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하현. 2025. 11. 15. 05:29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전 5:2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 6:9

 

 

말이 마음을 주동한다. 마음은 물결 같아서 잔잔하다가도 작은 바람에도 요동친다. 물 위로 윤슬이 눈을 어지럽힌다. 한참 낚시를 좋아할 때 저만치 찌를 바라보고 앉았다가 자글자글하는 물결에 반짝이는 햇빛이나 달빛에 노려보던 찌를 놓치고는 했다. 마음이 가 있는 곳에 꿈이 넘실거린다. 꿈은 그 사람의 지나온 날을 함축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이에 말을 적게 할 것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2).” 걱정과 꿈을 같은 선상에 놓았다.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3-7).”

 

이로써 우리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다. 우리의 생각으로도 꿈으로도 걱정이나 여러 마음으로도 감당할 수 없다. 일생을 사는 동안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18).” 오늘 이 한 날이 나의 것일 뿐, 앞으로의 일이든지 저만치 지나간 날의 흔적이든지 모든 것은 ‘이미’ 또는 ‘아직’ 내 것이 아니다. 무던히 오늘을 다 하는 게 내게 맡기신 몫이라,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곧 우리의 완고함은 지난날의 마음 때문이다. 오랜 시간으로 굳어진 마음이 완고함이다. 이는 마치 굳은 근육 같이 아프다. 한동안 등세모근이 아파서 병원에서 주사치료를 받았다. 같은 자세로 오래 있어 거북목이거나 일자목일 때 이러한 통증이 따른다고 의사는 말했다. 우리 마음도 그와 같아서 나이가 들면서 남을 향한 마음보다 자신을 두둔하려는 마음이 더 굳어져서 생긴 고집으로 잔소리가 늘어나거나 참견이 일어난다. 뭐라 일컫는 말에서 이미 자신의 생각이나 말이 정답으로 정해져있다. 그러다보니 시쳇말로 ‘꼰대’란 조롱어린 소릴 듣는 것이다. 이를 푸는 방법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고, 이는 주께 아룀으로 말을 삼가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수 있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누구에게든 다가가 생채기를 낸다. 흔히 훈계나 조언도 그런 점에게 ‘너를 위하여’ 흔들어대는 가시나무 같다. 찌르면 아프고 아프니까 싸움이 난다. 그래서도 가족이란 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다. 적당히 가까워서 적당히 멀어야 하는데, 특히 가족에 대하여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원칙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이 이삭 곁에 여러 다른 자식들을 멀리 떨어뜨려 서로 부대끼지 않게 한 것도 그것이다. 마음의 상처는 대부분 가족에 의한 것이다. 서로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다. 자신만 피해자인 경우는 없다. 특히 삼가 묵은 마음을 표현하는 일은 주 앞에서 유효하다.

 

하여,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 6:9).

 

그러니 우리가 자칫 저만치 주목해야 할 찌와 같이 말씀에서 눈을 떼게 하는 윤슬은 모름지기 걱정이다. 걱정은 마음이 앞서는 여러 생각이다. 나는 교회를 하게 되면서(?) 나의 여러 생각이란 게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았다. 제일 황당한 것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누가 나왔으면 하였거나 어떤 가정을 염두에 두고 하였는데 이를 하나님은 보기 좋게 걷어차신다. 순간 나는 ‘따귀 맞은 영혼’으로 어안이 벙벙하였다. 여전하여서 왜 그런 일은 수시로 일어나는가 보았더니,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3).” 하는 오늘 지혜의 결정이다.

 

그러니까,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7).”

 

특히 교회를 이뤄가는 데 있어 자식이나 아내니 하는 관계는 모두 ‘한 영혼’으로 재설정 돼야 한다. 가정에서, 식구들조차… 하는 잣대로 목회를 좁히면 오만가지 빛이 찰랑거림으로 눈이 시리고 눈물이 흐를 뿐이다. 오늘 여기서, 전도자는 여호와 경외의 구체적인 실천 자세로 형식적 제사와 경솔한 간구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겸허한 경청을 권한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18).”

 

하여, 먼저는 예배에 있어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1).” 흔히 사역자의 가정에서 그 자식들을 교회 밖으로 밀어내는 경우는 저의 마땅하다고 여기는 소유의식 때문이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우리로 발을 삼가라 하심은 함부로 내딛지 말라하심이고, 이에 ‘삼가다’는 것은 ‘지키다’, ‘보호하다’로 ‘조심하다’, ‘신중하다’의 뜻을 유출하게 한다. 곧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지, 가족이나 자식이니 하는 관계 그 이상의 동등함으로 주 앞에 서게 하신다.

 

서로가 부주의하고 경거망동하게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망령되게 행하지 말고 신중하고 거룩하게 행동하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린 그 앞에서 서로 개별적이다. 각각의 나의 하나님을 만나기까지는 저마다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 텐데, 보통 그 부모가 신앙이 좋을 때 상대적으로 그것으로 자식을 억압하고 강요하기 일쑤다.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거룩하심을 오늘 말씀이 재인식하게 한다. 즉 내가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내가 주체가 아니다. 즉 나는 공급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주 우린 이를 무시한다. 다만 전하여 선포할 뿐, 나 역시 듣는 이로서 다른 성도와 같다.

 

또한 성도는 소비자가 아니다. 수동적으로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이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재생산되어 또한 삶에서 누군가에게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향기’이고, ‘그리스도의 편지’와 같이 사역자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교회에서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합 2:20).” 섣불리 말하여 입 밖으로 나온 마음은 자칫 그 마음과 달리 상대를 찌르고 윽박지름으로 곁길로 달려가게 한다. 대부분의 목회자 가정에서 그 자식들이 그릇 행함은 목사가 부모라는 이유로 자식을 소유개념으로 너무 밀착해서 그렇다.

