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도 깨달아 알았도다

하현. 2025. 11. 12. 05:20

 

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 지혜자는 그의 눈이 그의 머리 속에 있고 우매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만 그들 모두가 당하는 일이 모두 같으리라는 것을 나도 깨달아 알았도다

전 2:13-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시 3:3-4

 

 

‘해 아래 인생’의 절대 허무를 예를 들어 증거한다. 이를 지적하고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려 한다. 우선은 1장 12절부터 3장 22절 가운데서 해 아래 인생의 절대 허무를 예증을 들어 지적한다. 앞서 비탄하며 이를 통회한다(1:12-2:23). 즉 인생을 아무리 풍요롭게 하고 즐겁게 영위하여 숭상한들 근본적으로 실존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지혜조차 인생의 근본이랄 수 있는 이와 같은 허무를 극복하지 못한다.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를 누구보다 누렸던 솔로몬의 진술이다.

 

해 아래 인생의 허무함을 이처럼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인생들이 욕망하는 육체적 쾌락의 허무에 대해 지적함으로 동일하다. 곧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 정신적 추구와 육체적 추구를 살피면서 진술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 화자는 자신이 육체적 쾌락 추구를 통하여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하고자 하였으나 도리어 환멸만 더했다고 토로한다.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 하여(3).”

 

누구보다 솔로몬은 이를 다 취할 수 있었고 이루어도 보았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10-11).” 그러니 저이 같은 이가 이처럼 말하는 것은 경험으로 다 해본 것이어서 ‘그 후에’ 몰려오는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벌인 대규모 사업을 통한 부귀영화와 그것을 통하여 탐닉하였던 육체적 쾌락의 일단을 소개하고 그 결과의 허무함에 대하여 토로하기도 했다(4-7).

 

이는 저가 직접 누렸던 것으로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8).” 그러니, 그렇다 한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11).” 그렇듯 다 해봤으면서도 이런 소릴 하는 것에서 인생의 허무함을 짐작할 수 있다. 다들 한줌이라도 더 쥐고 살기 위해서 기를 쓰고 산다지만, 돈이란 게 결국은 만족함이 없는 것이고 육신의 즐거움은 한강에 배 지나간 자리처럼 금세 사라질 뿐이었다.

 

이를 시편으로 묵상하면,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시 39:11).

 

그러므로 탄식함으로,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62:9)

 

그런 인생을 놓고 왈가왈부 서로의 진영이 갈리고 각자의 주장이 나뉘어서 물고 뜯고 서로의 것을 차지하려 안간힘을 쓰는 형국이다. 거짓에 거짓이 난무하여,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사 5:18-19).”

 

오늘 우리 사회의 갈등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으로 드러나는 현실이 그러하다. 이에 최후에 웃는 자가 승리한 것이라고 하지만 오늘 전도서에서는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1-2).” 점점 더 사회가 재밌는 것, 웃긴 것, 즐거운 것을 추구하며 사는 것으로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는 줄 아는데,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11).”

 

이에 대하여 바울 사도도 고린도교회를 향한 서신에서 밝히기를,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 15:32).” 하고 덧붙여 말하기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33-34).” 결국 이는 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하는 것이다. 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르기를,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5-26).”

 

하고 형들의 미움과 살기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던 요셉의 생을 일컬어 설명하고 있다. 곧 삶의 의미를 쾌락에 두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것일 뿐이다. 이를 반증하듯 성매매의 역사는 자고로 인간의 역사와 함께 태동하여 오늘 날에도 버젓이 성업 중이다. 예전에 알았던 보육원 출신의 한 동생이 있다. 누구를 통해 그의 연락처를 알고 어찌 지내는가, 궁금하여 전화를 했었다. 당시에 형, 형하며 잘 따르고 귀여워했던 것이 기억나서 한 것인데… 일명 노래방 도우미 사업(?) 하고 있었다. 승합차에 여성들을 태우고 다니면서 유흥가에 내려주고 일정 시간 후에 다른 업소로 이동하는 식이라는데…. 예전에 그 어린 것이 곁에 앉아 복음송가를 같이 부르며 즐거워하던 모습이 생경하게 느껴져서 슬펐다.

 

무슨 재판부 판사가 그러한 접대를 받았네 어쩌네 하지만 실제 관공서 주변으로 있는 유흥업소마다 그런 주점들은 합법적으로(?) 성업중이다. 현재는 어떤가 모르겠는데 예전에 아이들과 논술을 할 때 우리나라는 술 소비량이 세계 4위로 1인당 한해 평균 소주 소비량과 음주로 인한 사건사고 발생으로 한 해 평균 사회적 손실비용이 얼마라는 통계를 가지고 그때 아이들과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그 아이들이 자라 오늘 날 그 소비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겠으나, 공교롭게도 대부분 어두운 밤, 야심한 시각의 도시 유흥가는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그때 같이 어울리며 살았던 날들을 돌이켜보면 그땐 정말 하나님을 멀리하고 살 때였다.

