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하현. 2025. 11. 11. 05:26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전 1:14-15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 2:7

 

 

이어서 시편과 잠언은 늘 묵상하는 것이라, 전도서로 건너왔다. 내용으로는 염세적이고 표현으로는 문학적이다. 하나 그 속에 생의 이치가 있다. 이를 오늘 시편으로 먼저 축약한다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 2:11).

 

누가 하나님을 대신하며 살까? 전도자는 이르길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7:13).” 이것이 오늘 말씀에서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1:14-15).” 곧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함으로 가능하였다.

 

전도서는 해 아래 인생의 절대 허무와 문제투성이의 현실을 진술한다. 스스로는 모든 것을 누렸고 솔로몬보다 복에 복이 겨웠던 인생도 없다. 그런 이가 깨달은 것이란,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그렇다 하니 그 정도가 어떠한지 알겠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립을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다.

 

전도서(傳道書)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문제를 알게 한다. 곧 인생의 허무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논한다. 솔로몬은 자신이 한 세상을 살며 풍미하였던 이스라엘의 최전성기 왕으로 전무후무한 지혜자였다. 그런 그가 누구보다 더 뼈저리게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인생의 허무의 실상을 진술한다. 인생은 종국에 허무할 수밖에 없다는 비극적 현실을 집요하고도 철저하게 지적한다.

 

이때 전도자는 인생을 ‘해 아래 인생’으로 묘사한다. 이는 ‘한계와 덧없음’이 함축되었다. ‘해 아래의 인생’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간격이 짧고 유한하다. 이는 임금이나 종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동일하다. 결국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해 위의 존재’이신 절대자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그의 구원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이처럼 ‘해’를 기준으로 ‘해 아래’와 ‘해 위’의 구분이 상징적 이미지로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 그러하며 그대로 연속적임을 알게 한다. 실로 해 아래에서 살아가는 인생은 온갖 질고에 휩싸여 허덕이다 그나마 짧은 순간에 사라지는 허망한 생을 산다.

 

그러나 해 위의 하나님은 자존하시며 절대자로서 모든 우주와 인생을 지으시고 인간의 심령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리고 가까운 훗날에 우리 인생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로써 선인과 악인을 판결하고 그에 합당한 ‘영원한 삶’을 부여하신다. 이것은 상상이나 한갓 허황된 소망이 아니다.

 

해 위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해 아래 직접 택하신 사람을 살게 하셨고, 친히 해 아래 내려오심으로 대속자가 되셨고,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딤전 2:6).” 대언자로 우릴 보호하신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전도자는 이를 알게 하고자, 이제 해 아래 세상과 해 위의 차원 모두에서 인생의 실상을 알린다. 이로써 각성한 자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자연 발생적 물음에서 답변한다. 이는 성경 가운데 교훈이고, 격언이고, 잠언이다. 지혜의 언어로 성경의 여러 사건과 상황을 축약한다. 다시 말해 이제 ‘해 아래 인생’의 절대 허무와 ‘해 위의 절대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한 해 아래의 인생으로서 허무한 삶을 극복하는 원천적 가능성과 소망을 알게 한다. 한 마디로 정의하면 ‘해 아래 인생’은 어차피 일시적이고, 영원한 삶의 과정적인 것에 불과함으로 그것만으로는 절대적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이와 같은 관점으로 말하였다. 뭘 그렇게 죽기 살기로 살려고 드는지, 이미 충분하게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자식들도 있고 아직 그 나이에 일할 곳이 있음이 감사하다. 가족이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음으로 살고 있으니 그러므로 됐다. 물론 자식 일로 속을 끓이는 게 또한 부모의 마음이겠으나 그 또한 저들 개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알아서 할 인생이다. 스스로 말한 것처럼 안 믿는 부모 밑에서 일찌감치 자립하여 주를 의지하였고,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았으면 됐지 않은가? 오늘의 결과는 내 몫이 아니다. 이 땅에선 잘 되든지 못 되든지 그게 결정적일 수 없다. 곧 우린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이 얼마나 위로가 큰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내가 이 말씀으로 더는 얽매지 않는 인생을 사는 것은 행여 나는 실패자가 낙오자고 인생에 쓸모없는 존재였다 해도 그것으로도 주의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실패나 낙오 역시 내가 책임질 게 아닌 것이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주의 것이다.’ 이를 알게 되면서는 내가 가난하든지, 병들었든지, 하는 일마다 성과가 없었다고 해도 모든 게 은혜가 되었다. 그렇다고 이런저런 걱정도 없고, 슬픔과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그런 가운데서도 주께 감사함으로 그러한 것들을 내가 책임지고 완수해야 할 절대적인 가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죽음에 대하여도 그 너머의 ‘해 위의 인생’으로 소망이 있다.

 

‘해 아래 인생’ 중에 누군들 온전하던가? 가끔 젊을 때 좋아하던 어느 가수나 배우가 TV에 나와 늙은 모습을 비출 때 탄식이 절로 나온다. 누가 덧없이 죽었을 때 한숨이 인다. 마치 저이는 천년만년 살 줄 알았는데 말이다. 해 아래 인생이 모두 그렇지 아니한가? 아내가 딸애 결혼 이야기 이후 마침 그때부터 앨범을 정리하여 좀 버리겠다며 옛날 사진을 핸드폰으로 일일이 찍어서 보내주었다. 가끔 이를 들여다보면… 오늘 말씀이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것이다.

 

해 아래 인생의 절대 허무에 대하여,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2-3).” 하는 것으로 해 아래 생명은 모두가 그러하여서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8).” 이 한 구절에 모든 생태계의 한계와 또한 이어지는 반복이 어떠한가, 충분히 인정하게 된다. 하루살이도 성충이 되기까지 유충으로 물속 부유물 속에서 생을 유지하다 부화하여 하루를 살며 짝짓기하고 죽는데 있어 그 생을 다한다.

