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욥 40:10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시 149:5
앞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선언하셨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38:1-3).” 이와 같은 선언은 욥을 향한 책망을 정당화한다(4-39:30). 오늘은 이어 하나님과 욥의 문답이 이루어진다.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40:2).” 그러자 나름 고난에 의문을 품고 하나님을 향해 그 뜻을 알고자 하였던 욥은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3-4).” 하고 할 말이 없음을 인정한다.
은혜의 절정에 서면 이를 안다. 이야기의 5단 구성으로 나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 발단은 나의 그릇 행함과 하나님의 끈질긴 붙드심이었다. 여기서는 억울하기도 하였으나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나는 억울하기도 하였으니, 하나님의 처분이 부당하다고 여겨졌다. 나름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을 다해 산다고 살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은 세상적으로는 부당하게 여겨졌다. 나는 여러 좋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로 지냈고 그 가운데 값없이 은혜를 입거나 아낌없이 모든 것을 더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과의 왕래와 소통을 가로막으셨다.
다음 전개단계로는 기껏 잘 견디고 버티면서 나름 그와 같은 생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소상히 열거할 수 없으나 부친의 교회 개척으로 건물이 올라가고 얼추 마무리 단계에서 모든 게 틀어져서 공사를 맡았던 집사가 도망쳤다. 졸지에 교회는 빚더미에 앉았고,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안양에서 전세로 시작했던 나의 결혼생활은 큰 애를 임신하면서 전세금을 빼서 교회에 드리고 안산 신도시 쪽의 상가를 월세로 얻어나갔다. 그렇게 또 얼마쯤 지났을까? 은행이 다 막힌 부친으로서는 당부할 곳이 없었고, 우린 그나마 월세 보증금 2천을 빼서 드리고 만삭이 된 아내를 데리고 교회 건물 1층으로 들어갔다.
그런 뒤 위기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때는 기하급수적으로 이자는 이자를 더하고 교인들은 추풍낙엽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한 주 건너 공사했던 인부들이 쫓아와 술주정을 하며 돈을 달라고 요구했고, 부친은 도망치듯 그때마다 사람들과 싸움을 피해 며칠씩 기도원으로 가셨다. 사라진 재정집사는 감감무소식이었고 나는 교회의 그런저런 사정이 징글징글했다. 밖으로 나돌고 예배도 억지로 주일에만 시늉을 내듯 나갔다. 그곳에서 무려 7년을 생활했고, 큰 애와 작은 애가 3년 터울로 태어났다. 그때 나는 심한 우울증이 있었고그러나 몰랐고, 그때마다 숨어버리듯 낚시터로 떠돌았다. 그때는 차라리 교회를 팔아버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가운데 안 믿는 사람들과 어울렸고 낚시며 술자리로 전전긍긍하듯 떠돌았다.
절정으로는 결국 어느 교회가 모든 채무를 안고 교회 건물을 그대로 인수하는 것이었다. 부친은 빈털털이로 쫓겨났고, 당시 교회에는 어느 집사장로 내외만 남았었다. 어디서 천만 원을 구해서 우리에게 주었고 본인들은 외곽 어디 500에 40짜리 허름한 단칸방으로 나갔다. 그때는 몰랐다. 함께 어울리던 사람들이 나의 이 사정을 알고 몇 천을 주었고, 우리는 거의 빈 몸으로 쫓겨나 그 동네 건너편 어디 건물 2층에 집을 얻고 아래층 상가에서 아내는 미술학원과 과외를 시작하였다. 나는 악에 받쳐 하나님을 원망하고 싫어하듯 교회 사람들을 멀리하였고, 그런 가운데서도 연안부두에서 건어물상회를 하는 건물주 내외는 우리에게 각별하여 집과 상가를 사용하는데도 하나 가격으로 월세를 받았다. 하필 그때 누구는 신학을 하라면서 나의 학자금 일체와 일정의 생활비를 지원하였다.
