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전 6:2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시 7:10
감사를 알지 못하면 누릴 수 있는 능력도 없다. 있는 것으로 수고하여 이에 복되다고 주를 찬송하지 못하면 더하여져 넘쳐도 모자랄 뿐이다. 전도서의 관점은 ‘해 아래 인생의 허무’에 대해 논한다. 이를 극복하기란 주를 경외함으로다.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5:7).” 어제는 우리의 헛된 수고에 대하여, 오늘은 주신 바에 있어 이를 만족함으로 누리지 못하는 것을 병이라 정의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6:2).”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을 절대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느낄 때 항상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더 가진 것 같거나 자신은 늘 모자란 것 같아서 족한 줄을 알지 못한다. 일생에 희락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것보다 허무한 게 또 있을까? 하나님께서 재물과 부요와 존귀와 자녀와 장수를 부족함 없이 허락하여 주셔도 이를 누리고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허무할 뿐이다(1-6).
곧 자신에게 주어진 분복에 자족하지 못하는 인생의 허무를 지적하고 있다(7-9).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인생은 허무하다. 소위 가진 사람이 자신이 가진 것으로 자기의 분복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이 허무하다. 곧 해 아래 인생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자신의 일생에서 주신 바 그 분복으로 정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순복하지 않음으로 불평하며 논쟁하는 것은 불신앙이다(10-12). 이를 두고 지혜는 논하길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1).” 우리 마음을 무겁게 압박하는 것은 세상의 여러 적들이 아니라 스스로의 만족함이 없을 때이다.
성경의 모든 선지자와 사도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치고 하나님으로 인한 자신들의 처지와 사정에서 자족함으로 말씀을 곧 약속을 붙들지 않은 사람은 없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빌 4:11, 딤전 6:6).” 하는 이 놀라운 신앙의 덕목은 우리로 감사할 줄 아는 능력을 더한다. 결국 이는 기도와 감사로 거룩해진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4:4-5).”
비록 오늘의 고통이나 불행마저도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믿음으로, 설령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하여 제자들로 이는 평소 연단을 통한 것으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가령 오늘 나의 마음에 또는 상황에 어떤 어려움이 주어졌을 때, 이는 운동이나 재활치료나 연마의 순간과 같아서 이 순간은 괴로울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신앙은 비로소 주의 뜻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3).” 다소 극단적이기는 하나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함은 감사를 알지 못함이고, 이는 저주와 같다. 보기도 충분한데 저로서는 만족함을 모르는 것이니 무엇으로 더욱 더 채운다 한들?!
이는 남의 시선으로 판단하고 그에 따른 것으로 비교하고 평가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과 같다. 이에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사 5:8-10).” 풍족하나 황폐하게 사는 자들의 특징은 가진 게 많으면서 더 많이 소유하려는 것으로,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이 얼마나 빈궁한 영혼인가?
나름은 정의를 외치고 자신의 옳고 그름의 판단으로 세간의 이목을 끄는 신앙인을 볼 때면 종종 안타까움으로 그 영혼을 생각하게 된다. 저가 어디 교회 장로이면서 여전히 세상의 정치적인 구호나 선동에 휩쓸려서 살거나 그런 명분으로 총리를 하고, 장관을 하고, 어디 위원장까지 하면서 자기주장에 매몰된 경우가 그러하다. 결코 저의 귀는 들을 수 없고 그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보는 것으로 옳고 들은 것으로 전부라, 그러느니 차라리 낙태된 자가 더 복되다 하는 것이다.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의 이름이 어둠에 덮이니 햇빛도 보지 못하고 또 그것을 알지도 못하나 이가 그보다 더 평안함이라(4-5).”
곧 저의 외침과 주장이 그만큼 평안을 얻지 못함을 논한다. 즉 낙태는 헛되이 왔다가는 것 같이 태속에서 불행한 죽음을 당함으로 세상에 온 목적도 없이 존재하지도 못한 것 같으나, ‘어두운 중에 가매’ 즉 ‘어두움 속으로 가매’ 죽음의 영역으로 사라져 ‘그 이름이 어두움에 덮이나’ 여기서 ‘이름’은 사람의 존재 여부와 그 사람에 대한 인격을 내포한다. 그렇게 낙태된 자가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 이름조차 가려진 것 같으나 저보다는 평안할 것이란 뜻이다. 그만큼 ‘햇빛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나’ 궁극적으로는 ‘평안함이라.’
