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
욥 39:17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시 148:5, 13
하나님이 주의 절대 주권을 선언하신다. 나귀와 염소와 타조와 매를 가지고 그것들의 강인함을 누가 더했는지를 질문하신다. “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17).” 그런 가운데서도 저것들이 강함을 잃지 않고 주어진 생을 꿋꿋하게 다하는 것은 주가 이루심이다. 이를 시편의 찬양으로 연결하여 묵상하면,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시 148:5, 13).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고 남다른 지혜와 총명을 가지고도 주를 찾지 않는 무리가 사람이다. 그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있는데도 이를 변형하거나 다른 것으로 바꿔 하나님으로 대체하며 산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이는 안 믿는 자들은 물론이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속에 감사보다는 원망이 은혜보다는 자신의 수고와 노력에 대한 공적이 더 크다. 거기서 실망과 좌절이 온다. 우울과 낙심이 온다. 누구는 가질 만큼 가졌고 나라의 복지 대상으로 모든 게 다 공짜다. 젊을 때 열심히 벌어서 그것을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가운데 불안이 떠나지 않는다. 비록 정상적인 외모나 육신은 아니라 해도 자신만큼 큰 어려움 없이 남은 생을 도모할 수 있는 여력의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불안을 지울 수 없다.
누구는 배울 만큼 배웠고 저들 가정은 각자의 감사와 충만함으로도 은혜와 은총이 넘친다. 그럼에도 우울과 불안이 찾아와 자주 운다. 이는 심리적인 것이라 말로 어찌 다스릴 수는 없지만 나는 어제 저의 감사할 이유를 수도 없이 나열하였다. 주신 것이 얼마나 많은지도 설명하였다. 또한 두 부부가 신앙 안에서 교회에 충성하고 말씀으로 살려하는 게 얼마나 갸륵한가? 서로가 통화하며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가 복이 많다. 그런데도 왜 슬퍼하느냐? 하고 오늘 말씀은 묻는 것이다.
앞서 하나님은 욥을 책망하셨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38:1-3).” 그리고 선언하셨다(4-39:30). 결국 천지를 창조하신 이도, 이 우주와 만물을 통치하시는 이도, 그의 섭리 가운데서 우리의 한계를 드러내셨다. 이어 각 동물을 들어 저것들은 지혜를 주지 않았음에도 강인하고 본능을 다해 생을 다하는 주 앞에서의 순종을 나타낸다(38:39-39:30).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낸다. 욥의 친구들이나 엘리후의 말처럼 철학적이지 않고 도덕적이지도 않다. 하나님은 단순명료하게 대자연계의 온갖 것들을 제시하시며 질문하실 뿐이다. 이 말씀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손으로 입을 가릴 뿐이다. 누가 내게 말하길 ‘형이랑 대화하면 할 말이 없어요!’ 한다. 신앙과 믿음으로 접근하면 그렇지만 인생이 어디 그런가? 하고 복잡하고 다단한 삶을 알아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 역시 답답한 것은 답이 없는 일상을 논하고 또 주절거리며 떠든다고 한들 그래서? 한 치 앞이라도 구분할 수 있을까?
한때는 것으로 위로를 삼기도 했다. 삼삼오오 친한 이들과 모여 술 한 잔 기울이며 푸념을 일삼고 생의 이런저런 어려움을 털어놓으며 서로의 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인생이 좀 위로를 얻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허상임을 이제는 안다. 그런 관계가 모래 위의 집 같이 허무한 관계인 것도 알았다. 속된 말로 속빈강정 같아서 좋을 때나 좋은 관계로 정작은 서로의 모진 세월 앞에서는 하나둘 눈치껏 모른 체한다. 혹시나, 하고 몸을 사리며 더욱 죽는 소리를 한다. 나는 이를 실감하였다.
어려운 일에 자신의 일처럼 나서는 사람은 없다. 우선은 다 ‘지 코가 석 자’다. 친구와 선생과 늘 곁에서 마치 죽어줄 것처럼 굴던 이들이 하나둘 그렇듯 거리를 두었고 이내 나 홀로 얍복강에 남겨지게 하셨다. 하나님은 나와 대면하기를 원하셨다. 야곱이 씨름하듯 주와 싸우길 바라셨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누가 우울증으로 자꾸 울고 다니는 것에 어제 통화하면서 어찌 말로 이를 알게 할까? 주님, 하고 나는 속으로 주의 이름을 불렀다. 전날에는 병원에 있는 친구가 마치 앞날이 캄캄하여 죽을 것처럼 불안해하는 것을 감사의 이유들을 찾아보라고 이르고 또 달랬다. 이런 말은 나에게도 선포되는 말들이다.
하나님께서 욥의 고난에 대하여, 그 원인에 대하여,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신다. 실은 이것으로 주를 의지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고난의 원인도 그 실상도 실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의 주도하심인 것을 미물의 짐승들을 들어서도 설명하신다. 아무리 우리가 수고하고 애써 얻은 나름의 억울한 성공과 실패라 해도 이 또한 누구의 것인가? 이것으로 하나님께 도전할 사람이 누구인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를 지적하심으로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에 대하여 돌아보게 하신다.
우리가 주의할 점은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굴복하는 것이다. 나의 주장과 주권을 운운할 게 아니다. 욥기의 기록 목적도 우리의 고난의 원인을 밝히려는 게 아니다. 이는 당연히 하나님에 의한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고난의 목적이다. 이로써 하나님께 절대 순복하고 또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은 이를 설명하는 데 있어 야생 동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존과 그 섭리 가운데 저것들의 생을 다하는 순종을 알게 한다. 산 것으로 삶을 다하는 것이 주신 삶에 대한 순복이다. 그게 어떠하냐? 왜 나만 어쩌냐? 하는 따위로 신음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고 물으신다(마 6:26). 이어서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28).” 하고 그럼에도 이것들을 돌보시고 살고 자라고 죽기까지 모든 과정이 주의 손길 가운데 있음을 알게 하신다. 한데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하고 우리의 염려가 헛된 것임을 알리신다.