아직 결말이라 할 수는 없지만 결국은 그때 학부를 편입했다가 신대원을 포기하고 다시 얼마 동안을 하나님 없이 살았다. 그럼 그럴수록 거짓말처럼 하나님은 더 좋은 사람들(?)을 붙여서,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주지? 할 정도로 보살피셨다. 마치 로뎀나무에서 죽고자 하는 엘리야에게 물과 까마귀를 보내 음식과 물이 떨어지지 않게 하신 것처럼, 광야 40년 길에 만나와 생수로 먹이시며 모든 적들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셨던 것처럼… 나는 주를 멀리하는데 주의 손길은 사방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보살피셨다. 가령 집주인은 2층 다른 가구가 이사를 나가자, 그곳에 방이 세 개라며 그 가격 그대로 그곳으로 옮기게 하였다. 가까웠던 의사내외는 그때마다 필요한 것을 공급하듯 몇 천의 돈을 선뜻 내주어 나는 안양에다 글방을 차리기도 했다.
그러한 얼마 후 심한 우울감이 나를 다시 옥죄면서 죽고 싶어 하는 고질적인 자살충동이 일었고, 그런 마음으로 더욱 더 낚시에 빠져 전국 사방을 돌아다니며 운전을 거칠게 하였다. 어느 댐 둔덕에서 낚시 자리를 펴다 미끄러져 천길 물속에 빠질 뻔했고, 거칠게 운전하다 태풍으로 차가 날아갈 뻔도 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낙심과 우울과 반항적인 마음으로 사람이 더 침울하였는데, 그러다 결국 하나님은 먼저 도미노처럼 위태롭게 쌓아가던 생활을 하나의 계기로 모두 무너지게 하셨다. 아이들은 어느새 중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결국 나는 두 손을 들었다. 충청도 어느 산속 깊은 저수지에서 안개 낀 새벽에 몰래 물속으로 들어가려던 나를 붙드셨고, 나는 다시 새벽예배를 나갔다. 신대원을 하겠다고 예전의 서원을 떠올렸다.
은혜 앞에서는 유구무언이라!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4).” 하는 욥의 진심어린 참회가 내게도 일어났다. 둘째를 어쩔 수 없이 필리핀 선교사로 나가있는 동생에게로 보냈고, 그때에 심한 공황이 왔고, 나는 매일 울면서 신대원을 다녀야 했다. 웃기는 말 같지만 안 하면 안 되냐고 되물으며 다녔다. 그렇듯 순복할 때 모든 문제가 마치 안개 갇히듯 저절로 해결되었고, 글방 아이들도 공부하는 동안에 적당히 있었으며, 그때도 매학기 기적의 손길이 3년 6학기 모든 학비를 해결하셨다. 대부분은 누군지도 모르는 이의 손길로 학비는 전달되었고, 작은 글방에서의 예배가 시작되어 개척교회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근본적인 결말은 저 천국에서의 영광과 영화이겠으나… 어제도 누구와 통화하며 나의 오늘을 감사하였고, 신대원 준비 때부터 더하면 어느새 20여년의 시간이 되었다. 여전히 공황과 범불안증을 안고 살며, 연약한 육신으로 혼자 끙끙거리는 신세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이 순간을 은혜로 산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교만을 꺾으시고 겸손하게 순복하여 감사를 알게 하신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하나님이 역사하신 나의 생의 모든 순간을 생생하게 열거할 수 있을 정도로 ‘하물며’ 그때마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돕는 손길과 사람들의 호의로 돌보셨다. 그러다 주를 온전히 알면서 자연스럽게 타 종교인이나 주를 안 믿는 사람들은 멀어졌고, 마치 증발한 것 같이 글방은 더 이상 아이들이 오지 않았다. 오직 교회로만 삼으신 것이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 4:35).”
