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하현. 2025. 11. 17. 05:26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전 7:29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 8:5

 

 

일생을 돌아볼 때 하나님이 하신 일을 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이를 인정하는 데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활동하신다. 이를 깨닫기까지 오늘 솔로몬은 여러 갈등을 지나온 듯하다. 결국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29).” 오늘의 이런저런 파동과 그 여파로 우리가 괴로움을 겪는 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들이다. 나름은 괜찮을 줄 알고 여겼던 것에서부터 균열이 오고 붕괴가 일어난다. 좋아하던 것으로 배신을 겪는 일과 같다.

 

이에 지혜는 권한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우리가 사는 동안 일종의 반복 같은 일이 되풀이 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기쁠 때와 슬플 때를 같이 두셨기 때문이다. 곧 인생을 허무하다 하는 것은,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15).” 이는 우리의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

 

가령 엊그제 난 어디 사고 현장을 보면 아수라장이 될 때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겠나? 하고 의아할 따름이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가속페달을 밟아서 좁은 시장 통을 거침없이 내달리며 여러 명의 사상자를 내지 않나, 다 지어진 줄 알았던 건물이 붕괴되면서 여러 명의 매몰자가 생겨나질 않나, 아침에 웃으며 집을 나섰던 이가 저녁에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면서… ‘길을 가다 마주치는 하나님’은 일일이 그러한 상황에 대해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로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믿음의 동력을 잃지 않는다.

 

오늘 말씀은 이에 대하여 먼저 ‘보라’ 하신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13).” 즉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할 때 ‘행하신 일’이 아니다. ‘행하실 일’도 아니다. ‘행하시는 일’이다. 이는 지나간 일이나 앞으로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다. 오늘 내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하고 묻는다. 이는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1:15).” 하고 먼저 정의하였다.

 

그러므로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6:10).” 하면서 누구도 전능하심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이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음을 강하게 전달한다. 그리하여 오늘 8-9절에서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하고 오늘 우리의 생활반경을 놓고 취하여야 할 태도를 알게 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작정하셨고, 주관하고 계시는 바를 알린다. 곧 그의 통치 아래 있는 우리들은 그러므로 성급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일에 대항하거나 거역하지 말고 순응해야 함을 암시한다. 이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하며 생의 모든 원리가 이 한 문장으로 정리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즉 우리의 모든 일에 ‘임의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형통한 날’에 해당하는 것은 좋은, 선한, 아름다운 일들로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2:1).” 그 또한 누려본들 헛되었다는 결론이다. 여기서 ‘형통한’ 즉 ‘기뻐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뜻은 ‘생각하라’의 히브리어의 뜻과 같이 ‘보다’, ‘관찰(주시)하다’, ‘생각(숙고)하다’의 의미다. 무엇에 대하여는 여러 상황을 정리하여 두 가지 일로, ‘형통한 일’과 ‘곤고한 일’ 이 두 가지로 축약된다. 하나님이 이 두 가지 일을 병행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신다.

 

즉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는데 ‘장래 일’이란 문자적으로는 아직 다다르지 않은 미래의 일이고, 죽은 후의 일이다. 곧 사람의 장래 일을 누가 알겠나? 뉴스에서 보면 그 시장에서 평소와 같이 일하던 이가 그 날에도 물건을 내리고 트럭을 옮기려다 질주하여 저런 참사를 냈다. 저는 졸지에 구속되었고 그로 인하여 여러 가정에 졸지에 슬픔을 떠안게 되었다. 이를 우리 사람이 무슨 수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겠나? 당사자는 물론 사고를 당한 개개인에게나 그 가족들에게나 주변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계신지, 우리로서는 알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우리의 연약함과 제한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순응함으로만 이해를 넘어서 그 뜻을 알게 한다. 순응은 적응하여 받아들임을 전제로 한다. 주어진 외부조건에 맞추어 스스로 반응하는 일이다. 순응(順應)은 한자어 뜻 그대로 순하게 응함이다. 이는 예수님의 여덟 가지 복에 대한 설교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그러므로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하심을 두고 순응을 되새기게 된다(마 5:2-10).

 