부디 정신 차리시라.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합 1:11).” 행여 우리가 주를 믿는다고 교회도 다니고 신앙생활도 하면서 설마, 자기의 힘을 신으로 삼고 살지는 않는지? 그리하여 우울증이 오고 염려와 근심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나는 그랬다. 끝내 그것으로 버티다 주 앞에 고꾸라지면서 알았다.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것이라. 바울의 고백 같이,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리하여 누구 말에 나는 그래서 묵상을 하고 글을 쓰고 설교원고를 다듬으며 한 주간을 산다. 목사의 기본이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여 이것으로 내게 맡기신 한 영혼을 사랑하는 일인데, 나 자신부터도 이에 속하는 대상이다. 누가 물으면 나는 이제 날 위해 이 시간을 죽어라, 하고 잃지 않으려 한다. 이른 새벽 주 앞에 일어나 말씀을 묵상하고 나의 한 날을 돌아보며 글을 쓰는 일… 이를 가지고 누굴 가르치고 어디 책을 내어 뭔가 이루려는 의도보다, 주신 생을 다하고자 살기 위해 새벽을 깨운다. 이 시간을 위해 저녁 일찍 잠을 청한다. 누구를 만나거나 개인적인 저녁 시간을 버렸다.
이제는 저녁 8시만 되면 억지로라도 누워 잠을 청한다. 새벽 3시 전후로 눈을 뜨면 억지로라도 따듯한 이불 속에서 나온다. 나는 단순하여 같은 동선으로 같은 사람을 스치거나 만나고, 같은 일로 씨름하듯 설교원고를 쓰거나 그에 따른 책을 읽거나… 오전 10시 30분에 집에 가서 식사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산책을 하고 오후 2시께 다시 교회로 나온다. 나의 대부분은 교회에 있다. 대부분은 혼자이거나 전화로, 화상으로 누굴 만나거나 저의 사연을 듣는 게 일이다. 이러한 동선으로 나는 자꾸 더 의도적으로 삶을 단순화시킨다. 사회는 복잡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는 더 말할 것도 없는 세상에서 나는 일부러 주께 향한 시선 외의 것을 보려하지 않는다.
그런들? 내 곁에 나와 다른 여러 사람들이 고통 중에 연락을 한다. 무슨 가게 문제나 건물 때문에, 누구는 자식이 둘인데 서른 다 되는 큰 아들은 은둔형외톨이로 기형적인 비만이 되어 먹고 게임만 한다. 둘째로 본 늦둥이 6학년 아이는 지능이 떨어져서 학교에서는 장애판정을 받으라 하는데 아이엄마는 한사코 이를 거절한다. 어느 노인은 거동이 어려워졌는데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운운하며 휠체어를 타지 않고 차라리 자식 등에 업혀서 이동한다. 그런 가운데 누군 온갖 모임의 온갖 사람의 대소사를 다 좇아 다니느라 일주일에 7일이 빠듯하다. 하다못해 일이 없는 날은 어디 재개발구역사무소라도 들러 정보를 듣고 온통 관심이 돈, 돈이다.
우리는 그런 가운데 항상 나의 유익, 나의 편의, 나의 형통만을 고집한다. 나의 상식으로 나의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어도 나의 가치관으로 섬기기를 원한다. 누가 대뜸, 하나님이 나한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 다들 그 사정이야 그렇다 치고, 믿는 자들로 믿는 자들이 맞나? 싶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9:6).” 하고 성경은 이르시는데 아랑곳하지 않는다.
답답하다. 예수님은 이르시되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눅 12:24).” 말씀하시면서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25).” 하고 물으신다. 아,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시 12:5).
오늘도 주의 인자하심 앞에 엎드린다.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후 7:6-7).”
우리 곁에 주의 위로가 이처럼 같이 하시는데 어찌 이로써는 위로를 얻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나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두려움으로 우울해하고 불안해하며 사는 것일까? 분명 말씀하시길,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1).” 하여,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4-36).”
각자 자기 생을 자기 것이라 여기는 한 참된 평안은 없다. 각자 오늘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한 참된 감사도 알 수 없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하여 오늘의 어떤 고통과 고난으로 힘에 겨울 때,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이것으로 주가 우리로 열매를 맺게 하려 하심이니, 자유를 얻자.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나는 이번 주간 이 말씀으로 설교원고를 빙자하여 은혜를 산다. 통증치료 주사를 여러 대 맞고, 건강검진에서 헬리코박터균이 양성으로 나와 독한 약을 먹으면서, 오늘도 어디가 아프거나 불편하거나 힘에 겨우나…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이에 말씀 앞에 나를 앉히는 것이 나의 일이라, 생이 복되다. 누가 내 일상을 듣고는 가장 복 받은 자라고 하며 부러워하였다. 나 역시 우쭐하며 내가 복이 많다, 하고 주께 감사하였다. 고달프거나 기쁘거나 슬프거나 힘들거나 행복하거나 이는 다 주의 것으로,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시 148:1-2, 5).
오늘을 다하여 생을 다하기까지 우리가 받은 복된 명령은 주를 찬송함이었으니, 이는 살아서 사는 동안에 그 생을 다하기까지 주를 증거하는 그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
(13-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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