은 들을 귀가 없다. 이는 자신의 소리에 자신의 귀가 막혔다. 누구의 어떤 일보다 자신의 지금 일이 더 급하여서, 죽은 사무엘을 음부에서 끌어올릴 생각은 하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생각은 못한다. 묵상글을 보내고 성경구절을 보내도 가만히 앉아 읽어볼 여력이 안 된다. 그럴 시간이 없다. 차라리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누구와 넋두리를 할 마음은 있어도 말씀 앞에 가만히 앉힐 자신은 없다. 그러느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불안이 염려가 우리를 좌지우지한다.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불러 세우신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이를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으로, 전심으로 바랄 수는 없어서…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2:20).” 사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지식이 헛된 것은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10:2).” 결국 올바른 지식이 없음은 스스로는 다 알고, 잘 본다고 하는 ‘지독한 오해’로 인한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그러니 성경의 주장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 3:7).” 이를 이루시기까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렇지 않을 경우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2-3).”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오늘 처한 상황을 얼마나 잘 대처하여 슬기롭게 이겨내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오늘 여호와 하나님은 이를 알게 하시려고 자연의 섭리와 이치를 누가 다스리는가를 말씀하시고, 이를 알기까지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수탉에게 슬기를 준 자가 누구냐? 누가 지혜로 구름의 수를 세겠느냐? 누가 하늘의 물주머니를 기울이겠느냐? 티끌이 덩어리를 이루며 흙덩이가 서로 붙게 하겠느냐? 네가 사자를 위하여 먹이를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욕을 채우겠느냐?” 하고 되물으신다(38:36-39). 하여 우리로서는 마땅히 주를 사랑하고 신뢰함으로,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시 147:7).

 

나는 누구에게 부탁하기를 감사할 것을 자꾸 세어보자고 일렀다. 이런저런 염려와 어떤 문제로만 씨름하기보다 하나님이 오늘 내게 주신 것들, 여기까지 인도하시는 데 있어 감사할 것들을 세어가며 읊조려보라고 일렀다. 결국,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10-11).

 

우리가 오늘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일이란,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18).

 

내 안의 완고하고 차가운 이성보다 주를 바라는 사모함으로,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19-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