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 4:12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시 5:3, 7
주의 나라 가는 날 동안 둘이 합하여 서로가 동행함이 복이다. 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서로를 위하고 기도함이 아름답다. 한 사람이 홀로 독처하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셨고 그리하여 처음 사람 아담에게 하와를 주셨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일부일처제는 무너졌고, 죄가 관영하여져 여러 명의 아내를 두거나 남편을 원하였다. 그러면서 쉼을 주셨던 것을 사람은 어김으로 초기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은 이 땅에서 쉼을 얻지 못했고 ‘희년’을 지킨 이는 한 사람도 없다. 이에 오늘 지혜자는 탄식하는 것이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1).”
서로가 서로를 억압하는 현실을 산다. 인생이란 그렇게 되어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 실용주의에 빠져 은연중에 다원주의자로들 살아간다. 하나님을 혼용하여 믿는 모든 종파는 이단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더하여 또 다른 구원자를 두는 믿음은 거짓이다. 어제 마침 누구와 이런 말을 하였고 오늘 우리 사회의 현상이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을 지키며 살기에 매우 유혹이 많은 시대임을 절감하였다.
이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4-5).” 하는 게 종교에서 뿐 아니라 모든 일상에서도 버젓이 팽배하다. 어디 교회를 다닌다 하여 듣다보면 저가 예수를 말하면서 다른 누구, 어떤 이를 같이 둔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운운하다 이 나라의 얼을 붙들고 있다. 그야말로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6).” 이는 같은 민족으로 뿐 아니라 전 세계가 문화라 하여,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7-8).”
동양의 문화는 차치하고 우리나라의 얼이나 한(恨)이 문화가 되어 전 세계를 열광시킨다. 소위 정신의 줏대로 ‘하느님이 보우하사’ 하는 애국가에서부터 우리는 신앙의 중심이 흔들린다. 하여 오늘 지혜는 탄식하기를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2-3).” 죽었음으로 더는 최소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못한다. 또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 하나님과 완전한 둘이 하나가 되어 평안을 누린다.
하여 오늘 시편도 기도한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시 5:8-10).
곧 오늘을 살며 애통하여지지 못하고 그 마음이 가난하지 못한 자는 위로도 천국도 알지 못한다. 오늘 지혜자는 ‘해 아래 인생’의 허무를 가중시키는 요소로 위로,평안,사랑과 헌신의 대상이 없음을 한탄한다. 학대받는 자에게 위로자가 없는 해 아래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인생의 허무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평안을 얻기 힘든 해 아래의 인생으로는 허무할 뿐이고(1-3), 여기서 마음이 평안을 얻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성공이 이웃의 시기를 받고 상대를 공격하는 데 쓰인다는 것이다(4-6). 그러므로 사랑하고 헌신할 대상이 없는 해 아래 인생의 허무에 대하여 새삼 고백하는 것이다(7-14). 이에,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14).”
그러니 참 우리가 산다는 일이 얼마나 허무하고 덧없는 것인지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적 관여와 질서가 없다면 그 무엇으로 이 허무의 삶을 바로 살 수 있을까? 우리는 누구도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15).” 이러한 우리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기란 불가능하여 이를 대신하여 드는 모든 게 우상숭배이고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을 더하는 일이다. 모두가 하나라는 말처럼 공허하고 허무한 메아리도 없다. 인생은 모두 이기적 탐심에 사로잡혀 오직 자기만을 위하여 산다. 그러한 사람은 외로울 수밖에 없고 인생의 낙을 누리지 못하다 결국 인생의 허무 속으로 사라진다.
이러한 허무의 극복을 위하여 인생의 참 사랑과 헌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9-10).” 그러나 이처럼 이상적인 관계는 불가능하여 서로가 험난한 삶을 자처하며 살아간다. 인생에 참된 위로자는 없다. 다른 사람의 시기를 받아야 한다. 사랑과 헌신의 대상이 없다. 오직 자기의 이기적인 탐욕에 사로잡혀 사랑도 헌신도 자기만족으로 외따롭다. 그리하여 보니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1).” 하는 말로 시작하는 것이다.
이를 보시고 하나님도 탄식하셨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5-6)” 이렇듯 비극적인 세상에서,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 14:2-3).
