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하현. 2025. 11. 18. 06:08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전 8:1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 9:10

 

 

보면 그 얼굴에서 다 보인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얼굴이 온화하다. 점점 그 얼굴빛이 밝아진다. 어느 자리의 가족사진을 보았다. 그들 가운데 목회를 하는 이와 사업을 하는 이와 교회를 다니는 이와 안 다니는 이가 있었다. 가만히 보니 누가 어떤 이인지 얼굴빛이 말해주는 것이다. 오늘 말씀의 첫 구절이 이를 증거한다.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1).”

 

‘얼굴의 철학’은 놀랍게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장 우선적으로 드러나면서 자신은 볼 수 없는 부분이다. 자신이 자신을 보려면 거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하고 이는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인데, 그 사람의 얼굴은 ‘광채가 나게 하나니’ 하고 오늘 본문은 이에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로 모델이 되었던 사람과 6년 후 가룟인 유다의 얼굴로 모델이 된 사람이 한 사람인 일화는 놀라운 의미를 함축한다. 곧 우리의 얼굴은 저 두 얼굴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을 묵상하게 한다.

 

지혜가 우리 얼굴의 사나운 것을 변하게 한다. 사실이 그러하여 사람의 얼굴에서 그 사람을 본다. ‘누가 진실로 지혜로우냐?’ 하고 묻는 것은 앞서 7장에서 언급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헤쳐 나갈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유도해서 본문에서 가르치는 참된 지혜에 대한 깨달음과 그 유익함을 이 첫 구절로 개괄하고 있다. 곧 지혜의 능력과 효용성은 본문의 끝부분에서 뚜렷하게 밝히는 바, 지혜로 인해 심성이 변하여 그 마음이 평안할 때 얼굴빛이 변하여 새 사람인 것을 알게 한다. 이는 그에게 지혜가 있어 자비롭고 은혜로운 마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5-26).”

 

하여,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 4:6-8).

 

하는 시인의 찬송과 같다. 곧 민수기의 증거처럼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여 그 평강의 빛이 그대로 사람의 얼굴로 나타난다. 한 사람의 얼굴에서 예수의 얼굴과 가룟인 유다의 얼굴이 동시에 존재한다. 잠언에서도 지혜의 능력과 효용성에 대해 언급하며,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것이요,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 내리라(잠 2:10-12).” 할 때에 그 얼굴이 이를 먼저 증거한다. 어떤 상황에서 저의 사연을 듣기 전에 그 얼굴이 말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 3:18).”

 

하는 것 같이,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9:10).

 

하는 오늘 시편의 찬송과 같다. 이는 오늘 지혜의 말과 같이 “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8:6).” 그러한 ‘때와 판단을 아는 자’는 ‘곧 지혜가 그 마음에 들어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 영혼을 즐겁게 한다. 그리하여 저는 근신함으로 자신을 지킨다. 명철이 있어 자신을 보호할 줄 아는데, 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자신의 길을 돌이키는 자이다. 앞서 잠언은 이를 증거하였다.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의연한 것은 세상의 이치가 사람의 상식에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에 오늘 본문은,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8:14).”

 

나는 요즘 내란 재판에 대한 중계를 자주 보는데, 그 자리의 피고인과 증인으로 나오는 자들의 얼굴과 말을 보고 듣는다. 그러다 보면 거짓말이 보이고, 숨기는 것이 들리는 듯하다. 그의 얼굴이 이를 말해준다. 웃음 띤 얼굴로 피고인석의 아무개가 묻는데 그의 웃음 뒤에 있는 가증함이 스스로의 실소로 나오고, 이에 당당한 증인은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말하지만 거짓을 증언하는 사람은 얼굴이 어둡고 시선이 고르지 못하다. 모른다, 아니다, 하는 말들에도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위선이 드리운다. 이에 오늘 본문은 관조적인 어조로 이러한 생에 대하여 논한다.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15).”

 

결국 오늘 우리의 여러 상황과 근거가 원인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을 모심에 따른 여부가 갈리는데,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곧 우리는 모두 ‘해 아래 인생 허무’를 놓고 이를 극복하여 사는 이가 있는데 그에 따른 그릇된 자세와 바른 자세를 오늘 본문은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6장 1절부터 오늘 본문 8장 13절 중에서 교훈은 7장에서 그대로 밝히는 바, 해 아래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는 데 있어 모두 ‘열 가지의 교훈’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지혜의 가치를 얼굴빛으로 상기시킨다. 이어 하나님의 뜻에 순복할 것과 그 앞에 겸손할 것을 권한다. 이로써 화를 면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제외에서 평안이 깃든다.

 

우리 믿는 자들이 평안한 것은 구원의 확신 때문이다. 곧 심판으로의 멸망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왜들 법정에서 증언을 하거나 피고인석에 있으면 두려운지, 그들 얼굴은 먼저 말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생의 불행 가운데 가장 두려운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임을 안다. 하여 순복할 때 그 얼굴은 평안하다. 아이 셋과 아내를 한꺼번에 잃고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하고 찬송할 수 있는 것도 그 모든 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곧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전 7:29).” 할 때에 우리로서는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주를 경외함으로 어느 것으로 붙들려서 끌려가지 않는다. 앞서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당시 그 르네상스 시대의 대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다른 제자들의 얼굴은 수월하게 상상하였는데, 예수의 얼굴과 가룟인 유다의 얼굴은 대비되어 어려웠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마지막 만찬 광경을 벽화로 그릴 때 저 두 얼굴의 모델이 그렇듯 한 사람이었다는 데서 우린 놀란다.

