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하현. 2025. 11. 9. 05:3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욥 41:11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 150:6

 

 

오늘 말씀은 선뜻 이해가 어렵다. 리워야단을 단지 수상생물로 여느 해석과 같이 악어로 놓고 본다면 이를 한 장의 지면 가득 할애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유는 무얼까?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시면서 시작된다. 낚시는 히브리어로 ‘부착하다’, ‘찌르다’ 하는 의미다. 리워야단의 지시적인 의미는 단지 악어가 아니라, ‘하늘의 용’이다.

 

그런 가운데 여러 성경에서 언급된다.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3:8).” 또는 ‘바다의 뱀’이라고도 한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사 27:1).” 곧 뱀은 사탄을 의미한다. 우리가 상대할 수 없는 것으로 엄청나게 큰 ‘고래’로 표현되기도 한다. 깊은 심해(深海) 속을 유유히 헤엄쳐 다니는 존재이다.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니이다

그 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

(시 104:25-26).

 

이에 대해 우리는 놀라워하며 주의 지혜를 찬양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24).

 

이를 읽다가 ‘땅’을 우리의 속성으로, 그 ‘깊은 속’은 우리의 배속으로,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26:22).” 이에 주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우리 속 깊은 마음을 누가 알겠나? 끝까지 모른다, 아니다, 갖은 핑계와 엉뚱한 말로 늘어놓다가 증거와 증인이 나와도 그것에 대해 또 다른 변명을 하는 게 사람이다. 우선은 자기 살 궁리로 말을 꾸미거나 남 탓을 하는 게 우리, 이 땅의 속성이다. 그 위로 아무 일 없다는 듯 배가 다니지만 그 속에 ‘리워야단’이 헤엄치며 산다.

 

그 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

 

이를 우리 속에 두신 것은 죄로 인하여 적당한 거짓말, 하얀 거짓말이 없이는 서로가 서로를 같이할 수 없다. 속엔 말을 다하면 서로가 원수가 된다. 그러니 겉으로는 이 말을 하고 돌아서서는 저 말을 한다. 그러다 속에 있던 욕이 튀어나는 게 사람 관계이다. 좋을 때나 좋은 게 서로의 신의(信義)다. 이는 거대하며 막강하다. 스스로 그러지 말아야지, 하지만 그래서는 살 수 없다. 누가 너무 말이 많고 자기 말만 하여서, 서로 간단히 만날 수 있게 하자고 하다가 그 내용이 저에게 드러나기도 했다. 그럼 본인이 그렇구나, 하고 돌이켜 자신을 고칠 생각은 못하고 여러 서운함으로 괘씸하다. 우리는 본래 ‘리워야단’처럼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을 속에 품고 산다.

 

그러니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시고 “너는 밧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하고 이는 불가능한 일인 것을 알리신다(2). 실제로 옛날에는 ‘악어의 혀’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이를 ‘줄’이나 ‘끈’으로 꿸 수 없다. 여기서 ‘밧줄’은 히브리어로 ‘갈대’, ‘골풀’을 뜻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와 종려나무 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사 9:14).” 이는 단지 어떤 생물, 악어를 뜻하는 게 아니라, “그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그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15).” 우리 ‘거짓의 혀’다.

 

즉 ‘골풀로 만든 천이나 밧줄, 골풀을 꼰 가닥’으로 미끼를 달거나 잡은 고기를 묶어 이 아가미를 꿸 수 있겠나? 즉 어부가 고기를 잡아서 다루는 것 같이, 송곳과 같이 뾰족한 갈고리로 악어의 아가미를 찌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악어인지, 용인지, 뱀인지 하는 같은 표현은 모두가 사탄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 안의 ‘거짓의 영’이다. 순간 더해지는 어떤 말이나, 꾀를 내어 상대를 좋게 하는 ‘아부’ 같은, ‘뇌물’ 같은 진실하지 못한 우리 삶의 속성이다.

 

이를 잡으려는 게 허상이다. ‘잡으려는 소망은 헛것이라’ 하고 오늘 말씀도 지적한다. “참으로 잡으려는 그의 희망은 헛된 것이니라 그것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는 기가 꺾이리라(9).” 이를 정복하고 공격하는 자의 소망은 잘못된 것이라는 뜻이다. 하여 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하고 강조한 바 있다. 어제도 누구와 통화하다 어차피 자기 고집대로 결정하고 판단할 것을 왜 내게 자꾸 전화를 하여 묻는지 속상하기도 했다. 기껏 권하여도 어쨌든 자기 결정대로 하면서 왜 묻는지 모르겠다.

