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 42:5-6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1-2
욥기서의 결론을 시편 1편의 찬양으로 더욱 함축하면,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 1:6).
하는 것이다. 우리로 의롭다 하심은 주를 의지함이다. 믿음으로다. 주께 아뢰고 고함에 있어 나의 소원이나 요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을 바람으로 한다. 이에 욥은 주를 신뢰함으로,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곧 나를 죽이신다 해도 그러한 주를 의뢰하고 의지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다니엘과 친구들의 신앙처럼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곧 하나님이 도우실 것을 믿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실지라도 자신들은 주의 선하심을 믿는다는 것이다.
오늘 여기 욥기의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선언된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선언을 인정하는 데서 욥이 고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하는 차이는 하늘과 땅보다 크다. 말씀을 귀로만 듣는 사람은 은혜가 막연하다. 긴가민가하여 안 믿는 자들의 ‘운이 좋았다, 나빴다.’ 하는 소리와 다를 게 없는 고백뿐이다. 그저 그런가보다 한다. 같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 같아도 실상은 차이가 크다. 산 위의 정상에 올라 하늘과 땅을 눈으로 직접 본 사람과 그 광경을 설명으로 듣는 사람의 차이 같다.
감사하다는 표현은 쓰지만 그 감사의 간절함은 겪어본 사람과 일반적으로 느끼는 사람과 다르다. 주의 선하심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믿는 사람과 본인이 겪고 느끼고 그 현장에 있던 사람은 결코 같을 수 없다. 같은 광야 길을 걸어오는 동안에 누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아버지가 아들을 품에 안은 것처럼 평안하게 느꼈지만 대부분은 그저 그런가보다 할 뿐이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하는 이사야의 설명과 같이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 누구는 귀로 듣는 이로만 알고, 누구는 본인이 직접 보고 느끼고 감격한다.
교회에서 누가 간증을 할 때 이를 듣고 누구는 감동할 뿐이나 누구는 자신도 같은 분을 체험하였던 것으로 감격스러워 회개와 찬양을 한다. 이에 오늘 욥은 회개가 나온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3).” 곧 우리의 새 신앙의 고백과 회개는 그동안 하나님께 가졌던 의문이나 갈등이나 여러 이해할 수 없던 일들에 대해 단번에 답을 찾는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선언 앞에서 감히 아무도 대답도 할 수 없어서 손으로 입을 막을 뿐이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40:4-5).”
이는 마치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하는 것과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8:13).” 하는 심정으로의 감격이다. 나는 은혜를 알고부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한 게 없는데 주가 이루신 게 너무 많으시다. 겉으로는 보잘것없는 것 같으나 주께서 보존하시며 인도하심을 느낄 수 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살 때 자신의 할 말이 많은 사람은 이 은혜에서 막연하다. 정작 은혜에 겨워 눈물만이 흐를 때, 자신의 무지한 말로 자기의 의를 주장하였던 것에 대해 회개할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불가침의 권리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이 은혜로 우리는 산다. 마땅히 내가 받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슥 3:4-5).” 나의 더러운 죄악의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신다. 심지어는 내 머리에 관을 씌우신다.
이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8-19).” 여전히 갇힌 자로 살면서 믿는다고 믿는 믿음으로는 산다하나 귀로만 드는 자리에 있을 때는 모른다. 하여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 1:3).”
눈으로 본 자는 비로소 남의 처지에 눈길이 간다. 저의 영혼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만을 위한 기도로 요구와 필요가 점점 늘어가는 것은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4).” 하는 유대서의 말씀을 이어볼 수 있다. 믿음으로 하나 되지 못한 이는 외따로운 섬 같이 저 혼자 저만치 떨어져 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성도의 교제를 피하여 친절한 타인의 관계로 그 거리를 좁힐 수 없는 사람들. 그저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는 선민의식을 버리지 못하여 상대를 하대하고 가르치려는 사람들. 마치 자신의 신앙은 온당하여 누구의 권면과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 … 나는 종종 누구와 통화하거나 찾아와 이야기 할 때 저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 말만 한다. 자기 문제에 함몰되어 살기 때문에 한 번도 ‘당신은 어떤지?’ 묻지 못한다. ‘교회는 어떤지?’ 관심이 없다. 그저 코앞의 문제로 정작 자신의 문제를 떨어져서 모두 보는 사람의 말에도 관심이 없다. 정작 자신은 코를 박고 있어서 문제의 실상도 볼 수 없다.
우리는 그렇듯 무지한 말로 귀가 닫히고 눈이 가려졌다. 그때에 하나님이 호령하시듯 물으신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38:2).” 말하자면 자기 말만 하느라 정작 들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공교롭지만 나는 가깝게 지내며 저의 이런저런 사연을 듣고 위로하고 때로는 더 많이 생각하며 기도하지만 저들은 한 번도 교회는 좀 어떤지? 오늘의 형편과 사정은 어떤지?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신기하지? 저마다 자기 이야기에만 바쁘다. 그럴까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즉각적으로 순종하였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하시자,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3).” 우린 흔히 ‘나중에’, 또는 ‘다음에 이러저러해지면’ 하는 따위로 오늘이라 일컫는 지금을 모면하려 든다. 그러나 성경은 일축하신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아니면 언제 어쩌다 틈을 노리던 사탄의 손길에 이끌려가지 십상이다. 우리의 즉각적인 순종은 온전한 하나님의 신뢰에서 나온다. 이는 평소 연마된 신앙이다. 어쩌다 생긴 믿음의 수준이 아니다. 이에 날마다 울면서도 교회로 올라와 기도하는 이도 있다. 누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 가령 나는 신대원을 다니면서 울면서 운전하고 학교로 갔다. 수업을 마치고 나올 때 울면서 안 하면 안 되는가? 하고 그때의 형편과 사정에 억눌려서 울었다. 그때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음이라, 오로지 주 앞에서만 울었다. 한 번은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엉엉 울다 고속도로순찰대가 와서 무슨 일인가 하고 묻기도 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9).”