 

다만 주의 ‘은혜’로 아브라함도 앞서 노아도 의인이라 하신 것이지 저들이 무얼 어떻게 잘해서 얻은 결과가 아니다. 이를 거꾸로 놓아서 보면 뭔가 먼저 해야 할 것 같지만 그 또한 은혜가 아니면 의로울 것도 없다. 하여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5, 8).” 이를 마치 저가 뭘 잘해서, 남들보다 나은 것으로 얻은 결과로 여기는 이상 은혜는 졸지에 보상이 된다. 보상은 은혜가 아니다. 수고의 대가로 얻은 삯을 은혜로 보지 않듯이…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은혜는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값없이 주신 것이라, 내가 치르고 얻은 은혜는 남을 찌르는 가시가 된다. 하여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수고와 애씀을 마음에 두고 살 때,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합 2:19).” 곧 우상이 별 게 아니라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18).”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이를 지적함은 스스로 뭔가 한 것, 그것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 일이었다 해도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곧 유익은 ‘말씀을 듣는 것’이다. 전하는 목사도 먼저는 듣는 자이다. 듣는 자는 들은 것을 전하는 자여야 하고, 서로는 그러므로 다르지 않게 주를 경외함으로 이를 이룬다. 이는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순종한다’는 뜻까지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듣다’는 스민다는 의미다. 스민 것은 배어서 말이나 행동이 자연스럽게 그리 열리거나 닫힌다. 이를 두고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하였고, 시인은 찬송하길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7, 14-15).

 

하였고 지혜는 말하길,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 21:3).” 하였고 이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 1:11).” 또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렘 7:23).”

 

덧붙여 호세아 선지자도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하여 이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세는 순종이었고, 이는 삶으로 드려지는 것이었다. 잔잔할 때는 선명하던 말씀이 어느 순간에 요동치는 마음으로 찰랑거리다 그 빛에 오히려 눈이 부시다. 눈물이 나고, 정작 그런 시선으로는 찌를 볼 수 없다. 여기서 본문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의 무익함을 경계한다. 반면 내실 있는 ‘신앙’은 말씀으로 순종하는 ‘생활’이 되어서 복되다.

 

그러므로 상대적인 모습으로는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이 대비된다. 저 역시 제사 드린다. 온갖 제물을 바친다. 자신의 희생을 더하고 이를 청구서처럼 챙기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같다. 기도하면, 내가 이만큼 헌신하면, 그랬으니 이런저런 결과로 보답하신 거야! 하는 식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저도 모르게 우상 앞에 세우는 형국이다. 이를 “나무에게 깨라” 하고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것으로 비유하여 경고하였던 것이다.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합 2:19).”

 

은연중에 우리는 바른 신앙을 종종 우상화하여 저버릴 때가 있다. 기껏 기도하고 수고하여 자신을 주 앞에 온전히 드리고는 “깨라, 일어나라” 하고 마른나무나 돌을 흔들어대며 자식이란 이유로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그리 내몰리게 하는 경우도 있다.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있는 자의 기도가 ‘가게를 제 값에 잘 팔리도록’ 또는 ‘우리 아이가 어느 대학에, 무슨 직장에, 좋은 배필을…’ 등등 흥정하듯이 기도의 목적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서 엇나가는 경우가 의외로 간구라고 생각한다. 구하라, 하셨으니 구했다고 여긴다. 찾으라, 두드리라, 하셨다고 그리 생각한다. 여기서 구하고 찾고 두드릴 것은 은혜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이어야 한다. 우리 생활의 필요로 그 기준을 헐값에 팔아서는 안 된다. 

 

이에 은혜를 입어서 당대의 의인이라 여겨 노아이고, 모세이고, 다윗인 것이다. 야곱이 뭘 잘해서 태중에서부터 훗날에 이스라엘이 되었나? 하나님은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 이를 싫어하신다. 우리의 순전한 마음, 모든 것을 다 주 앞에 내려놓은 심정으로… 죽이신다 해도 내가 주를 신뢰하기를,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이와 같은 마음일 때, 비로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아, 이 영광의 순간을 바란다.

 

이를 위하여 오늘 지혜는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전 5:6).” 주 앞에서 아뢰고 부디 말로 쏟아버리는 일이 없기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2).” 그러니 우리의 걱정과 말의 상관관계를 새삼 깊이 묵상하게 된다.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3).” 그러므로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7).” 이것으로 오늘의 모든 걱정과 염려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이 한 날에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18).” 이것으로 족하였으니, “그는 자기의 생명의 날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기뻐하는 것으로 응답하심이니라(20).”

 

주가 하실 것을, 나의 남은 날들도 이 교회도 한 성도도 그 영혼들도… 그러니 나는 다만 말씀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고 말씀 앞에서만 살아가기를… 그나마 아이가 하나 그만 둔다면서 아내가 걱정을 한 바가지 하였다. 무릎 어느 쪽은 수술이나 시술을 해야 할 것 같고, 돈은 없고 걱정은 늘고… 이런저런 말을 들을 때 나의 마음도 어려워져 일렁거리기 일쑤라, 주님! 하고 나의 생각을, 말을 멈춰 세우듯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하고,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시 6:2-3).

 

주 앞에 아뢰지 않는 말은 자식에게나 또는 내가 만만하게 여기는 자의 어떤 부분을 지적질하고 훈계랍시고 우기게 된다.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4).

 

주밖에 없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6-7).

 

할 때에,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9-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