 

그렇듯 툭, 하고 던지듯 고민이나 힘든 일을 말하면 나는 내내 생각을 한다. 그때마다 기도도 한다. 주께 물으며 어떤 말로 어찌 권하여야 할지를 말이다. 그러다 말을 꺼내면 대수롭지 않은 듯 자기 생각대로 결정하거나 판단하였다. 가령 벌써 2, 3년 가까이 교회도 못 갈 정도로 통증도 심하고 고통스러워서, 그럼 줌이나 영상으로나마 예배에 참여해야지 하고 말했더니 그걸 그저 유튜브에서 관심 있는 영상을 보는 정도로 여겼다. 하여 우리 그럼 같이 줌으로 예배드리자, 하고 권하였더니 지금은 병원이고 옆에 사람도 있고… 하는 식으로 자기변명으로 급급하였다. 한 마디로 싫은 것이다.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왜들 묻는 것일까? 내 말을 들으라는 게 아니라, 어차피 자기 판단으로 그 기준을 가지고 할 일이면 그냥 그러든가? 때론 그냥 말 상대가 필요한 것이다. 자기 말만 하겠다는 것이다. 얼마 전 환갑을 넘긴 이가 글쓰기로 두어 달 오다 그만두었다. 말이 너무 길고 많고 끝도 없어서 한 번 오면 세 시간 이상 족히 자기 말을 하였다. 어느 순간 말을 제지하고 글로 쓰게 하려다 포기했다. 내 말을 좀 듣게 하려다 포기했다. 저는 스스로도 말하길 그래서도 철학관을 종종 간다는 것이다. 가서 평소 가까운 사람에게 못하던 하소연을 실컷 늘어놓고 얼마의 돈(복채)를 주고 온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이를 저지하려 했고 그러자 저는 그만두었다. 사람 속에 저마다 엄청나서 자신도 감당 못하는 ‘리워야단’이 산다.

 

오늘 말씀은 이에 대해 “깊은 물을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바다를 기름병 같이 다루는도다(31).” 저 엄청난 위력의 말의 힘, 자신을 두둔하고 방어하려는 죄성을 알게 한다. “그것의 뒤에서 빛나는 물줄기가 나오니 그는 깊은 바다를 백발로 만드는구나(32).” 아, 그게 또 얼마나 빠른지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물살을 가르는 속도가 “깊은 바다를 백발로 만드는구나” 하고 시적으로 표현하신다. 그 속은 깊다. ‘깊은 물’ 심연(深淵) 같고, 그것이 요동치면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곧 저마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주체하지 못하고 산다.

 

곧 우리 속에 악어 같은, ‘리워야단’이 산다. 그것이 더러는 빠른 물보라를 일으키듯 말로 나올 때 거침이 없다. 거짓으로 더하는 말은 길어지고 진짜 같이 물보라를 친다. 또는 ‘먹이를 추격하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오늘의 ‘거짓 선지자’들 곧 이단들의 포교가 과감하다. 안 듣고 지나가는 사람을 따라가면서도 말을 걸고 붙들려고 한다. 신호등에 걸려 있을 때 다가오면 영락없다. 나는 그래서 일부러라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다. 신기할 정도로 그들의 열심은 과감하여 집으로도 와서 초인종을 누르고 전도지를 놓고 가는 것은 예사이다.

 

그러한 거짓의 악어가 우리 곁에서 돌진한다. 그런데 우리 속에도 저마다 ‘리워야단’은 스며들어와 한두 번 하던 거짓말이 사실이 된다. 스스로도 그리 망상에 빠진다. 어느 아이 생각이 난다. 3년 정도 가르쳤는데, 아이의 모든 말이 거짓말이었다. 부모가 이혼을 했으나 자신의 우울증 때문에 같은 집에서 여전히 같이 살고, 위로 언니는 알고 보니 아빠의 딸로 자신과는 친자매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사연을 들으며 안타까웠고 이를 글로 쓸 때 괜히 내가 우울하여 아이 글의 소재를 놓고 힘들었다. 그러다 제법 큰 문학상을 탔는데 이를 책자로 엮어 보낸 모양이다. 아이엄마가 읽고 찾아와서 고맙다고 시작한 말이 그간 아이의 모든 말들이 거짓이었다는 데서 두려움이 들었다.