 

1492년 다빈치는 예수의 모습을 상징할 수 있는 깨끗하고 선하게 생긴 19세의 젊은이를 찾았던 것이다.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고 6년 동안 예수의 11명의 제자 그림을 모두 다 완성한 다빈치는 마지막으로 예수를 팔아넘긴 배반자 가룟인 유다의 얼굴을 위해 모델을 찾았다. 어느 날 당시 로마의 시장은 로마의 지하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수백 명의 죄수들 가운데 한 번 모델이 될 얼굴을 찾아보라고 제안하였고, 그의 제안에 따라 다빈치는 로마에서 가장 잔인하고 악랄한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 감옥을 방문한 뒤 그곳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던 한 죄수를 선택하게 되었다.

 

1500년 전 유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은화 30개를 받고 예수를 팔아넘긴 사람의 얼굴을 사형수 가운데서 찾아서 묘사한 다빈치는 몇 달에 걸친 작업 끝에 유다의 모습을 완성하였다. 그는 모델로 데려왔던 죄수를 향해 “이제 감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통고하였다. 그런데 연행되다 저가 비로소 다빈치 앞에 무릎을 꿇고는 자신을 모르겠느냐며, 몇 년 전 자신이 다빈치가 만나서 예수의 얼굴의 모델로 그렸던 바로 그이가 자신임을 밝혔다. 죄수는 말하길, “저기 저 그림 속에 그려진 예수의 모델이 바로 6년 전 나요!” 하고 토로하였다.

 

저 두 얼굴이 우리 얼굴에 있다는 것, 속담에 이르길 ‘사람은 평생 얼굴이 열 번 변한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다. 일생 동안 무수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 마음이 변하고 삶이 변하여 얼굴은 이를 고스란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를 두고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하여 우리 믿는 자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빛이 있다. 이는,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하신 데서 우리의 얼굴이 먼저 이를 증거함이다. 그리하여 죽으면서도 그 얼굴에 빛이 났던 스데반 집사의 얼굴 같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우리의 얼굴이 말보다 정직하다. 이는 하나님이 정하신 바, 우리 안의 하나님과 화목함이 얼굴에 드리운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2-13).”

 

전에 누구의 임종을 지키며 예배를 인도하였을 때 나 역시 그 얼굴의 실상을 목격하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암과 투병하며 일그진 영혼으로 그 얼굴빛이 까맣고 찡그려 고통 가운데 있었는데, 함께 보낸 50여 일의 성경공부와 부득이 그 마지막 순간 예배까지 인도하면서 나는 저의 곁에서 주께 그 영혼을 부탁하며 귓가에 주의 인도하심을 전하였는데, 기도가 끝나고 저의 영혼이 떠나면서 그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함을 보았다. 그때 나 역시 목사 목시를 두 번째 떨어지고 갈등하며 내 길을 찾을 거였는데, 그와의 만남이… 아니 저의 얼굴의 말들이 나로 하여금 오늘 이처럼 주의 길을 가게 하였다. 누가 알겠나만,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10).”

 

우리의 얼굴이 그 증거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하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우리는 안다. 어제 저녁에 막 잠들려고 할 때 누가 전화를 했다. 남들에겐 이른 저녁이라, 저는 퇴근하고 운동가면서 뜬금없이 전화를 한 것인데, 사과를 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서울 끝자락의 대학에서 강의하고 돌아오다 지하철에서 갑자기 공황을 느끼고 황급히 안정제를 삼키면서 내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평소 늘 다그치듯 약을 끊으라는 둥 기도로 이겨내라는 둥 하며 가볍게 던졌던 자신의 태도와 말을 사과하고 싶다는 거였다. 그때마다 나는 그저 웃을 뿐 머리로는 나도 아는데, 우리의 삶이 어디 그러하던가? 받아들임으로 나는 평온하였고 그러든가 어쩌든가 모든 걸 주께 맡긴 뒤로는 누가 뭐라 하든지 그저 그의 말들도 이해한다.

 

그렇듯 자신이 처하고 나니 그 상황에서의 심한 공포와 얼결에 물도 없이 약을 마른침과 함께 삼키면서 내 생각을 했다니… 나는 통화 중에도 피식, 웃음으로 답을 대신할 뿐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그러할 때 우리의 얼굴빛이 여러 말을 대신하고 그 뜻을 함축하는 법이다. 곧 딸애 결혼을 앞두고 상견례가 있을 텐데, 아내는 옷을 사고 서로 뭘 입어야 하나 어쩌나 말하다, 딸애는 문득 ‘아빠는 얼굴이 다 말해주니까!’ 하고 아무 옷이든지, 어쩌든지 상관없다는 소리에 피식, 웃었다. 나도 모르겠지만 나도 안다. 어느 순간 나 역시 내 얼굴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다 오랜만에 누굴 만나거나 새로 만나면 늘 얼굴이 인자하네, 어쩌네, 하는데 나는 그럴 때면 느낀다.

 

고통으로 일그러져 사느라 여념이 없던 시절에도 내 안의 주의 영이 얼굴빛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을 한참 후에 그때 그 사람들과 떨어지고 나서야 알았다. 유난히 나를 어려워하거나 또는 좋게 여겨주는 이유를 말이다. 실제 젊을 때 술 먹고 어느 길거리 점방에 들어갔을 때 늙수그레한 사주관상장이가 내게 받은 돈은 돌려주며 ‘알 수 없다’는 말로 피했었다. 같이 갔던 친구도 물론 재미로 그땐 술 취해서 그러려니 했던 일인데,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내 안에 나와 함께 하셨구나, 하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인정한다.

 

이제 확신하는 바,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시 9:1-3).

 

이를 해 아래 인생 가운데서 느끼고 누리고 그 얼굴빛으로 산다는 게 복이다. 하여,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0).

 

그러므로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18-20). 아멘.