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하현. 2025. 11. 13. 04:42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 4:8

 

 

결정적으로 우리의 잦은 실수와 죄는 ‘때’를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 지혜자는 이를 깨달으며 일깨운다. 우리의 모든 때는 주가 다스리신다. 하여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19).” 하여 우리의 지혜는 때를 기다림이니,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18).”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함으로 다르다. 하여,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20-21).” 하면 사람이면서 짐승과 다를 게 없을 때는 결국 저의 영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갈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22).”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결론이다.

 

오늘 여기,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은 이를 주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데서 가능하다. 세상은 우리의 눈을 상대적으로 만들어서 남들과 다르거나 뒤처지거나 하면 인생의 낙오자가 된 것으로 여긴다. 이를 만회하려 자신보다 힘이 센 쪽으로 줄을 서고 그의 힘으로 어찌 좀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원한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일갈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11).”

 

‘때를 따라, 하나님이, 아름답게 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보실 때에 좋았더라’ 하심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그러하다(창 1:31). 곧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하실 때, 그것이 아름답고 흠이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하실 때, 이때를 우리가 기다릴 수 있으면 그것이 믿음이 그로써 견디기도 하고 참을 수 있는 것은 신앙이다. 신앙을 생활이라 하는 것은 이를 우리 ‘사람에게, 주셨느니라.’ 하는 말씀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하여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들의 마음에 ‘영원’을 두셨다. 이 죄악 된 인생의 유한성과 연약성과 그로 말미암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곧 우리는 있으라, 하여 있는 그런 여러 피조물과 다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1:27, 2:7).” 그런 뒤 우리에게 더하신 사명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1:28).”

 

이에 우리는 오늘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주 안에서 충만하게 살아야 하는데, 세상적으로 보이는 것들로 바로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이루고 건설하여 자신들의 수고로 하늘에 닿고자 하는 무리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간다. 하여 오늘 전도자는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18).” 아, 이를 깨닫고 바울은 절규하였던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9-20).” 그것은 짐승과 다름이 없음이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 이를 알고 우린 하루에도 몇 번씩 괴로워할 줄 아는지? 점점들 자신의 이런 일로 괴로워할 줄 모른다. 반성이 없고 돌이켜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저마다 남을 탓하고, 그 이유를 남에게 돌려 오히려 큰소리친다. 그게 힘인 줄 안다.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게 사람의 본성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로써 괴로워하여,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이에 오늘도 주 앞에 엎드리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하여 나는 할 수 없음을…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시키시길.’ 나는 자주 기도하듯 찬송한다. 예배 전에는 이 찬송을 기도하는 심정으로 부른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 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한 맘 충만하게 하소서

성령이여 강림하사 크신 권능 주소서

원하옵고 원하오니 충만하게 하소서

힘이 없고 연약하나 엎드려서 비오니

성령강림 하옵소서 충만하게 하소서

정케하고 위로하사 복을 받게하소서

충만하게 하시오니 무한 감사합니다

-예수여 비오니 나의 기도 들으사

애통하여 회개한 맘 충만하게 하소서

아멘

 

성령으로가 아니면 우리는 짐승과 다를 게 없는 사람으로 살다 땅으로 내려갈 뿐이다. 고로 하나님은 우리가 이를 알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이를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측량할 수 없으니 남을 따라 하기 일쑤고, 남들처럼 사는 게 꿈이 되었다. 여기서 ‘남들처럼’이란 어차피 그러는 동안 남보다 못한 삶일 뿐인 것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우리 스스로도 안타까워할 것은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11).” 이러한 결과를 끝까지도 ‘농담으로’ 듣다 소돔과 같이 사라질 뿐이다.

 

오늘 날 우리 사회의 여러 논쟁과 격한 대립의 갈등을 보면 저게 어디 사람의 모습이라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 짐승이다. 개들은 길에 나와 끙끙거리다 어디든 다리를 들고 똥오줌을 갈긴다. 사람은 이를 봉지에 담아 들고 따라간다. 줄을 잡은 것이 사람인지 개인지 나는 분간이 어렵다. 뇌물을 주고도 사회적 예의라 하지를 않나, 이를 숱하게 받아먹으면서 흡족하게 여겼을 이나, 어느 쪽이 사람이고 짐승인지 혹여 둘 다 짐승인지…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전 7:7).”

 

하나님은 사람을 지혜자로 세우셨으나 사람은 스스로 우매자가 되어, 개가 사람을 끌고 다니고 따라오며 똥오줌을 줍게 한다. 그렇듯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사 5:23).” 그럼에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다들 그러고 산다면서 이를 사회적 관례라고 외친다. 그러니 우리의 삶이 개판이 되었는지, 본래가 개였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사회 현상은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암 5:12).”