즉 세상을 사는 동안 자신에게 부여된 분복을 누릴 줄 모르는 영혼은 이보다 못함을 강조한다. 물론 낙태된 생명도 불운하지만 이 세상을 살면서 온갖 불행과 고통을 맛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다는 뜻이다. 여기서의 ‘평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뜻은 안식으로 조용하다, 평온하다의 뜻을 가진다. 그만큼 인생의 허무함을 염두에 두고 상대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예수님은 저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눅 12:56-57).” 하시며 저들의 헛된 수고와 가증함을 지적하신다. 이는 그 원인이 탐심 때문이다. 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15).”
고로 바울 사도는 이에 따른 대책을 전하였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8).” 이를 예수님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고로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는 원론적인 문제의식을 갖게 한다.
오죽하면 낙태한 자가 더 평안하다 할까? 우리가 결국은 죄로 인하여 사는 게 팍팍해진 것 이상으로 그 영혼의 만족함을 잃었다. 그렇게 되어 스스로 그 애씀으로 바벨탑을 쌓기도 하여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4).” 그만큼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의 수고와 애씀이 눈물겹다. 스스로 어떻게든 멸망을 면하고 구원을 이루려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고 헛된 것임을 오늘 본문은 알게 한다.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전 6:6-7).”
그러니 돌아보면 고작 그것뿐인 것을, 다들 잘 알면서 양심도 팽개치고 신앙도 저버리고 기를 쓰고 산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 것을. 그럼 또 무얼,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하다고 떠벌이는데 정말 그게 다일까? 이 원인은 바울은 우리들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서 생기는 일로 보았다. 즉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그러니 다들 사는 게 가관이다. 어떤 이는 자신만의 정치적인 신념이나 종교적인 신념으로 자신을 독자적으로 산다고 자부하지만 사는 게 다들 ‘남들처럼’ 산다. ‘남들’이 기준이 되어 저마다 상식을 운운하면서 남의 기준과 잣대로 자신을 펴거나 오그려서 틀에 짜 맞추고 산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란 게 고작 ‘다들 그러고 살아’ 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뿐, 자기 줏대도 지키지 못하면서 신념을 운운한다.
그러니 오늘 전도자는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9).” 곧 바라는 것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그 즐거움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 머리로만 근사하게 공상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인생의 참 행복이 될 수는 없다. ‘눈으로 보는 것’이란 인생을 즐기고 만족을 느끼는 것으로,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1:8).” 그렇다 해도 족함이 없고 그 허기진 영혼을 달랠 길이 없다. 그러니 공상으로 허황된 꿈을 꾸고 사느니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아는 게 실질적으로 낫다는 것인데, 그 또한 전부는 아니다.
결국은 마음의 문제다. 마음은 영혼에 가 닿는 출구다. 우리 영혼의 갈증은 사는 날 동안의 숙명이다. 죄로 인한 결과로 주를 그 마음에 모시고 산다지만 살면서도 여전히 죄악 된 마음이라,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5-17).” 이로써 우리 영혼은 날마다 힘에 겨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하는 절규가 나온다. 어쩌면 이것이 정상이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1).
이 땅을 살면서 저 천국 백성으로 이와 같아서,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2-3).
어찌 아무렇지 않게 희희낙락, 세상 참 좋아졌다 하면서 저들과 같이 이 모든 문화를 누리고 즐기면서 시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하여 오늘 말씀으로는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전 6:11).” 하는 의미인데,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유익이’ 무엇일까? 앞서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10).” 즉 하나님과 다투는 세상에서 무엇을 같이 공유하고 누리며 살겠다고 아등바등 ‘남들처럼’ 살고자 하는 것일까?
신앙의 본질도 양극화가 심화되어 서로가 극단적으로 흘러가는 형국이다. 이를 다음 장에서 밝히는 바,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7:17).” ‘지나치다’ 하는 것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으로 나름의 성경적인 기준을 가지고 주장하는 것이겠으나 그 또한 자기주장에 매몰되어 갇힌 영혼으로 살아갈 뿐이다. 그것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나는 모르겠으나 우리로 자유하게 하는 것은,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결국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얽매이는 것으로 이미 지나치다. 그것으로 남을 비판하거나 자신을 정죄하기도 하는데,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하여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9).” 그러므로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 이를 위하여는 다만 주의 것으로 사는 것이 복이다.
고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이렇듯 나의 약함을 주가 아시오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그럴 수 있다면 다른 무엇으로도 상관이 없지 않을까? 왜 우리조차 세상적인 기준으로 스스로의 신앙을 판단하려 들고 남의 믿음을 놓고 옳다 그르다 할 게 무엇인가? 내가 주의 것이면, 주의 것으로 사는 것이어서 실패도 성공도, 낙심도 즐거움도 모두가 주 안에서의 일인 것을. 그러므로 주가 아시나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시 7:1).
주가 책임지실 것을.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령하셨나이다
(6).
그러므로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10).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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