한참 주를 멀리하고 세상을 사랑할 때도 하나님은 나를 한 번도 외면하신 적이 없다. 안 믿는 자들의 손길을 통해서도 나의 삶을 안전하게 하셨다. 두 아이를 신앙과 온전한 마음으로 양육하지 못한 것 같은데 하나님이 키우셨고, 주변의 기도로 보호하셨다. 둘 다 서른을 훌쩍 넘겨 주를 우선하여 사는 모습에서 나는 때로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야말로 내가 한 게 없다. 나는 늘 내멋대로였고, 즉흥적이었으며… 오늘까지 나 하나 간신히 건사할 뿐인데도 아이들은 오히려 사랑으로 나를 품어준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 9:20).”
곧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하는 욥의 심정을 알 것 같다. 이미 죽어 마땅하였을 텐데,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그렇게 하여 이사야는 이후 므낫세에 의해 톱에 켜서 죽임을 당하나 온전히 주를 위해 살았다. 나의 남은 삶도 그러하기를 바라지만 자신이 없고, 요즘은 딸애 결혼 이야기로 지나온 모든 시간들이 새삼 다 은혜 중에 은혜로만 가득하다는 데서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감사뿐이다.
이는 바울의 고백 같이,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4-15).” 은혜란 오늘 욥의 모습에서도 그러하듯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무엇으로 원망하거나 나의 주장을 내세울 게 있을까?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시 22:6).
그렇다 해도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 나로서는 주밖에 더는 없고, 그리하여 죄를 돌이킬 때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달리 무슨 말을 더할 수 있겠나? 누가 병원에 누워 자신의 처지에서 열심히 살았던 날을 울분처럼 토해내며 그 속의 서운함과 억울함을 말하는 이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저는 자기 기술로 그 분야에서 인정 받는 세공업자이다. 누구 역시 우울증이 올만하다.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살았고 여전히 그것으로 주의 은혜에 대한 자신의 책무로 여긴다.
그러니 저 둘의 사연을 놓고 볼 때도 나는 할 말이 없다. 설렁설렁 살았고, 극에 달했을 때는 마치 하늘을 향해 종주먹을 날리듯 막살 테니 어디 두고 보시라는 듯 하나님을 대항하는 심정으로도 살았다. 그때는 나는 하나님을 만나면 어디 한 번 따져보고 싶었고, 할 말이 많았다. 욥도 그러했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13:22).” 하거나,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14:15). 그야말로 해보자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의 주장과 생각이 헛된 것인지를 알게 된다. 아무런 할 말도 없어진다. 그저 감사뿐이다. 송구하고 죄송하여 고개를 들 수 없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사 42:2).” 우리 주님, 메시야는 순종의 표본이 되신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53:7).” 다윗도 주 앞에서,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시 37:7).
하고 이른다. 솔로몬은 말이 많으면 허물을 더 면키 어렵다고 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 정작 주 앞에 서면 누가 감히 입을 열고 자신의 억울함이든지, 나름의 수고와 노력한 것에 대해 부당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시 39:9).
나는 이제 이와 같은 고백의 찬송에 아멘, 한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사 30:15).” 하심도, 여전히 그 속에 어떤 억울함이 또는 분이 가득하면 자신만 괴로울 뿐이다. 나의 절정에서 나는 이 굴레의 다리를 건넜고, 목사 고시 전의 세미나 집회에서 울며 서로 기도할 때 우리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라는 누구의 설교에 오히려 안도하며 감사하였던 기억이 난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습 1:7).”
은혜를 입고 누가 감히 주 앞에서 입을 열 수 있을까? 다만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우리가 서로 그러한 것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8-10).”
아브라함 역시 그 심정은 오늘 우리의 은혜의 사람들과 동일하였을 것이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주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되며 하물며 이처럼 말씀 전하는 자로 살 수 있겠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 19:11-12).”
우리는 누구라도,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 그러므로 감사하기를,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시 149:4-5).
그리하여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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