 

믿는 자들로서도 그 삶은 다를 바 없어서,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사 22:13).” 이에 대해 말씀은 엄히 경고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

 

하여 이사야는 경고하길,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5:8)” 그저 자신의 재산을 증식시켜 사는 데 윤택함을 추구하려는 자본주의의 생리에 대해 경고한다. 또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11)” 술에 취하여 육신의 쾌락에 도취되어 사는 희락주의자들에 대해 경고하고,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정직하지 못함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선동을 경고한다.

 

이런 자들은 모두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자신의 판단과 생각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며 산다. 그러다 보니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상류층을 형성하여 살면서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2).” 단지 이 땅에서의 승리와 보상으로 즐거우면 복에 겨운 것으로 안다. 결국 이를 두고 성경은 ‘저주의 자식’이라 칭하는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벧후 2:13-14).”

 

결국,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다들 저마다 이유와 명분은 있다. 자식에게 물려줄 것을 염두에 두고 쌓아두고, 자신의 노년을 대비한다며 쌓아두어, 이 땅에서는 그것이 적당히 유용하고 필요하다. 하여 시인은 탄식하기를,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시 73:4-9).

 

그러니 다들 권세에 취하면 선악을 구분하지 못한다. 염치란 게 없다.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여긴다. 뉴스를 볼 때마다 특히 정치권이나 검사, 판사, 어느 유명인들의 기사가 하나같이 닮았다. 저들은 반성도 없고 사과도 없다. 그런 걸 모르는 ‘저주의 자식들’이 수두룩하다. 오늘 본문에서도 ‘나의 지혜로’,‘나를 위하여’,‘내가’,‘내 손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사실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본문의 외침은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11).” 이를 주의 은혜로 알고 회개하고 주 앞에 고하여 엎드린 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하는 고백으로 우리가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때의 달라진 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남은 생을 굳세게 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 이 한 날을 두고,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31).” 나를 죽임으로 내가 산다. 나의 육신의 소욕을 날마다 죽임으로 우리 영혼이 날로 새로워진다.

 

이에 성경은 일갈하며,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 7:51).” 그럼 우린 어떤 하루를 살아야 할까?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하여 천하의 바울도 ‘날마다 죽노라’ 하고 절규하였듯이 우리는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한다. 왜냐하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아니면 누구들 자기가 자신을 이기며 살고 있는지? 신앙으로 산다는 일은 이처럼 그리할 수 없음으로 통회하고 자복하며 주 앞에 나아오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 그 영원한 영생의 삶을 바로 안다면,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5).” 그렇게 하여 성경의 영웅들은 믿음으로 인내하였으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이에 오늘 말씀은 “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 지혜자는 그의 눈이 그의 머리 속에 있고 우매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만 그들 모두가 당하는 일이 모두 같으리라는 것을 나도 깨달아 알았도다(13-14).” 곧 지혜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주신 삶을 맡은 자로 사는 것인데, 우리 눈이 그의 머리 속에 있다? 이는 무슨 의미일까? 묵상해 하면 먼저 솔로몬은 지혜에 대해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1:18).” 하며 다소 부정적으로 진술하였다. 그러나 앞서 잠언에서는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잠 1:5).” 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7).”

 

더러 누가 신앙으로 사는 일을 힘들다 하는데, 이를 이해한다. 신앙 없이 믿음으로 살지 않을 때는 그저 아무렇지도 않던 죄의 근원이 그저 즐겁고 재밌고 유익하기만 하다고 여겼는데 말이다. 그게 뭐 어때? 그 정도가 어때서? 하는 식으로 타협하고 사는 이들에서 더는 그럴 수 없는 신앙, 곧 우리 안의 주의 영이 거하심으로 육신이 원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원하시는 것은 육신을 거스르면서 항상 두 자기가 싸운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삶으로는 힘들다. 아, 아침에 일찍 일어나 말씀 앞에 앉히는 일, 이를 묵상하여 글로 쓰는 이 일이 육신으로는 마냥 즐겁지만 않다. 날이 추워지면서 3시에 알람이 울릴 때면 나 몰라라 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굴뚝같아진다. 그때 내 안에서 ‘꼭 그래야 해?’ 하며 속삭이고 이불을 끌어당기게 한다.

 

결론은 세상 지혜의 허무함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의 전환을 일깨운다. 이를 위해 바울은 몸을 쳐 복종시켰다고 한다. 이때에 참 지혜는 빛으로 나가고, 우매는 어두운 거리를 밤새 배회하듯 이끈다. 이에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 2:26).” 우리 스스로 추구하려는 모든 것, 스스로의 지혜마저도 헛될 뿐이다. 오직 우리의 영적인 ‘눈이 밝고’ 그리하여 ‘우리의 눈이 우리의 머리에 있다.’ 하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은 이 땅의 영화와 출세와 성공이 아닌 것이다.

 

곧 우리가 지혜를 가지고 빛으로 나아감은,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하는 말씀으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12:35).” 곧 얼마 후면 이 땅의 어둠도 영영 어둠 속으로 묻힐 것이다. 이에,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아멘.

 

하여 오늘도 주께 기도한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시 3:1-2).

 

그러나 우리가 확신하는 바,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3-4).

 

그리하여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