하여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믿음의 원천은 우리가 이제 눈으로 주를 보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어떤 죄라도 주가 사하실 것을, 그리하여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곧 우리 주님은 우리가 고하고 자백할 때 우리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 하는 말씀 앞에 멈추고, 묵상 글을 쓰면서도 나는 오늘 욥의 감격과 회개와 순응을 배운다. 이는 성경의 약속으로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55:7).” 하신 말씀 앞에서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잠든 사이 친구에게서 카톡이 들어와 있었다. 담임 목사님의 암 치료가 완치되어 정상수치를 회복했다는 내용이었다. 일어나 그 글을 확인하고 감사하였다.
우리의 기도가 서로 같이 감사하게 한다. 오늘 말씀은 욥으로 하여금 그의 세 친구를 위해 기도하게 하신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10).” 왜 하나님은 저들로 직접 그리하라 하지 않으셨을까? 이것으로 자기 확신, 자기 시각에 갇힌 자의 한계 때문이다. 앞서 잠시 언급한 것 같은데 이런 자들의 특징은 정작 자신은 자기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하는데 실은 자신만 못 본다. 바로 그 문제에만 코 박고 서서 눈앞을 가린 셈이라….
10여 년 가까이 가르친 아이가 결국은 지적능력이 낮다는 평가를 듣고 정식으로 검사 받을 것과 장애 판정을 받을 것을 학교가 권고하였다. 그러나 아이엄마는 한사코 부정한다. 그런데 슬픈 현실은, 같은 일의 누가 아이의 지적장애 문제로 마치 나의 어떤 권면을 모욕적으로 듣더니 어디서 어떤 소릴 들었는지 생각이 바뀌었다. 즉 장애신청을 했다는 둥 그럼 언제쯤 평가결과가 나오냐? 나라에서 주는 혜택은 무엇이며 어느 정도냐? 돈도 주느냐? 하는 식으로, 그것마저 현실이 될 때 마음이 어려웠다. 지금 저 아이엄마도 그 심정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번번이 다른 학원을 가면 한두 달도 안 돼 쫓겨난다. 아이가 교회를 나가면서 아이엄마는 믿지 않으면서 아이를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좋아한다.
모성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지옥이다. 위대한 감옥 같다. 이는 자신이 떠맡으려 할 때 자기 것이라 여기면서 스스로 견고해진다. 다만 하나님이 맡기신 기업이란 사실을 인정하기가 참 어렵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시 127:3).
하여 욥은 열 자식을 잃고 다시 얻은 열 자식으로 감격하였다. 실제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님은 공산당에 의해 두 아들을 잃고 그 아들을 죽인 두 아들을 양자 삼았다. 부모의 심정으로는 찢어지겠으나 앞서 주의 나라에서 평안을 얻은 것으로 복이라 여겼다. 나의 부모는 주 앞에 붙들려 돌이켰을 때, 나의 표현은 그 목회가 전투적이었다. 자식들은 방치하듯 내버려두고 교회와 주의 일에 충성했다. 누군 이런 부모를 비난한다. 나 역시 어릴 때는 원망스러웠고 그럴 거면 자식을 낳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막냇동생이 열병에 걸려 죽어가는 데도 당시 집회를 인도하면서 아이를 찬 마룻바닥에 두었다.
한참 지난 후 나의 어머니는 말했다. 주가 쓰실 거면 살리시고 주가 쓰지 않으실 거면 데려가시라, 하는 심정으로 우리 사남매를 키우셨다. 이는 말이 쉽지 그 심정이 어떠했을지, 딸애가 결혼이야기가 정식으로 나오고부터 나는 자주 눈시울이 붉어진다. 어제는 딸애가 그쪽 가족들에게 인사를 갔다. 가기 전 두어 시간이 있어 아들까지 같이 모처럼 산책을 나가 카페에 가 앉았다. 결혼은 현실이라 이런저런 우려와 계획들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그저 두 아이를 보다 울컥울컥하였다. 주가 키우신 것이라, 나는 한 게 없어서, 지금도 부모로서 얼마라도 거들어야 하는데 나는 가진 게 없어서…. 감사와 서러운 마음이 동시에 교차하는데 딸애가 알았는지, 내가 다 준비했으니까 괜찮아! 하고 말했다.
그저 나로서는 감사뿐이다. 부모라는 아름다운 지옥에서 벗어난 지 오래 됐다. 더는 그 지독한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 아이들 때문에도 나는 목사가 되기 싫다고 하는 핑계로 수십 년을 도망쳤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이 보란 듯 이처럼 다 키우셨고, 주 안에서 주를 섬기는 자들로 삼으셨다.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 함은,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시 119:97-98).
이제 나로 하여금 말씀으로 앉히시고 나의 고집과 아집과 교만을 모두 빼버리시고 그저 감사로만, 찬송으로만 주 앞에 나오게 하신다. 그렇듯 우리의 믿음의 삶이란,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에 9:22).” 나는 가진 것이 없고 거들어 부모로서 물려줄 것 없으나 오직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감사와 찬송뿐이다. 나는 가만 있을 뿐이고 주가 다 이루시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10-11).”
이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126:5).
하여 우리는 서로에게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딤후 1:4).” 그리하여,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1-2).
이제는 말씀으로다. 말씀으로 나의 남은 모든 생을 걸어보자. 그리할 때에,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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