 

이에 오늘 말씀은 생을 들여다보듯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13).” 모든 생애는 수고롭다. 죄 때문이다. 인간의 죄로 인해 만물이 고생이 많다. 그런 가운데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8-19).”

 

하여 전도자는 오늘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전 1:17).” 그러니 연일 뉴스에 등장하는 뇌물과 청탁과 그에 따른 출세와 성공이 얼마나 가소로운가? 저마다 자기입장에서 진영논리로 말잔치를 벌이듯 스스로를 정당화하나 그런들?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우리는 믿는 자들로 이 현실을 보면서 한 발 떨어져 관조적이다.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길거리로 몰려가 악악거리며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내려하지만,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인생의 지순한 사랑의 실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이다. 이에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7).” 곧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그러므로 오늘을 살면서 오늘에 주신 날에 나로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주를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

 

엊그제 주일 저녁에 딸애가 결혼할 아이 부모와 식사를 했다. 저들 부부 역시 가장 기뻐하며 감사한 것은 모든 가족이 주를 믿는 것이었다. 같은 교단으로 아름 아름으로 서로가 알만한 교회들로 이보다 더 기쁘고 감사한 게 없었다. 그렇듯 저들이 그러하여 나 역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렸다. 다른 무엇보다 백 배 천 배 감사한 일이었다. 나는 늘 딸애를 두고 기도한 것은 그것 하나 뿐이다. 그런데 저들도 그렇다고 하니 모든 게 다 은혜였다. 허무한 인생 가운데서 이보다 더 크고 귀한 복은 없다.

 

곧 바울은 자신에 대해 진술하기를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6).” 하여 자신을 스스로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하고 주 앞에서 모든 이 앞에 토설한 바 있다. 이는 은혜 받은 자들의 공통된 고백으로 나 역시 예전의 나를 놓고는 저절로 고개를 숙이며, 죽어 마땅할 죄인임을… 하여 목사 안수를 받으려고 강단에 올라 무릎을 꿇었을 때 하도 고개를 숙이니까, 안수 기도하시는 목사님 서너 분 중에 누군가는 내 어깨를 끌어올려 힘을 주고 붙들던 기억이 난다.

 

하여 이제는,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곧 우리가 인생의 허무함을 알 때 상대적으로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저절로 인정하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하나 되어 한 가정을 이루고 서로가 같이 동행하는 삶이란 얼마나 큰 위로이며 축복인가? 안 믿는 이를 사랑함으로 열에 여덟은 덩달아 그 신앙을 떠나는 것을 여럿 보았다. 더욱이 여자가 시집가서 남자 쪽을 따를 때가 더 그렇다. 누군 여전히 그 시부모가 제사를 고집하고 온갖 친척들이 여러 종교나 무신론자라 혼자서는 감당이 안 돼 운다. 그나마 부부가 같이 신앙으로 주 앞에서 살지만 부모나 안 믿는 일가에 밀려 어쩔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가끔 딸애 친구 애를 생각하는데, 저도 부모가 목회자이다. 그런데도 큰 애도 그랬고 작은 애마저 안 믿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였다. 그 집이 또 부유하여 이런저런 일로 교회나 친정에 도움을 받는 모양인데, 그것 때문에도 저들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다. 안 믿는 사람들로 그 관심은 세상을 누리는 것일 테니, 주말을 끼고 주일이면 또 그렇게 캠핑을 가고 어디 여행을 간다. 돈 버는 수완이 어찌 그리 좋은지 어디 주식을 사든지, 건물을 사든지 하면 그게 다 수익을 내니 저들로서는 빌어먹듯 믿는 신앙이란 게 얼마나 가소로울 텐가? 그러다 보니 친구 애도 애까지 낳고는 더더욱 주일을 지킬 수 없고 줌으로나마 참여하던 예배조차 희미해져 간다. 앞서 언니 애가 결국은 위암이 걸려 다시 주께로 돌아왔다는데, 이상하지? 그러고도 다시 늘 옛 생활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딸애에게서 종종 그 아이 일을 들을 때면 더더욱 마음이 안 좋은 것은 그 때문이다. 이 허무한 세상에서 일시적인 삶을 살면서도 이처럼 믿음으로 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져진다. 살만할 때는 사는 게 즐거울 따름이라, 인생 뭐 있겠나? 싶은 것일 텐데…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2-13).” 바울이 왜 자주 자신의 지난 행적을 고백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오늘의 감사는 어제의 용서와 주의 은총과 비례한다. 은혜가 없는 삶은 허무하다.

 

하여 오늘 말씀은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전 1:12-13).” 우리의 이와 같은 수고가 우리들로 하여금 주를 바라고 구하게 한다. 인생의 허무함을 알 때에 지금 누리는 모든 안락함이나 넉넉함이나 적당함이 모두 손에 쥔 모래 같아서 꽉, 움켜 쥔 줄 알았는데 어느덧 나이 들고 병들어서 더는 그것으로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16). 그런들 결국은 다들 같아서 한 줌 재로 돌아갈 뿐이다.

 

하여,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오늘도 이 말씀 앞에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감사로 아침을 연다. 친구는 담임 목사님이 어디 암 3기로 성도들이 다 함께 기도하였는데, 기적 같이 그 수치가 항암치료 직전에 사라졌다며 울먹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을 연장하시거나 단축하시거나 모두가 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으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3-14).” 하는 나로서도 남은 생을 은혜로만 산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3).”

 

할 때에,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시 2:8-9).

 

우릴 옥죄는 수고의 틀 안에서 우리로 기뻐하며 찬송하게 함은,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9).

 

아! 그리하여,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