그러나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 51:3).” 하심으로 이 땅의 평화를 선언하셨다. 이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또한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7).” 그러므로 우리는 찬송한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곧 오늘 본문은 물론 전도서 전체가 다소 음울하고 염세적인 내용으로 우리의 비극적인 현실을 논하는 것 같지만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참 평안과 안식을 알게 한다. 전능하신 이의 참 사랑을 깨달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한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4-5).
이 땅의 모든 결말은 하나님의 승리다. 이김은 주의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하여 우리가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b-10).” 하는 이 놀라운 탄성과 감격과 확신은 주가 주신 말씀으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하여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는다. 우리의 노여움을 주님은 찬송이 되게 하시고 그 남은 노여움은 허락하지 않으신다. 내 안의 어떤 불안과 탄식과 한숨이 늘 나를 괴롭게 한다 해도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하여 오늘도 우리는 주 안에서 승리한다. 늘 세상에 지고 사는 날들 같지만 우리의 찬송은 엄청난 값을 주고 산 것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이를 앎으로 나는 자다 깨서 일어나 앉아 습관을 좇아 말씀을 묵상하고 글을 쓴다. 이 글을 쓰다 시계를 보니 이제 새벽 3시다. 나는 순간 시간을 잘못 봤나? 했다. 물론 이를 위하여 의식적으로 저녁에 일찍 잠을 잔다. 오늘은 아내가 다른 쪽 무릎을 사진 찍어보고 어쩌면 또 수술을 해야 하려나… 어제도 같이 걷다 고통을 호소하는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나은데, 하는 생각을 늘 한다. 아픈 것도 일이라고 늘 아픈 사람이라 요령이 있는데, 아내가 아프면 덩달아서 곁의 사람들도 괴롭다. 주님, 하고 나는 저절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한두 시간 일찍 눈을 뜨고 평소처럼 말씀 앞에 앉았을 때,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2-3).” 하는 오늘 지혜자의 탄식을 공감한다. 다들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기를 바라지만 나는 잃어버린 우리의 영원한 안식과 쉼을 원한다. 하나님과 하나 되는 평강을 바란다. 이때에 말씀의 위로가 아니면 무엇으로 견디며 살아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어려워지는데,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3).”
이에 오늘의 위로도 말씀으로였다. 그리하여 다시 힘을 얻고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 4:11).” 나는 조용히 나의 이 시간이 맡기신 사역이거니, 그리하여 삶은 살아서 복된 것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어서,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곧 어떠하든지 감사와 찬송을 이루게 하심으로 주가 영광을 받으신다. 짧은 인생을 허망하지 않게 사는 것은 오직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과 평안을 얻으며 우리로 하여금 위로와 기쁨을 얻을 수 있도록 구하시는 이를 바람이었다.
하여 삶이란 참 아이러니하여서,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1).” 하여 누구는 감사할 수 없는 처지에도 감사하고, 누구는 감사해야 할 상황에도 불평이라,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5-6).”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주가 우리를 지키시고 떠나지 않으심을 안다. 하여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신기하지?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하여 자신의 이런저런 사정을 말하고 싶어 하던 이에게 우리 교회의 처지와 그 형편을 말했더니 이상할 정도로 더는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 결국은 모두 자신의 사정을 말하고 위로 받고 기도는 부탁하면서 정작 우리의 어려움을 저에게 말했을 때 저는 숨어버리듯 사라진다. 나의 정다웠던 친구들은 그렇게들 증발하였고, 그러니 둘이 하나 된다는 일은 에덴동산 이래로 불가능한 현실이 되었다. 희년이면 가진 것을 놓아주고 땅도 쉬게 하여야 하는 일을 단 한 사람도 이를 준행한 바 없다. 다들 그저 자기 살기 바쁘고 자신의 슬픔과 걱정만이 전부이라,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그는 자기의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을지라도 감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음이니라(13-14).” 하는 말씀에서 오늘 지혜자의 깨달음이 깊다. 우리를 스스로 가둔 자신의 감옥에서 산다. 산다고 사느라 여념이 없어 정작 참 평안을 얻지 못한다. 하여 “내가 본즉 해 아래에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다음 자리에 있다가 왕을 대신하여 일어난 젊은이와 함께 있고 그의 치리를 받는 모든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15-16).” 그러니 누가 감히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나? 모든 게 다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될 뿐이다.
이와 같을 때,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하여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하며 사도와 선지자들과 성경의 모든 믿음의 영웅들이 바라였던 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전 4:9-10).” 오늘 이 지혜의 말을 뒷받침한다.
하여 기도하길,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시 5:1, 3, 7).
그리하여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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