심령의 가난함은 늘 하나님으로 그의 말씀에 허기지다. 애통함은 항상 자신의 나약함으로 슬퍼한다. 온유함은 그리하여 말씀 앞에서 순하여진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예수의 삶을 바람으로 복음을 찾는다. 긍휼히 여김은 자신이 받은 긍휼을 인정함으로 가능하다. 마음의 청결함은 주 앞에 늘 바로 살려하기 때문이다. 화평하게 함은 논쟁과 불화로 헛된 주장을 삼가는 것이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음은 복음을 살려고 할 때 겪어야 하는 생의 여러 어려움을 감수하는 일이다. 결국 이는 천국백성의 자질을 뜻한다. 우리 의지로는 할 수 없으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결국 내가 한 게 아닌데, 저마다 기껏 잘하고도 내가 한 것으로 주장하다 가는 길에 쏟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의 지혜는 깨닫기를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언뜻 들으면 불합리한 조처인 것 같으나 실상은 스스로 자초하는 일이다(15). 흔히 ‘내가 어떻게 했는데!’ 하는 자부심으로 자신이 성경보고 기도하고 헌신하고 주의 일에 전념한 것을 늘 기억함으로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이러한 자부심으로 스스로 자신을 인정하는 이가 대체로 완고하다. 완고함으로 자신은 완고하지 않다고 억울해한다. 곁의 사람에게는 물론 훗날에 하나님 앞에 서서도 할 말이 많다. 맞장구치듯 서로가 그런 이유로 억울함을 호소할 때에 무서운 일은,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아, 이런! 정작 주가 모르신다며 ‘내게서 떠나가라’ 하신다. 그러는 동안 이 땅에서 혹은 스스로가 자신하며 살았을, 그것을 믿음으로 여겨 의당 천국을 자기 것으로 여기며 남을 훈계하고 판단하여 감 놔라, 배 놔라 하듯 평가하길 좋아하였을 텐데…. 그래서 지혜는 밝힌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지나치게는 스스로의 의(義)를 추구하고 자랑하려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이를 바울은 여러 설교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곧 이를 의역하면 말씀을 안다고 능사가 아니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으로는 듣는 것이고 사는 일에는 스스로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다. 이에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7:1).” 하면서 스스로에게 바울은 얼마나 엄격하였던가?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 곧 우리의 본질은 그러한데, 스스로는 마치 남들과 다르게 더 많이 기도하고, 더 확실하게 말씀대로 살았다는 확신이 스스로를 자부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바울이 깨달았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곧 나, 우리의 본질은 스스로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절규가 귀감(龜鑑)을 준다. 거울을 보듯 본받게 한다는 뜻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이와 같은 통회와 자복이 예전의 일도 앞으로의 일도 아니라, 매일 매순간의 일이어서 내가 나를 온전히 인정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심령이 가난하여지고 온유하여 애통하며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된다.

 

하여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이와 같이 우리가 순응하면서 얻는 제일 경험은 감사였다. 그렇지 않음으로 감사를 온전히 할 수 없고, 그리하여 여러 정신적인 망상과 망각으로 양극성정동장애(조울증)를 겪거나 흔히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를 겪는다. 토요일에 오는 둘째 아이가 그 이유로 약을 먹고 수업을 하는데, 엊그제는 약을 먹지 않은 탓인지 혼자 실실거리며 웃거나 다른 짓을 하다 뭐라 하든 말든 잠만 잤다. 나는 이 모든 결정적인 요인은 하나님께 향한 감사가 소모하였거나 본래 없거나 했을 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의외로 믿음 좋고, 주의 일에 누구보다 열심이고 헌신적인 이들 가운데 이와 같은 이기적인 신앙의 소유자들이 많다. 저들의 특징으로는 무슨 주장에든지 자기의 답을 우선한다. 상대의 주장을 다 들어주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 뜻대로 한다. 그러다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극단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는다. 마치 그 일에서 나는 책임이 없다는 듯 심한 모욕과 저주도 서슴지 않는다. 가령 그러다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보자! 하는 식으로 매정하다.

 

바울은 또 다른 설교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순전히 우리는 ‘그리 여겨주시는 은혜’로만 산다. 내가 한 것을 운운하다 이미 자기 의를 나타내는 것은 스스로 마치 무슨 시험을 통과한 수험생처럼 믿음도 신앙도 구원도 그리 제 값 주고 산 줄 안다. 하여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3:11).” 바울은 이를 재차 강조하면서,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12).”

 

그러므로 오늘 지혜는 이르기를,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7-18).”

 

이를 시편으로 묵상하면,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 37:10, 55:23).

 

하여,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73:18-19).

 

곧 우리가 교만할 때는 주를 경외하지 않을 때이다. 주를 경외함으로 주의 권능을 인정하게 되고, 주를 인정할 때에 믿음으로의 순응도 가능하여진다. 영국의 어느 단체 운동가로 저기 믿음으로 순응하면서 외친 구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 하는 것이다. 저는 일생의 자신의 병을 고치는 데 허비하였다. 20여 년을 그렇듯 병상을 옮겨가며 낫기만을 바라다가 어느 날 아침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달은 것이 순응이다. 고로 자신이 현재 병상에서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다음에 병이 낫고 어떻게 살며 헌신하겠다는 생각을 걷어내고 외친 말과 행동이 활력이 있어 자신을 변화시켰고 영국 일대 병원들의 환자들 참여운동 단체로까지 확장하였다. 훗날에 저는 의사로보다 환자로 환자를 살린 수가 더 많은 것을 통계적으로 발표하였다.

 

이를 지혜는 간결하게 정리하는 바,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수명은 짧아지느니라(잠 10:27).” 그러니 오늘 우리 사회의 저 알량한 몇 년 권세를 남은 일생 감옥에서 어둠으로 지내야 하는 것을 바뀌는 것을 종종 보면서도 알 수 있다. 하여 오늘 지혜는 일갈하길,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왜 그런가 하면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3).” 희희낙락 살면서 그러는 동안 언제 주를 바라며 경건을 사모하겠나? 그러니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4).” 이를 두고 염세적이라 한다면 저는 표면적으로만 신앙을 살 뿐이다. 정작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5).”

 

이쯤 나이가 들고보니 누가 뭐라 책망하는 경우가 없다. 듣는 것을 까먹었거나 더는 들을 필요를 못 느끼거나… 결정적으로는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6).” 정작 우리 인생의 비극이 무엇인지 이 한 구절의 은유로 알게 한다. 이에 오늘이 또 하루 주어진 것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5-6).”

 

그러므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5-6).” 이를 인정하면서, 오늘도 순응함으로 말씀 앞에 앉아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 8:1).

 

나의 일생과 일련의 여러 사회사건을 보면서도,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3-5).

 

이 은혜 위의 은혜에 감사하며,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