 

이러한 사회를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아무렇지 않다면, 하여 우리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고 ‘애통하고 회개하며’ 살아야 할 것인데,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1:21).” 어쩌겠나? 보이지 않아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살아간다(22). 사느라 사는 일에 연연하느라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3).” 정작 그러한 삶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한사코 부정하면서 스스로가 짐승으로 산다.

 

오늘 본문은 이에 일축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그런데 그 때를 기다릴 수 없어서 죽어라 하고 산다고 사는 일이,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9).” 서로가 한 치 앞도 알지 못하면서도 꾸역꾸역 자기주장에 겨워서 산다. 어쩌겠나? 그 또한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10).” 이는 죄로 말미암은 것이어서 그 결과 중 하나로, “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7-19).”

 

그러니 다들 사는 게 지옥이라. 기를 쓰고 산다고 사느라 하나님을 뒤로 하고 예배는 먼 얘기가 되었다. 천국은 막연하여 돈 많은 게 장땡이다. 다들 돈돈거리다 돌아버린 듯 그놈의 명품이 뭐라고 그걸 받고 좋아서 그 짓거리로 살았는지… 이게 어찌 누구 한 사람의 이야기인가? 나라고 다를까? 종종 오늘의 이 처지에 앉아 어디가 불편하고, 모자라서 힘에 겨워 쩔쩔매면서, 그리하여 주를 바라는 게 복이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하면 나는 눈물이 고인다. ‘나를 감화 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한 맘 충만하게 하소서.’ 하여 주루룩 흐르는 눈물이 나를 살린다. ‘힘이 없고 연약하나 엎드려서 비오니 성령강림 하옵소서 충만하게 하소서.’ 성령으로가 아니면 나의 남은 생은 지옥일 뿐이다.

 

이에 전도자는 살핀 것인데,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18).” 아, 하여 나는 나의 약함으로 주의 도우심을 바라였다. ‘나의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남이다.’ 이로써 오늘도 성령이여 강림하시고 내 안에 좌정하시기를 바라였다. 오늘을 보면서,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시 4:2).

 

하고 시편은 묻는다. 그럴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3).

 

고로 우린 주를 부르고 아뢰고 고하여 복이었다. 이것이 욥의 신앙이지 않던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나에게도 이와 같은 믿음으로 성령이 강림하여 충만하시길.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하물며 오늘을 살면서 우리 자신의 우매함에 대하여 주의 긍휼하심을 구한다.

 

모든 생은 다 그러하여서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삼하 14:14).” 하여 오늘도 주 앞에 담대히 나아와 주의 이름을 부르며 나의 연약함을 아뢰며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니,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시 49:10).

 

이와 같은 삶의 이치를 인정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라 다들 그처럼 쌓아두고 다들 내 것인 줄 알고, 꽉 쥔 손을 놓지 못하고 끌려가는 원숭이 같다. 그러니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셀라)

(89:48).

 

스스로를 구원하겠다고 거짓에 거짓을 더하다 CCTV에 찍히고, 누가 증언을 하고, 녹취록이 나오고, 집안에서 증거가 나오는데도 당당함이 짐승이 아니면 가능하겠나? 부끄러운 것을 모르니까 길가 어디 아무 데서나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다리를 들어 찔끔거리고 이를 보면서 또 흐뭇해하는 이상한 세상을 살고 있었다. 어제 그렇듯 산책을 하고 어디 카페 앞 길가에 앉았다가 그러한 작태를 보면서 우리 사는 모습을 생각하였다. 다들 자신은 다른 줄 알고 나름을 계획을 자부하며 살고 있지만,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결국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사는 꼴이 지겨워서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하여 다시 또 누구는 어떠한지, 저의 되풀이 되는 말과 생활과 그 결과를 보면서 나 역시 다시 또 전하여야 할 말씀을 전하게 하신다. 그런 나를 두고 공격하기를,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10).”

 

나의 이와 같은 어려움에 대하여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하여 오늘은 알 수 없어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이를 말씀으로 미리 알리시는 바,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나의 허물과 실수와 죄악이 아무리 어떠하다 한들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 충만하심으로 능히 감당하지 못하실 리 없으니… 오늘도 다만 내게 더하신 한 날의 수고로 족할 뿐이어서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전 3:22).” 나의 몫으로 살며 주만 의뢰할 따름이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시 4:1).

 

오늘도 시편으로 기도하고 찬송하기를,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3, 5).

 

다른 더 좋은 길은 없으니,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8, 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