 

그런 식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이런저런 개인방송을 나는 주의하는 게 모두가 자신을 허상으로 믿는다. 사람들의 지지와 응원으로 그 조회수와 회원가입 숫자가 돈이 되고, 거기에 맞춰 자신도 점점 거짓과 실제의 자신으로 혼동한다. 곧 화면으로 연출되는 모습이 실제가 아니다. 종종 그것이 드러나 사회를 어지럽히기도 한다. 누가 주식부자로 행세하며 돈을 끌어 모았는데 사기꾼이었다. 어느 목사의 자상한 상담과 인상적인 말투는 가정폭력으로 드러났다. 실제 어느 교회 목사는 내연녀가 있었고 그 상대 여성 신도도 가정이 있던 여집사여서 그 남편집사가 죽인다고 길길이 뛰다 고소도 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우리 속의 ‘리워야단’을 가벼이 볼 수 없다. 우린 이를 두고 씨름하고 고통당한다. 그래야 마땅하다. 바울도 절규하며 자기 안의 다른 자신으로 괴로워했다. 이는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11).” 그 일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8-19).” 믿음으로 산다는 게 이처럼 고단하여서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언제 끌려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끌려다닌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1-23).”

 

이와 같은 바울 사도의 진솔한 깨달음이 우리로 깨어 있게 한다. 저의 절규하는 신앙의 애통함이 우리로 우리 자신을 주 앞에 의지하게 한다. 안 그러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면서 누군들 자신을 감당하고 살 수 있을 것인가? (24). 때로는 그 거짓과 난폭한 망상이 ‘광채나는 길을 내니’ 사람들이 속고 자신조차 속는다. 오늘 욥기서의 말씀은 이를 증명하고 증거하신다. “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구나(욥 41:33).” 보면 정치인들을 비롯해서 온갖 거짓의 온상은 뻔뻔하기가 그야말로 광채가 난다. 수려한 말과 행동이 사람을 홀린다.

 

하여,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34).” 오늘 이 절정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 역시 내 속에 여전하게 살아있는 ‘리워야단’을 생각한다. 다만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되는 것은 이것까지도 하나님이 그리 지으셨고, 그리 두셨다는 것이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사 45:7).” 그러므로 늘 은혜가 있는 말씀으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와 같은 신앙의 굳건함으로 우리 안의 리워야단을 물리칠 수 있다. 이를 성경은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하신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그것으로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이를 모르면서 끌려가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일은 자신의 이런 속성으로 씨름하는 일이다. 또한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 3:13).” 세상은 본래 그런 곳이어서 그러는 게 마땅하기도 하다.

 

하여 우리는 더욱 주를 의지하는 것인데,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신 32:39).” 그런 나의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붙드셨고 지키신다. 보호하시며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사느라 너무 애쓰지 말자. 스스로 지나치게 수고하여 얻을 것이 없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렘 12:1).”

 

그래서 나는 종종 농담처럼 진담으로 부자로 넉넉하게 사는 자는 불교인이 많고, 사회 참여부터 자기를 희생하고 봉사하며 유난히 선을 많이 베풀면서 사는 사람은 가톨릭 신자가 많다. 안 믿는 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홀가분하여 살맛나는 것 같다. 다들 참 잘 산다. 내 곁의 믿음으로 충성하는 사람들의 행보는 속상할 정도로 절박하고 절실하고 한심하다. 누가 더는 부르는 교회가 없어 개척을 하려는데, 작은 평수의 공간도 얻을 여력이 없어서 가정예배로 시작하였다. 누군 주 앞에 아무리 울고불고 애원해도 하는 일마다 꼬인다. 저는 억울한 듯 기도를 부탁하면서도 불신이 가득하다.

 

우리 안의 리워야단은 강력하나 은혜로 살자.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모든 것을 주로 연결하여 주가 함께 하심을, 하여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이를 붙들고 오늘도,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시 150:1-2).

 

주어진 상황이나 여건이 어떠하든지, 살아서 살아있는 동안에…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